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하죠, 호흡 좀 가다듬고 시작할까요?
천천히 하세요. 저는 괜찮아요. 저 인터뷰 좋아해요. 대화 나누는 거 좋아하거든요.
아까 촬영장에 들어올 때 헤드셋을 쓰고 있던데, 무슨 음악을 들었나요?
류이치 사카모토요. 이번에 새로 나온 앨범이랑, ‘Aqua’라는 곡을 좋아해서 들으면서 왔어요.
지금 시간이 밤 9시예요, 평소 이 시간에 주로 뭐 해요?
지금쯤이면 씻고 나서 노트에 뭔가를 쓰고 있을 거예요.
뭔가를 쓴다는 건, 일기? 메모?
그냥 이것저것 그때그때 떠오르는 단상을 적어요. 뭐든 좋으니까 잡생각은 줄이고 많이 쓰자 다짐했거든요.
계기가 있었나요?
올해 초에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서 컨디션이 바닥을 쳤었어요. 평소에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가까운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나눠도 갈증 같은 게 영 풀리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괜찮아지더라고요.
그 글, 사뭇 궁금한데요?
아, 별 내용 없어요.(웃음) 그냥 오늘 내 몸 상태는 어떤가, 내가 지금 뭘 느끼고 있나 등을 알고 싶어서 시작한 거라. 그렇게 적다 보면 가끔 내가 한 주 동안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보일 때가 있더라고요.
좋네요.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연습도 되고. 참, 사전에 화보 콘셉트를 상의했는데, 소장품으로 체스와 카메라를 준비해 왔어요.
체스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가 사주신 거예요. 어렸을 때 부모님이랑 체스를 많이 뒀는데, 요새 다시금 체스를 두고 있어요. 저는 장거리 비행기 안에서 제일 재밌는 게 모니터로 하는 체스 게임이에요. 13시간 비행 동안 잠자는 2~3시간 빼고 거의 10시간 체스를 둔 적도 있어요.
체스가 왜 그렇게 좋아요?
글쎄요. 우선 체스는 킹을 잡아야 하는 하나의 목표가 있잖아요. 상대의 수에 어떻게 대항할까 생각하고 선택하는 과정이 재밌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체스를 둘 때 순간순간이 즐거워요. 왜 우리가 어떤 일에 집중할 때 잠깐 외부의 자극은 차단되고 어디론가 떠나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잖아요. 저는 일종의 그런 몰입의 순간이 좋아요. 아무 생각 안 하고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에 집중하는 순간요.
카메라는요?
카메라는 제가 정말 꾸역꾸역 돈을 모아 산 비교적 비싼 물건인데, 좋아하는 순간이나 찰나,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싶어서 큰 맘 먹고 구매했어요. 그래서 저에게는 큰 의미가 있어서 오늘 가지고 왔습니다.
방금 그 두 가지, 체스와 카메라라는 단서도 그렇고, 짧은 대화지만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 한순간도 허투루 쓰지 않는 사람이구나. 문득 그런 인상을 받았어요. 순간순간 정말 최선을 다하는 성향이 보여요.
그러고 싶어요, 정말요.
순간과 찰나, 봄이라는 계절의 정서와도 맞닿아 있죠. 요즘 꽤 많이 포근해졌어요.
그러게요, 부쩍 봄이 가까워진 걸 느껴요. 저희 집 베란다 너머로 나무가 보이는데, 시기마다 변화하는 나무를 보면서 계절의 순환을 체감해요. 어느 시기가 되면 꽃이 피고, 조금 지나면 열매를 맺고 또 그 열매를 따 먹으러 새가 와서 앉거든요. 겨울에 빨간 열매가 달리는데, 새들이 먹고 남은 열매가 떨어지면 얼마 안 있다가 연두색 이파리들이 피어나요. 안 그래도 엊그제 그 나무 보면서 이제 또 금방 초록초록해지겠구나 생각했어요.
예쁘죠. 가만 보면 봄은 기다림을 연습하기 좋은 계절 같아요. 앙상한 가지에도 봄이 되면 어김없이 새 잎이 피어나고. 그런 걸 보면서 인생의 순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고요. 제가 너무 감상적인가요?
