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화보 촬영이 <아레나> 화보였더라고요. 오늘은 스튜디오 밖에서 만났는데 어땠나요?
솔직히 죄송스러워요. 일하는 것 같지 않아서.(웃음) 야외 화보 촬영은 처음인데 놀러 온 것 같아요. 다들 프로니까 나만 열심히 하면 되겠구나 싶었는데 막상 꽃구경하고 계곡물에도 들어가니까 노는 기분이에요. 이래도 되나 싶고.
일하면서 노는 기분이 들면 프로죠. 연극배우로 연기를 시작했잖아요. 지금까지 거의 한 해도 빠짐없이 연극무대에 섰고요. 김선호에게 연극이 중요한 이유가 있나요?
연극을 할 때 연기가 가장 많이 느는 것 같아요. 저는 진짜 연기 잘하고 싶거든요. 연극이 배우에게는 특별한 지점이 있어요. 몇 달 동안 똑같은 연기를 반복하니까요. 다른 배우가 저랑 같은 역할을 연기하는 걸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되고요. 그러면서 조금씩 실력이 쌓이는 기분이 들어요.
연기도 운동처럼 반복훈련이 도움이 되는군요.
그럼요. 3개월 동안 똑같은 표정과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하다 보면 다른 “안녕하세요”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부분이 연극과 영화가 다른 점이죠. 영화나 드라마는 촬영이 끝나면 그 연기를 반복할 일이 없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야구에 비유하면 연극무대는 배우에게 스프링캠프 같은 곳이네요.
물론 작품이니까 책임감이 크죠. 그럼에도 연극 연습할 때는 오늘처럼 놀러 온 기분이 들어요. 한 선배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바쁜데 연극을 하러 가세요?” 했더니 “쉬러 가는 거지 뭐” 하셨어요. 연극 작업에 한 번 들어가면 매일 못해도 6시간씩은 연습해요. 배우들끼리 모여서 온갖 이야기를 하죠. 서로의 상황, 다른 점, 힘든 점, 그리고 좋은 점. 지금 제가 기자님이랑 마주 보고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듣고 웃고 떠들어요. 그러다 보면 마음이 누그러져요. 나중에 돌아보면 ‘와, 재밌게 놀았다’ 하게 되더라고요.
이번 기사가 나갈 때쯤 영화 <귀공자>가 개봉합니다. 영화는 이번이 처음인데 연극 연기가 도움이 되었나요?
그럼요. 모든 운동은 하체가 중요하다고 하잖아요. 비유하자면 연극 연기는 스쿼트에 가까워요. 연기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를 고민하고 배울 수 있어요.
이를테면 어떤 것이 있나요?
발음이나 목소리의 톤, 배우로서의 유연함이죠. 연극 연기는 스크린 연기와 기술적으로 다른 지점이 있어요. 예를 들어 영화에서는 아주 작게 얼버무리면 재미있을 장면인데 무대에서는 그렇게 못해요. 객석에서 들리지 않으니까요. 슬픔 감정을 눈빛으로만 연기하면 앞에 세 줄까지만 알아보실 거예요. 대신 크게 소리를 지르거나 넘어지는 거죠. 드라마에서도 할 수는 있지만 연극에서 더 효과적이에요.
연극이 스쿼트라면 영화나 드라마는 정교한 타격 기술 같은 느낌이네요.
맞아요. 카메라 앞에서는 대사나 표정을 아주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모든 연기는 감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맥락이 같습니다.
배우는 쉴 때 무얼 하는지도 중요할 것 같아요. 평소에는 어떻게 시간 보내세요?
푹 쉬려고 합니다. 요즘에는 가족이랑 시간을 많이 보내요. 어제 회식 자리에서 동료 배우와 ‘배우의 가족은 참 힘든 거 같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배우는 심적으로 일하는 직업이잖아요. 그 때문에 가족이 눈치를 보거나 가슴 졸이기도 해요. 누군가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행동을 더 조심해야 하는 상황도 생기고요. 같이 산책하고 밥 먹으면서 ‘거뜬합니다’ 안심시켜드리려고 하죠.
