의외로 화보 촬영은 많이 안 하셨더라고요. 오늘처럼 화보 촬영이 있는 날이면 따로 준비하는 게 있나요?
일단 음식이죠. 요즘은 전날 먹은 음식이 얼굴에 드러나더라고요. 진짜 어렸을 때는 전날 밤 12시에 라면도 끓여 먹고 했어요. 얼굴이 붓더라도 ‘젖살이다’ 우길 수 있었으니까.(웃음) 요즘에는 절제해요. 그런데 어제는 모임 나갔다가 튀김이 너무 맛있어서 계속 먹어버렸어요.
운동도 즐겨 하세요?
그럼요. 필라테스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하려고 해요. 제가 남산을 워낙 좋아해요. 예전에 남산 밑에 살 때는 일주일에 두세 번은 올라갔어요.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은 남산타워 찍고 오는 코스를 가요. 자주 하진 못해도 스쿠버다이빙이랑 골프도 좋아합니다.
6월 19일 <마당이 있는 집>이 공개됩니다. 3년 만의 드라마 복귀작인데, 출연 섭외 당시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했어요.
<마당이 있는 집> 대본을 처음 보고 일단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르를 떠나서 내용과 인물이 흥미로웠거든요. 제가 맡은 인물인 ‘문주란’은 조금 이상해 보일 수도 있어요. 살면서 흔히 없을 충격적인 일을 겪고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죠. 그래도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가요. 동시에 수상쩍은 면이 있고요. 저는 주란의 수상쩍음을 현실적이라고 느꼈어요. 공감할 수 있었거든요. 시청자도 이 대본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요.
그간 스무 편이 넘는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셨어요. 출연작을 고르는 기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뭐든지 직관적으로 선택하는 편이에요. 대본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 역할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리죠. 그런 작품은 고민을 할지언정 결국은 하게 돼요.
<마당이 있는 집> 예고편 속 김태희를 보면서 우리가 알던 그 김태희가 맞나 싶었습니다. 첫 스릴러 작품이기도 하고요. 그런 점에서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숙제나 어려움은 없었나요?
말씀하신 대로 제게 <마당이 있는 집>과 ‘문주란’은 완전히 낯선 장르고 캐릭터였어요. 하지만 ‘완전히 다른 김태희를 보여줘야 한다’는 식으로 연구하고 계산하면서 연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내가 주란이다’라는 생각만 했어요.
<마당이 있는 집>은 원작 소설이 있잖아요. 작품을 준비하는 동안 원작이 도움이 됐나요?
처음 대본을 받을 때 원작 소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출연이 확정되고 대본을 읽다 보니 원작 소설이 궁금해지더라고요. 소설은 마음이나 심리 상태를 구체적으로 묘사했을 테니까요. 그래서 처음 읽어봤어요. 아까도 말씀드렸듯 ‘내가 주란이’ 되려면 주란이 어떤 심정인지 이해하고 공감하는 게 중요할 테니까요. 읽는 동안에는 소설 속 주란과 김태희가 연기하는 주란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읽는 시기와 사람에 따라 매번 감상이 바뀌기도 하니까요.
자연인 김태희와 문주란은 얼마나 닮았나요?
둘은 살아온 인생이 너무 달라요. 주란은 엄마의 욕심 때문에 꼭두각시 인형처럼 자라왔어요. 그러던 어느 날 언니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엄마는 그 죽음을 주란의 탓으로 돌려요. 그렇게 주란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고 현실도피를 위해 일찍 결혼하고 싶어 해요. 그에 비해 저는 아주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거든요. 하지만 주란을 연기하면서 ‘나도 저랬겠구나’ 하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나라면 다를 수 있었을까?’ ‘나라도 저랬을까?’ 생각하면서 드라마를 보시면 더욱 재미있을 거예요.
상대역 ‘추상은’의 임지연 배우와는 첫 만남이죠. 현장에서 호흡은 어땠나요?