아녜요. 저도 안 그래도 오늘 아침에 운동하고 집에 돌아오는데, 집 앞 경로당에 일광욕하는 할머님이 계셔서 “할머니, 이제 봄이 왔나 봐요” 하고 너스레를 떨었어요. 할머님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시더라고요.
평소에 동네 할머님들이랑 대화 자주 해요?
네, 할머님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저에겐 하루 중 가장 좋은 때예요.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시거든요. 아침 일찍 나오셔서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는 동네 할머님들이 계시는데, 가끔 안 보이면 무슨 일 있나 궁금하고 걱정도 돼요.
할머님들이 공통적으로 제일 많이 하시는 말씀은?
몇 동 몇 호 사는 예의 바른 청년, 살 좀 쪄! 더 마른 것 같아.(웃음)
여기저기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있군요. 충무로에서도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잖아요. 지금 김은희 작가의 <악귀>를 촬영 중이죠? 새로운 작품 캐릭터와는 많이 친해졌나요?
강력범죄 수사대에서 일하는 20대 경찰 역할이에요. 어떻게 하면 배역에 충실하게 몰입할 수 있을까, 여러 고민을 하며 열심히 찾아나가는 중이죠. 언제나 쉬웠던 적은 없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예요. 선배님들처럼 경험이 많지 않아서인지 작품을 촬영하는 매 순간이 저에게는 산 넘기거든요.
대본 속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드는 건 배우의 몫이죠. 어떤 방법으로 그에 접근하는 편인가요?
우선 대본을 처음에 받으면 제가 맡은 배역에 대해 호기심이나 의문을 먼저 작동시켜요. 보이지 않는 뭔가를 찾아나가는 그 느낌. 그게 없으면 연기하기가 어렵더라고요. 그 점이 배우로서 재밌고 즐겁지만 동시에 버거운 과정이기도 하죠. 주변 친한 동료 배우들 중에는 이것저것 준비해서 꺼낼 카드가 많은 분들도 있어요. 저는 그런 타입은 못 되고 온전히 한 가지 면에 집중해서 하나하나 연결고리를 찾아 맞춰나가는 편이에요.
많은 경험과 영감이 필요하겠네요.
지금 LA에서 영화 편집 공부를 하고 있는, 제가 선생님처럼 모시는 친한 형이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어요. “인풋이 없으면, 아웃풋도 없다.” 저는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해요. 10대 때 배운 게 20대에 나오고 이어서 30대, 40대 쌓여간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영감을 위해 의식적으로 인풋을 찾지는 않아요.
해답은 이미 내 안에 있는 거다?
네, 작품 속 배역에 온전히 집중하는 순간 내 안에 쌓여 있던 것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직 연기 경험이 별로 없지만, 연기를 어떻게 표현해야 한다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을 표현해야 할까, 그런 질문이 생겨요.
그렇다면 홍경의 연기는 표현보다 표출에 가깝다고 봐야 하나요?
저에게 연기는 결국 순간에 솔직한 태도라고 형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순간에 솔직하고, 순간에 충실하고, 순간에 반응하기도 벅차요. 물론 내가 충분히 알지 못하는 세계나 내 생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닐 때는 당연히 그에 맞는 준비를 해요. 작품마다 준비 과정이 다른데, 그런 시간이 연기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이고 큰 배움이기도 하고요.
그런 과정 속에서 깨달은 생각의 전환점이 있다면요?
각 작품마다 저는 얻은 게 많은데, 특히 <약한 영웅 Class 1> 작업하면서 배우로서 많이 배웠고, 새로운 걸 느꼈어요. 그게 뭐냐 물으신다면,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착각이라도 해볼 수 있었다는 것? 아, 이게 전력을 다하는 걸 수도 있겠구나. 이게 전력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유수민 감독님께 감사하는 게 같이 일하면서 함께 걸어간다는 건 이런 것이구나 느끼게 해주셨다는 거예요. 같이 작업했던 모든 순간이 다 좋았거든요. 너무 힘들지만 정말 다 좋았어요. 뭔가 보이지 않는 것을 좇을 때 혼자 갈 수 없잖아요. 그럴 때마다 감독님이 옆에서 손을 잡아주고, 일으켜 세워주고 뒤에서 밀어주셨어요. 같이 악몽을 꾸고 공유하면서 만든 작품이라 저한테는 큰 전환점이 됐죠.