앞으로 공개될 영화 두 편 모두 누아르 장르입니다. 다른 작품과 촬영 기간이 겹치는 경우도 있을 텐데 헷갈리지는 않나요?
헷갈리죠. 그래서 가능하면 작품 기간이 서로 안 겹치게 조율하는 편이에요. 저는 한 작품을 맡고 있는 동안에는 다음 작품 대본을 여러 번 보지 않습니다. 다음 작품도 제가 마음에 들어서 택한 거잖아요? 대본을 읽으면 자꾸 생각나고 빨리 하고 싶어져요. 그러다 보면 지금 맡고 있는 역할에 집중을 못하더라고요.
출연할 작품을 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겠네요.
그렇죠. 제 실력이 모자라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사실 출연작을 정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사람입니다. 그 작품에 참여하는 감독님, 배우님, 스태프분들을 보고 ‘같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뒤로는 두 번 생각 안 해요. 바로 오케이죠.
<귀공자>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는 어땠나요?
어우, 가슴이 뜨거웠죠. 다음 작품으로 영화가 들어왔다고 해서 “영화요?” 했어요. 대본 받기 전에 감독님 먼저 뵀어요. 박훈정 감독님. <마녀> 정말 재미있게 봤거든요. 만나자마자 “감독님, <신세계>도 <신세계>인데 <마녀>에서 벽 무너지던 장면 진짜 미쳤어요” 했거든요. 감독님께서 “내가 그런 걸 좀 신경 쓰지” 하면서 좋아하시던 게 생각나네요.(웃음)
감독님이 말씀하신 캐스팅 이유가 궁금하네요.
주변에서 추천받으셨대요. 예전에도 김선호를 한 번 추천받았는데 제 프로필 사진이 마음에 안 드셨다고.(웃음) ‘이 얼굴은 누아르가 아닌 것 같은데’ 했는데 이번에도 추천하길래 ‘그래, 얼굴이나 한번 보자’ 했다 하시더라고요.
지금까지 연기한 캐릭터 중에 인간 김선호와 가장 비슷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다 김선호예요. 밝든, 어둡든 조금씩 김선호가 있어요. 역할에 맞춰서 사람이 조금 바뀌기도 하고요. 킬러 역할 맡는다고 해서 킬러 본능이 제 안에서 묻어나지는 않죠.(웃음) 문득 말투에서 조금 거친 면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어? 내가 이런 말도 쓰네?’ 해요. 가장 비슷했던 건 <미치겠다, 너땜에!>의 ‘김래완’. 배우 하기 전의 김선호와 비슷해요.
배우 전에는 어땠길래요?
낯가림 심하고 소심한? 사람이 나이를 먹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직업인으로서 태도가 형성되잖아요. 그 태도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저는 소극적인 사람이었어요.
지금까지 대화 나눈 모습만으로는 상상이 안 가네요. 앞으로 맡고 싶은 역할이 있습니까?
곧 공개될 <귀공자> <폭군>에서 누아르 연기를 해봤으니 다시 사람 냄새 나는 역할로 돌아가고 싶어요. 뭐랄까, 일부가 되고 싶다? 특정 인물이 서사를 이끌어가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여러 인물이 저마다의 삶을 보여주는 작품이 있잖아요. 최근에는 후자 중에서도 작은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단 하나’보다 ‘그중의 하나’가 되어보고 싶죠.
김선호가 꼽은 인생 영화 5편
<무간도>, 유위강 & 맥조휘, 2002
<중경삼림>, 왕가위, 1994
<너는 내 운명>, 박진표, 2005
<뷰티풀 마인드>, 론 하워드, 2001
<이프 온리>, 길 정거, 2004
선스틴(<트루웨스트>), 선렌틴(<거미 여인의 키스>), 선호경민(<옥탑방 고양이>), 선호이든(<메모리 인 드림>) 등 별명이 굉장히 많더라고요. 가장 좋아하는 별명이 있습니까?
