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어디에서 자신의 세계를 구현할까? 2023년 1월의 파리 멘즈 패션위크 리스트에 셀린느가 보이지 않았을 때부터 든 의문이다. 2022년 6월, 팔레 드 도쿄에서 파리 남성 패션위크의 피날레를 에디 슬리먼이 장식한 이후부터 그는 카테고리 속에 범주화되는 걸 강력하게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존 시스템이 형성해둔, 맞춰진 시공간 속에 스스로를 가두기보다는, 스스로 구축한 시스템을 우리에게 보여주길 원했기 때문일 거다. 뭐 충분히 이해되는 지점이다. 언제나 그랬듯 에디 슬리먼은 럭비공처럼 여기저기 튀어오르는 개성 넘치는 패션 디자이너니까. 패션위크가 끝난 지 꼭 2주 후에 에디 슬리먼이 이끄는 셀린느의 남성 원터 23 쇼가 펼쳐진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 여성 컬렉션을 미국에서 선보였는데, 대체 이번에는 어디서 쇼를 벌일까? 예상외로 도시는 다시금 파리였다.
에디 슬리먼과 셀린느
그럼 파리의 어디를 쇼 장소로 선정했을까? 2월 10일로 쇼 날짜를 못 박아둔 상태에서 쇼 개최 3일 전 드디어 초대장이 날아왔다. 인비테이션에 각인된 장소를 주목했다. 어떤 장소냐에 따라 쇼의 세계관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디 슬리먼의 셀린느 남성 윈터 23 쇼는 파리의 전설적인 클럽 ‘르 팔라스(Le Palace)’에서 펼쳐진다고 했다. 파리 서브컬처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진 않다. 하지만 르 팔라스라는 장소의 히스토리를 살짝 들춰보니, ‘아하’라며 맞장구를 칠 수 있었다. 심지어 그가 16세 시절부터 자주 드나들던 곳이라 했다. 동시에 이곳은 패션 디자이너 에디의 미래를 밝혀준 곳이라고 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에디 슬리먼의 문화적 근간에는 로큰롤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악은 들리는 것이지만, 그것의 완성적 형태는 보이는 것으로 귀결된다. 개인적으로 에디는 음악을 보여주는 디자이너라 생각한다. 에디 슬리먼의 의식 세계 기저에는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로큰롤 스피릿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 그가 셀린느 남성 윈터 23 쇼장으로 르 팔라스를 선택한 건 어쩌면 당연한 회귀였을지도 모른다.
파리의 심장, 르 팔라스
한껏 기대에 부풀어 파리행 항공기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2023년 2월 10일 저녁 7시경 르 팔라스 앞에 당도했다. 르 팔라스를 지칭하는 전통적 네온사인 아래에는 ‘CELINE’가 함께 발광하고 있었다. 파리 8구에 위치한 이 클럽 앞은 에디 슬리먼의 셀린느 쇼를 위해 도로 봉쇄까지 했다. 대체 누가 쇼에 참석할지는 그때까지 몰랐다. 최근 하우스 브랜드들의 쇼에 K-팝 스타들이 참석하는 게 관례처럼 여겨지고 있는 상황. 그렇다면 이번 셀린느 쇼에도 셋 중 하나는 오지 않을까라는 추측만 있었다. 바리케이드 너머 들려오는 환호성은 리사, 박보검, 뷔가 참석한 작년 6월의 셀린느 쇼를 연상시켰다. (이번에는 셀린느의 뮤즈인 블랙핑크 리사가 쇼에 참석했다.) 각설하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르 팔라스에 들어섰다. 오래된 곳임이 분명했다. 퀴퀴했다. 그런데 연상됐다. 그 옛날 음악과 문화를 사랑했던 파리지앵으로 가득했던 이곳에 깃든 세월의 향기. 관객들이 각자 자리를 잡자, 이내 조명이 꺼지고 쇼가 시작됐다.
사운드트랙, ‘Girl’
역시 에디 슬리먼이었다. 몽환적이고 도발적인 일렉트로닉 펑크 멜로디가 사이키델릭하게 점멸하는 조명 사이로 들려왔다.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쇼 프로그램 북을 슬쩍 커닝했다. 수어사이드(Suicide)의 ‘Girl’이었다. 수어사이드는 1970년대 후기 뉴욕 펑크를 대표하는 밴드 중 하나다. 아니 2인조이니 밴드보다는 듀오가 맞겠다. 벨벳 언더그라운드부터 시작된 뉴욕 지하실의 노이즈 사운드가 스리 코드로 무장한 뉴욕 펑크로 진화했고, 이내 신시사이저를 전면에 내세운 일렉트로닉 펑크에 다다랐다. 에디 슬리먼은 트랙 하나를 쇼가 진행되는 동안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 셀린느 남성 윈터 23 쇼 역시 그랬다. 역사적 공간으로서의 르 팔라스에, 역사적 음악인 ‘Girl’이 2023년의 역사적 배경을 생성했다. 그리고 에디 슬리먼의 셀린느 컬렉션을 걸친 모델들이 클럽을 종횡무진했다.