일단 연기를 너무 잘해요. <마당이 있는 집> 촬영 기간에 <더 글로리>가 방영됐거든요. 보고서 ‘미쳤다 지연아’ 문자 보낸 게 기억나요.(웃음) <마당이 있는 집>에서 ‘상은’은 또 다른 의미로 무거운 면이 있어요. 가정폭력 피해자로 불행하고 처참한 삶을 살거든요. 보고 있으면 단순한 연민보다 복잡미묘한 감정이 들어요. 저는 결말을 알고 연기했는데도 상은을 마주할 때마다 혼란스러웠어요. 그 정도로 연기를 해요.
극중 남편인 김성오 배우는 어땠나요?
주란은 정말 남편 재호밖에 모르는 ‘재호바라기’거든요. 첫사랑과 일찍 결혼했고 오로지 남편에게만 의지해서 살아요. 성오 씨는 촬영 현장에서 주란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는 단 한 사람이 되어줬어요. 든든했죠. 반면 자연인 김성오는 수다쟁이 아줌마 같은 느낌이에요. 어딜 가든 주변에 웃는 사람들로 가득한 사람이 있잖아요. 딱 그런 사람이에요. 덕분에 너무 편안하고 즐거웠어요.
주인공 부부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했으니 촬영 현장 분위기도 확실히 좋았겠네요.
정말요. 예전과 비교하면 촬영 환경도 많이 달라졌고요. 일단 출퇴근 시간이 명확하니까. 100% 사전 제작이고요. 밤샘 촬영이 없으니 현장에서 다들 상큼한 상태로 일해요. 한 번은 제가 피투성이가 된 언니를 보고 경악하면서 오열하는 장면을 찍어야 했어요. 긴장한 채로 세트장에 딱 들어갔는데 재즈 음악이 나오더라고요. 와인 바에 온 것처럼요. 스태프분들 손이 전부 피투성이가 됐는데도 너무 편안해 보였어요. 분위기가 좋으니 제 마음도 편했어요. 몰입에 방해되는 느낌은 전혀 없었고요.
감정적으로 힘든 역할을 한다고 해서 꼭 현장 분위기까지 심각해질 필요는 없는 거네요.
맞아요. 저는 연기할 때의 감정을 사적인 영역까지 끌고 오지 않거든요. 말 그대로 연기잖아요.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는 게 배우의 일인데 현장 분위기가 무거우면 몸이 긴장하고 경직돼요. 마음이 누그러지면 그만큼 유연하게 연기할 수 있어요.
<천국의 계단>부터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 <아이리스> <용팔이>까지 흥행작이 많아요. 하지만 흥행과 별개로 배우 커리어에서 분기점이 된 작품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랑프리>라는 작품이 딱 그래요. <그랑프리>에서 양동근 선배님을 처음 뵀거든요. 정말 많이 배웠어요. 배우 양동근을 보면서 ‘저렇게까지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구나’ ‘같은 장면을 이런 식으로도 해석하고 표현할 수 있구나’ ‘장면을 살리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이 필요하구나’ 배웠어요. 제 연기 생활의 첫 분기점이 되어준 작품이에요.
막연한 질문이지만 좋은 배우는 어떤 배우라고 생각하세요?
작품 속에서 100% 자신이 맡은 캐릭터로 보이는 배우 아닐까요? 예를 들어 <마당이 있는 집>을 보면서 시청자가 주란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다면 좋은 배우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배우의 이름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겠죠. 하지만 ‘김태희가 저럴 수도 있을 것 같아’ 동의하게 한다면 좋은 연기라고 생각해요. 그게 저의 이번 목표이기도 했고요.
성인이 되기까지 쭉 울산에서 자랐는데 사투리 쓰는 걸 한 번도 못 봤어요.