지금은 공자. <귀공자> 앞두고 팬들이 ‘우리 공자 왔니?’ ‘공자 돌아왔구나?’ 하고 불러주세요. 어쩜 이렇게 매번 별명을 지어주시나 신기하고 감사해요.
아직 예고편만 봤지만 <귀공자> 속 김선호는 우리가 알던 김선호와는 너무 다르더라고요. 그런 점에서 스스로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었을 것 같아요.
이질감이 가장 큰 숙제였죠. 배우 김선호의 울타리가 있을 텐데 그걸 넘어서면 안 될 것 같았어요. 기존의 김선호와 완전히 다른 김선호로 보이면 안 될 것 같았거든요. 생판 다른 사람이 돼서 스크린에 나타나면 관객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까 덜컥 무섭더라고요. 일단은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보자. 김선호라는 울타리 안에서 끝까지 가보자 했죠.
여태까지 많은 칭찬을 받아왔을 텐데, 그중에서도 가장 듣기 좋은 칭찬이 있었나요?
“연기 잘한다”는 말이 제일 좋죠. 좋은 연기의 기준은 없지만요. <귀공자> 촬영 기간에 그런 적이 있었어요. 박훈정 감독님이 모니터링하고 손뼉 치면서 “선호야, 좋다. 이번 장면 진짜 잘했다” 하셨는데 그 기분이 3일 가더라고요. 이 희열은 정말 끊을 수가 없구나. 쇼핑하고 맛있는 것 먹는 거 좋죠. 그런데 잠깐이에요. 물론 칭찬받으면 들떠서 다음 연기를 못할 때도 있어요. 그럼 또 좌절해요. 희열과 좌절의 반복이지만 이런 재미로 배우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호한 질문이긴 하지만 김선호가 생각하는 좋은 배우는 어떤 배우인가요?
대학교에서 처음 연기 배울 때부터 지금까지 똑같아요. ‘다음 작품도 같이하고 싶은 배우.’ 현장에서의 태도, 기술적으로 훌륭한 연기력, 동료를 빛나게 해주는 배려. 이 삼박자가 맞으면 다음에도 같이하고 싶은 배우가 될 수 있어요. 그보다 좋은 배우가 있을까요?
그동안 선호 님의 연기를 보면서 ‘참 잘 웃고 잘 우는 배우다’ 생각했어요. 배우에게 웃는 것과 우는 것 중 무엇이 더 기술적으로 어렵나요?
아마 모든 배우가 똑같이 얘기할 텐데요. 웃는 게 가장 힘듭니다. 웃는 연기만큼 어려운 게 없어요.
의외네요. 저는 우는 게 어려울 것 같았어요.
배우가 처음 연기 배울 때 대부분 소리 지르고 우는 것부터 해요. 정서적으로 해소되는 느낌이 있거든요.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니까요. 슬픈 감정은 내 안에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잖아요. 반대로 웃음은 여러 요소가 딱 맞아떨어질 때 나오고요. 어떤 촬영장에서는 웃는 장면만 40번 넘게 찍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러면 눈물을 흘리면서 웃는 연기는 정말 어렵겠네요.
어렵죠. 마음의 내실이 단단하게 다져져야 그런 연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칫 가벼운 마음으로 복잡한 감정을 연기하려고 하면 분명 티가 날 거예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참 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생각이 듭니다. 연기를 하는 것과 보는 것 중에는 무엇이 더 즐겁나요?
남들 연기 보는 게 즐겁죠. 대단하잖아요. 경이롭고요. ‘도대체 저 사람한테 오늘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연기가 저렇게 좋지?’ ‘오늘 아침에 무슨 한약이라도 먹은 거야?’ ‘비결이 뭘까?’ 하면서 연기를 볼 때가 제일 재밌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은 다르잖아요. 좋아하는 일을 잘하는 일이라고 착각하고 싶을 때도 있고요. 선호 님에게 연기는 어떤 쪽에 가깝나요?
좋아하는 일에 가깝죠. 좋아하니까 잘하고 싶어요. 그런데 목숨 걸고 연기한다고 실력이 비례해서 좋아지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연기와 상관없이 인생을 살면서 무언가 깨달으면 그게 연기로 이어질 때가 있어요. 좋은 배우가 되려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해요.