이 세상에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죠.
맞아요. 머리로는 다들 알잖아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다 같이 하는 거다. 물론 이전 작품들도 마찬가지지만 <약한 영웅 Class 1>은 유독 그 연대감을 강하게 느낀 작품이에요.
현장에 대한 애정과 연기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느껴져요. 동시에 유명세보다는 연기하는 행위 그 자체에서 기쁨과 성취감을 얻는구나 싶고.
이 일을 하면서 한번도 인기를 얻어야지, 유명해져야지 생각한 적이 없어요. 20대를 살아가면서 제가 세운 하나의 목표가 있는데, 절대 의미 없는 것들에 나라는 사람을 소비시키지 말자예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그냥 내 길을 묵묵히 가고 싶은 마음이랄까요.
멋지네요. 때로는 소신을 지키기 어려운 순간도 오기 마련인데요.
사실 생각한 것,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는 순간이 훨씬 많아요. 그게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소망을 품고 있어요. 다른 걸 하고 싶다. 단순히 스타가 아니라, 연기적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배우가 되자. 시간이 걸려도 나를 믿고 가자. 그렇게 스스로 독려해요. 그렇게 믿는 데는 내가 어떤 것들을 좋아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고, 저도 나름의 입맛이 있는 편이라, 글을 보고 그것들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거든요. 어떤 게 나에게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키는지, 호기심을 일으키는지, 내 마음을 울리는지, 나의 다른 모습을 꺼내 보이게 만드는지 그런 것들에 주목해요. 그렇다고 선택을 속전속결로 하는 성격은 아니에요. 머리 싸매고 오래 고민하는 타입이거든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실패가 또 다른 시작, 전환점이 되더라고요.
멋진 말이네요. 동감해요. 지금도 쌓아나가는 과정이지만 돌아보면 행복했던 순간도, 힘든 순간도 다 필요했어요. 작은 점들이 모여서 선이 된다는 말처럼요.
우리 대화에도 전환이 필요한 것 같은데, 가벼운 질문으로 넘어가죠. 최근 본 영화 중에 시네필 홍경의 마음에 꽂힌 작품은 뭔가요.
<애프터썬> 좋더라구요. 왜 보면, 내 삶은 내가 속속들이 겪으며 기억하는데,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인 아버지, 어머니의 삶은 파편밖에 볼 수 없잖아요. 부모님의 어린 시절은 내가 보지 못했고 알 수 없으니까요. 나를 키우며 하셨을 생각, 겪었던 일도 알 수 없고. 너무 요상하고 슬프지 않아요? 애틋하고, 애잔해서 영화를 보는 내내 울컥했어요. 여운이 긴 작품이라 꼭 보셨으면 좋겠어요.
항상 자식은 나중에 깨닫죠.
그렇다면 나는 지금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이에요. 근데 그런 거 떠나서 그냥 재미있어요.
그나저나 오늘밤에 관한 단상은 일기에 어떻게 남길 건가요?
내 인생의 첫 스위트룸?(웃음) 농담이고.
재밌는데요?
그럼 그걸 타이틀로 할게요.오늘 인터뷰하면서, 비록 짧은 대화지만, 아, 나만 그런 건 아니구나, 그런 일종의 동질감, 위로 같은 걸 느꼈어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쓸 것 같아요.
그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에 채우고 싶은 건요?
올해 끝날 때쯤 다시 만나요. 그때 말씀드릴게요. 올해 끝나가는 시점 즈음 다시 만나서, 그간 어떤 이야기가 채워졌는지 이야기해보면 좋지 않을까요?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약속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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