노력 많이 했어요.(웃음) 데뷔 초기 인터뷰 보면 경상도 억양이 심하게 남아 있어요. 서울 사람은 모를 수 있는데, 저처럼 경상도에서 나고 자라서 서울말 배운 사람은 바로 눈치챌 거예요. 예전에는 연기할 때 사투리가 나오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굉장히 힘들었죠. 제가 평소에 엄마랑 대화를 정말 많이 하는데 데뷔 초에는 엄마랑 일부러 대화도 자제했어요. 완전 부산 토박이거든요.(웃음)
그럼 경상도 토박이 캐릭터를 연기하면 한결 편하겠네요?
그렇지도 않아요. ‘나는 이제 서울말 쓰면서 연기하는 서울 사람이다’ 하면서 살아온 시간이 꽤 되잖아요. 리셋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보시는 분들도 제가 갑자기 사투리 쓰면 어색하게 느낄 수도 있고요.(웃음) 언젠가는 경상도 사투리 제대로 쓰는 역할 해보고 싶어요. 예전에 드라마 <이 죽일 놈의 사랑>에서 김사랑 씨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역할을 맡았어요. 서울분이신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사투리를 너무 사랑스럽게 잘하니까 캐릭터가 훨씬 빛나 보이더라고요. 저도 그런 욕심이 있죠. 잘해야겠지만요.
길거리 캐스팅으로 모델과 배우 일을 시작하셨잖아요. 남들보다 준비할 시간이 적은 상태로 현장에 뛰어들었을 텐데 그만큼 고민도 컸을 것 같아요.
저는 ‘이게 내 길이다’ 하면서 배우를 꿈꾼 게 아니라, ‘고민만 하지 말고 차라리 하면서 고민해보자’ 식으로 뛰어들었잖아요. 부족한 게 너무 많았죠. ‘계속하는 게 맞나’ 고민도 했고요. 그래도 일하고 결과물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평생 이 일을 하면서 살아도 좋겠다’ 마음을 굳혔어요. 예전에는 연기가 매번 숙제처럼 힘들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연기가 일탈이 되어주기도 해요. 재미있고 잘하고 싶고요. 점점 더 연기를 사랑하게 됐어요.
김태희의 인생 영화 5
<노트북>, 닉 카사베츠, 2004
<레미제라블>, 톰 후퍼, 2012
<나를 찾아줘>, 데이비드 핀처, 2014
<스타 이즈 본>, 브래들리 쿠퍼, 2018
<탑건: 매버릭>, 조셉 코신스키, 2022
평소 쉴 때는 어떻게 보내세요?
쉴 틈이 없어요.(웃음) 육아를 하면 하루가 정말 빨리 가더라고요. 원래는 공상을 많이 하는 편인데 요즘은 그럴 새가 없죠. 저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삶을 충실히 잘 살 때 좋은 연기가 나온다고 생각하거든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고민하기보다 당장 눈앞에 놓인 일들을 열심히 하려고 해요.
이 질문만큼은 안 드리려고 했는데, 궁금해서 여쭙습니다. MBTI가 어떻게 되십니까?
INFP예요.
지금까지 대화만 놓고 봤을 때는 완전히 E일 것 같았는데 의외네요.
의외죠? E는 외향이잖아요. 저는 혼자만의 시간이 되게 중요한 사람이더라고요. 생각해보면 옛날부터 스스로도 내성적이라 느꼈던 것 같아요.
‘김태희’를 인터넷에 검색하면 ‘김태희 리즈’가 연관 검색어로 가장 먼저 뜨더라고요. 한 번씩 찾아보기도 하나요?
절대 안 찾아보죠.(웃음) 이미 지나간 과거잖아요. 인스타그램을 하다 보면 가끔씩 뜰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빠르게 화면을 내리죠. 사실 저는 검색도 잘 안 해요. 맛집 정보 찾는 것 정도가 전부예요.
제가 김태희면 수시로 ‘김태희’ 검색해볼 것 같은데요.