말씀하셨듯 배우는 심적으로 하는 일이니까요. 요즘에는 배우로서 어떤 노력을 하나요?
너무 정확하게 연기하지 않으려고 해요. 예전에는 ‘배우는 관객이 상상할 수 있게 해야 한다’하는 말이 이해가 안 갔어요. 발음도 표정도 정확하면 좋은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연기를 보다 보면 ‘쟤가 왜 가만히 있지?’ ‘지금 죽고 싶을 텐데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상상하게 되잖아요. 그때 더 극적이고요. 보는 이들이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연기. 요즘에는 이런 걸 신경 써요.
배우도 질문하고 싶어질 때가 있을 것 같아요.
있죠. 나이를 따지지 않고 질문합니다. 어제도 그래요. 드라마 리딩 현장에 저보다 한참 어린 배우들이 있었거든요. 연기하는 걸 보면서 제가 막 웃었어요. 이제 갓 스무 살 넘긴 친구들이 저렇게까지 연기할 수 있구나. 한 친구가 악역을 맡았는데 굉장히 친절하게 연기하는 거예요. 제가 오랫동안 공부해서 알게 된 걸 이 친구들은 벌써 알더라고요. 그래서 물어봤어요. “혹시 아까 그 연기 네가 계획하고 한 거야?” “원래 욕을 잘해?” 하고요. 욕을 너무 맛깔스럽게 하더라고요. 그랬더니 평소에 좀 하긴 하는데 늘 하지는 않는대요.(웃음) 정말 나만 잘하면 되겠다. 나 너무 게으르다. 대본 열심히 봐야지. 질문하면 반성하게 되는 것 같아요.
롤 모델이 있나요?
롤 모델은 없습니다. 모든 배우가 롤 모델이기도 하고요. 모두에게 배우고 싶어요. 특히 선배님들을 존경하죠. 저는 연기에도 발견이 있다고 생각해요. 최초의 연기를 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이를테면 조커. 처음 조커를 연기한 배우가 섬뜩하게 웃는 연기를 하려고 얼마나 고민했겠어요. 그건 업적이죠. 따라 하고 모방하는 건 쉬워요. 선배 배우의 첫걸음이 있으니까 우리가 조금 더 빨리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요즘 저 자신이 한심하다니까요. 그런 업적이 없어요. 언젠가는 발견이라고 부를 만한 연기를 하는 게 제 꿈이에요.
모든 직업인이 그렇듯 배우도 스트레스 관리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일이 뜻대로 안 되고 힘들 땐 무얼 하나요? 저는 일단 교촌치킨을 시킵니다.
저도 맛집 찾아다니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요. 먹는 게 제일 크죠. 원래 술은 거의 안 마셨는데 요즘에는 맥주 한 캔의 재미를 알아버려서.(웃음) 좋더라고요. 음악 들으면서 산책하는 것도 좋아해요. 특별히 좋아하는 음악은 따로 없는데 일단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걸으면 마음이 정리돼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일상이랑 가까워야 하는 것 같아요. 언제든지 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그런 의미로 오늘 촬영 마치고 저녁으로 뭘 드실 건가요?
오늘은 여기서 고기 구워 먹을 생각입니다. 제가 신나는 이유가 있다니까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50년 뒤에 김선호는 어떤 배우, 어떤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하나요?
계속 연기하는 사람이면 좋겠네요. 연기만 할 수 있다면 어떤 모습이 되더라도 행복할 것 같아요. 사람으로서는 그냥 재미있는 사람. 같이 있고 싶은 사람. 어렵지도 심각하지도 않고. 좋은 의미로 가벼운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김선호가 꼽은 인생 연극 5편
<트루웨스트>, 샘 셰퍼드
<킬 미 나우>, 브래드 프레이저
<리처드 3세>, 윌리엄 셰익스피어
<터칭 더 보이드>, 데이비드 달로
<옥탑방 고양이>, 김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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