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찍고 싶은 대로 사진 찍어도 됩니다. 다 열려 있어요. 딱 두 개만 조심해 주세요. 워치메이커들의 얼굴은 촬영하지 말고, 플래시를 터뜨리지 말아주세요.” 튜더 매뉴팩처에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2023년 3월 말,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스위스에는 두 가지 종류의 시계 회사가 있다. 공장을 잘 열어주는 회사와 안 열어주는 회사. 튜더가 속한 롤렉스 계열은 안 열어주는 회사에 속한다. 아주아주 안 열어주는 회사라고 봐도 된다. 스위스 시계 업계는 비밀이 많고 롤렉스와 튜더는 조금 더 많다.
그래도 가끔 좋은 일에 잔치를 열고 싶은 건 인지상정인 모양이다. 튜더는 2018년부터 최신형 공장을 짓기 시작해 5년 만인 2023년 3월에 실제 운영을 시작했다. 마침 2023년 워치스 앤 원더스 기간이었다. 튜더는 전 세계 저널리스트와 콘텐츠 생산자를 초대했다. 한국에서는 <아레나>가 기회를 얻었다. 시계 취재를 몇 년 해온 입장에서 그 정도는 안다. 이런 일은 다시 없다. 그런 생각 끝에 르 로클에 도착했다. 제네바에서는 차로 1시간 반쯤 거리, 스위스 시계 산업의 주 허브 중 하나, 17세기부터 시계를 만들어온 곳이다.
“여기서 여러분은 사람의 손과 로봇이 높은 수준으로 조합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튜더 매뉴팩처에 들어가자 안내하는 직원이 말했다. 17세기부터 시계를 만들던 마을이 4세기 만에 로봇 손을 받아들인 셈이다. 스위스가 물가는 비싸도 없는 말은 안 한다. 실제로 튜더의 새 매뉴팩처에서는 인간의 손과 각종 산업용 로봇이 자연스럽게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고 있었다.
각종 생산공정의 자동화는 실제로 이 매뉴팩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모든 생산공정은 별도의 시스템을 통해 기록되고, 그 기록을 역추적해서 제품 불량률을 줄인다. 다른 회사라면 손으로 할 일도 자동화 기계로 대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핸즈 장착이나 기름 주입 등. 그런 곳에서 줄어드는 인건비가 시계라는 상품 가격에도 적용될 것이다. 21세기의 장인정신이 로봇을 통해 구현되고 있었다.
매뉴팩처 견학은 총 8단계로 이루어졌다. 곳곳에서 현장 담당자가 짧은 설명을 해주고 질문을 받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그중에서 유일하게 촬영이 허락되지 않은 곳이 있었다. 부품 출고 창고. 튜더 매뉴팩처의 핵심인 물류 자동화 공정을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건물 깊은 곳 창문이 없는 방이 매뉴팩처의 창고다. 워치메이커들이 조립할 때 필요한 부품들이 이 창고에서 자동으로 전달된다.
말이 쉽지 이런 사내 물류선을 구축하려면 설계부터 새로 짓는 건축이 필요하다. 튜더가 매뉴팩처를 새로 지은 이유 역시 짐작이 간다. 수준 높은 생산공정 효율화와 물류 자동화 구현. 그렇지 않을 거라면 건물 리모델링이나 증축 정도로도 충분히 공장 운영이 가능하며, 실제로 그렇게 잘 운영되는 공장도 많다. 새로 짓는 공장일 경우 설계 단계에서부터 혈관 같은 사내 물류망을 깔아둔다. 튜더는 2018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건물 건축에 3년, 내부 준비에 2년을 들였다고 했다. 내부 시스템 구축의 난이도를 엿볼 수 있다.
비슷한 선례가 있다. 오메가. 오메가는 프리츠커 상을 받은 세계적인 건축가 반 시게루에게 의뢰해 그림 같은 공장을 지었다. 그 공장 역시 외관이 굉장히 멋지지만 정말 아름다운 건 외관이 아니라 물류 시스템이다. 건물 중앙에 인간의 접근이 차단된 자동화 창고가 있다. 창고는 먼지를 막기 위해 지상과 기압이 다르다. 그 안에서 로봇 팔이 계속 움직이며 시계 부품을 곳곳에 전한다. 튜더 매뉴팩처 역시 그 정도로 수준 높은 사내 물류망을 확보했을 것이다.
그 모든 게 이른바 ‘스위스 퀄리티’다. 짧은 시간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잠깐 구경했어도 이 건물의 완성도가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벽부터 달랐다. 내벽은 얼핏 보면 모두 회색 콘크리트 같다. 실은 바닥과 벽과 천장의 처리 방식이 모두 다르다. 천장은 원목 판재를 대어서 콘크리트에 나뭇결을 냈다. 벽은 노출 콘크리트 페인트로, 바닥은 같은 회색 톤의 미끄러짐 없는 우레탄 코팅으로 마무리했다. 그 모든 게 다 공정이고 단가다. 돈도 많이 든다. 내가 아는 한 스위스인은 이런 걸 다 하는 사람들이다. 이걸 다 하고 비싼 값을 붙여 판다.