검색할 때가 있긴 해요. 지금처럼 새로운 작품 홍보 기간에만. ‘인터뷰가 어떻게 나오나’ ‘드라마 홍보는 어떻게 되고 있나’ 검색해보죠. 그러고 나면 몇 달이고 제 이름을 검색하는 일은 없어요.(웃음)
김태희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 분들이 가장 먼저 봐줬으면 하는 작품이 있나요?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요? 제가 학창 시절에 미술을 되게 좋아했어요. 의류학과에 간 것도 미술을 좋아해서이기도 해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미술 과외를 오래 했는데 한 날은 그림이 막히는 거예요. 도저히 그림이 늘지 않고 답답하더라고요. 그때 과외 선생님이 정밀묘사를 시키셨어요. 한 가지 사물을 세심하게 끝까지 파는 거죠. 그러고 나서 다른 그림을 그리면 실력이 훅 늘어 있더라고요. <마당이 있는 집>은 제게 정밀묘사 같은 작업이었어요. 연기를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이었고, 새로운 분기점이 되면 좋겠다 싶은 작품이죠. 그런 점에서 <마당이 있는 집>을 봐주시면 좋겠네요.
배우 김태희와 자연인 김태희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사실 두 영역을 크게 분리하지 않는데요. 요즘에는 혼자만의 시간이 중요하고 필요해요. 작품 볼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
최근에 본 작품 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나요?
요즘 여배우의 전성기가 굉장히 길어졌잖아요. 선배님들 작품 보면서 매번 감탄해요. 최근 기억에 남는 건 김희애, 문소리 선배님의 <퀸메이커>. 엄정화 선배님의 <닥터 차정숙>도 무척 재미있게 봤어요. 전도연 선배님의 <길복순>은 보는 내내 ‘어쩜 지금까지도 저렇게 섹시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요즘 작품은 다 보셨네요. 시간 충분히 있는 것 같은데요?(웃음)
저 시간 내려고 얼마나 노력하는데요.(웃음) 재미있는 작품 찾으면 어떻게든 짬을 내려고 해요. 요즘은 자기 전 <나의 해방일지> 보는 게 큰 낙이에요.
예전에 한 방송에서 “30대가 되면 성격을 바꾸고 싶다”고 하셨더라고요. 원하는 대로 바꾸셨나요?
그때 그 말을 한 건 아마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을 거예요. 저는 학창 시절 내내 이렇다 할 일 없이 모범생으로 살았어요. 20대가 되고 보니까 모르는 게 너무 많더라고요. 경험하고 배워야 할 것들이 무궁무진하니까 까마득하더라고요. 융통성도 없었고요. 그때 저는 뭐든지 번복하는 걸 너무 싫어했어요. 나이를 먹다 보니 그렇게 사는 게 배우로서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도 그런 경향이 없지는 않지만 많이 유연해졌어요. 스스로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더 이상 크게 부끄럽거나 창피할 것도 없고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 20년 후 김태희는 어떤 배우로 기억됐으면 하나요?
다음 작품이 궁금한 배우. 20년 후에도 작품을 할 수 있다면 정말 큰 축복이겠죠. 최근에 김혜자 선생님이 출연하신 <마더>를 다시 봤거든요. 너무 새로운 거예요. 김혜자 선생님이 풀밭에서 춤추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도대체 다음 작품은 어떨까?’ 싶잖아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지금보다 친근감 있는 배우가 되고 싶은 욕심도 있어요. 저를 잘 아는 분들은 제가 정말 허술하고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시청자는 잘 모르실 테니까요. 연기 안팎으로 더욱 인간미가 느껴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김태희의 인생 드라마 5
<응답하라 1988>, 신원호, 2015~2016
<밀회>, 안판석, 2014
<또! 오해영>, 송현욱, 2016
<스토브리그>, 정동윤, 2019~2020
<나의 해방일지>, 김석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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