‘파리 신드롬’ 서사의 완성
르 팔라스의 좁은 통로를 부유하는 에디 슬리먼의 컬렉션 피스들은 진정한 로큰롤이었다. 마치 1970년대 후반의 수어사이드 멤버 앨런 베가와 마틴 레브가 21세기의 르 팔라스에 현신한 듯한 느낌이랄까? 이번 쇼의 주인공은 레더였다. 그래서 사운드트랙으로 반복되는 수어사이드 멤버들이 더욱 더 연상되었는지도 모른다. 가죽이야말로 록 스피릿과 결별할 수 없는 주요 소재다. 동시에 이는 로큰롤 뮤직의 판타지이기도 하다. 클래식 하드 록의 전성시대부터 펑크 록, 헤비메탈, 모던 록 등으로 이어지는 반세기 이상의 역사 속에서 레더 재킷과 팬츠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해왔으니까. 그 판타지를 에디 슬리먼은 셀린느라는 브랜드를 통해, 르 팔라스라는 역사적 클럽에서, 수어사이드의 트랙을 사용해 완벽하게 구현한 셈이다. 아니 구현이기보다는 새로운 탄생이 맞겠다. 타이트한 블랙 레더 팬츠를 바탕으로 스터드와 큐빅이 잔뜩 박힌 바이커 레더 재킷이 페어링된다. 셀린느의 홍보 자료를 빌리자면 ‘더블 레더’의 완성이다. 여기에 캐시미어와 잉글리시 트위드로 만든 오버사이즈 코트가 곁들여지고, 레오퍼드 패턴이 프린트된 코트가 가미된다. 심지어 르 팔라스의 오랜 역사적 향취를 셀린느 오뜨 퍼퓨머리 컬렉션 중 하나인 향수 ‘나이트 클러빙’으로 뒤덮는다. 수어사이드의 에로틱한 일렉트로닉 사운드트랙 ‘Girl’이 에디 슬리먼의 모든 피스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감각적 순간이었지 싶다. 이렇게 에디 슬리먼의 셀린느가 창조한 ‘파리 신드롬(Paris Syndrome)’은 완성됐다.
더블 레더와 함께한 에디 신드롬
이렇게 찰나의 에디 슬리먼 쇼가 막을 내리고 르 팔라스는 다시금 본연의 기능을 회복했다. 마치 조금 전 파리 신드롬이 꿈의 한 조각이었던 것처럼. 그리고 셀린느는 현존하는 두 밴드를 무대에 올렸다. 하나는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밴드 ‘더 머더 캐피털(The Murder Capital)’이었고, 또 하나는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줄곧 아이코닉한 밴드 ‘더 리버틴스(The Libertines)’였다. 16세 에디 슬리먼이 르 팔라스를 드나들며 꿈꿔왔던 어떤 뮤직과 패션의 완전체, 동시에 청춘 시절의 에디가 즐겼던 파리의 컬처를 고스란히 재현한 셈이다. 거대한 서사 ‘파리 신드롬’이 종영되자, 시대의 상징인 록 밴드가 스테이지를 채운다. 이들의 앙코르곡이 마무리되자, 르 팔라스의 지하 살롱에선 디제이가 음악을 튼다. 나는 그곳에서 또 다른 파리 청춘이 빛내던 열망의 눈동자를 보았다. 과거의 에디 슬리먼이 르 팔라스에서 키워왔던 꿈처럼, 오늘의 파리 신드롬을 통해 미래의 꿈을 키우는 그 눈동자 말이다. 패션을 포함한 문화가 지진 총체적 힘은 정말 압도적이다. 굳이 정량화할 수는 없지만, 그 힘은 미래의 반석이 될 것이 분명하다. 내가 만난 그 눈동자들 중에 에디 슬리먼을 뛰어넘을 누군가가 등장할 테니까. 만일 여기까지 내다보며 르 팔라스에서 ‘파리 신드롬’을 준비했다면? 그에게 갈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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