튜더는 곧 탄생한 지 1백 년이 된다. 1백 년 가까운 경험을 쌓은 기업은 선택도 남다르다. 튜더 매뉴팩처 지하 관리실에서 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 사실을 깨달았다. 매뉴팩처의 위치는 바로 강 옆. 튼튼하게 건물을 지으려면 땅을 파야 했다. 땅을 파니 물이 나왔다. 수심 30m 아래 암반층까지 파야 했다. 이들은 30m를 파고 철 파이프 3백30개를 박아 올려 건물의 토대를 구축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현대사회의 예술은 시계가 아니라 시계 공장인가 싶어졌다.
그런데 왜 튜더의 상품성은 더 좋아지고 있을까.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시계에 ‘가성비’ 운운하는 건 말이 안 되지만 가격 대비 사양이나 마감을 봤을 때 튜더의 가격 대비 완성도가 높은 건 사실이다. 그 비결도 직접 보니 약간 알 수 있었다. 높은 수준의 기계화와 적극적인 로봇 도입이다.
보통 시계 무브먼트를 다 만든 뒤에는 자체적인 성능 검사 과정을 거친다. 자세를 바꿔보거나 물에 넣어보는 등의 일이다. 튜더에서는 그걸 기계가 한다. 로봇 팔에 프로그래밍을 해두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단순 업무니까. 검사가 끝난 부품을 A 지점부터 B 지점까지 옮기는 것도 로봇의 일이다. 그런 곳에서 추가 소요 예산이 줄어들 것이고, 그만큼 시계의 가격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인건비가 비싼 지역에서 높은 품질을 유지하면서 적정 가격을 맞추려면 노력을 할 수밖에. 세상에 그냥 이루어지는 건 없다. 17세기부터 21세기까지 시계를 만들어오는 동안 이들도 계속 노력해서 변해왔다. 튜더 매뉴팩처는 그 변화의 최신판이다.
“한 번 좋은 퀄리티를 만드는 건 쉬워요. 계속 좋은 퀄리티를 유지하는 게 어렵지요.” 튜더에 탑재되는 무브먼트를 만드는 회사인 케니시 디렉터 장 폴 지라르댕이 말했다. 케니시 역시 시대 변화의 산물이다. 스위스 시계는 원래 각 브랜드마다 전문 분야가 다르다. 케이스 전문 회사, 바늘 전문 회사, 엔진 역할을 하는 무브먼트를 잘 만드는 곳이 있다. 범용 무브먼트 생산력이 가장 좋던 곳이 스와치그룹 산하의 ETA다. 그런데 ETA가 2010년대부터 타사에 공급을 제한할 거라 발표했다. ETA를 납품받던 회사들은 방법을 찾아야 했다. 케니시는 그때 만들어진 새로운 방법이다. 튜더, 태그호이어, 샤넬이 각각 투자해 만든 무브먼트 전문 기업이다. 케니시에서 튜더의 지분율은 전체 60%다. 튜더의 새 매뉴팩처와 케니시 매뉴팩처가 건물을 공유할 만하다.
나는 공장 취재를 여러 번 갔다. 경험이 쌓이자 대량 생산설비의 예술성이 보였다. 수준 높은 대형 생산설비는 대단히 엄격하게 운영되며 모든 공정은 빈틈없이 효율적이고 모든 세부 사항에는 응당한 이유가 있다. 튜더도 같다. 튜더 매뉴팩처는 천장 솔라 패널을 통해 전력을 자체 생산하며, 지하에는 공장 내 먼지를 차단할 목적으로 온습도를 조절하는 거대한 장치가 있다. 공장 주변 잔디를 깎는 데에도 규칙이 있으며(1년에 한 번) 튜더는 지역 법규에 따라 생물다양성 보호에도 신경 쓴다. ‘시계 공장인데 왜 그렇게까지?’ 싶어지지만 그 역시 스위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높은 기준으로 오늘도 시계 공장이 돌아간다. 인간은 인간의 자리에서 시계를 조립하고, 기계는 기계의 자리에서 바늘을 꽂고, 다 만들어진 시계는 이동 로봇과 로봇 팔에 의해 COSC 테스트를 받는다. 지금 한국의 26개 판매처에서 팔리고 있는 튜더는 모두 그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고급품이다. 그리 생각하면 시계가 조금 달리 느껴지기도 한다. 시계도 시계지만 그 고향이 대단해 보이는 것이다.
튜더 매뉴팩처 공장 길이
150M
주차 공간
200대(모터바이크 80대)
암반에 박은 파이프의 수
300개
금속 골조의 무게
960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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