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근황은 어떤가요?
공연 연습합니다. 연극 공연은 시작했고요, 3월 초에 시작하는 뮤지컬 연습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라는 뮤지컬의 의사 역할이에요. 다중인격 범죄자를 계속 인터뷰하면서 범인을 찾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모든 배역에는 나름의 여러움이 있겠습니다.
이번에는 다중인격을 계속 상대해야 합니다. 앞에 있는 사람은 한 명인데 설정된 인격체는 많으니까 (지금 연기하는) 얘가 누구지, 이런 걸 익혀야 하죠. 그걸 연습하는 게 조금 어려운데 재미있습니다.
이미 <더 글로리>에서는 벗어난 일상을 살고 있군요.
많이 벗어나서 잊고 있죠.
그래도 인기는 느끼십니까?
제 생활 반경이 좁아요. 계속 연습실, 공연장만 오가서 잘 몰랐거든요. 그런데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뒤 밥을 먹거나 편안하게 걷던 길에서 알아봐주시는 분들이 생겼습니다. ‘이게 인기라고 해야 하나’보다는 그냥 ‘많이 알아봐주시는구나’ 합니다. 제가 안 겪어본 일이라서요.
기분이 어떠세요?
좋아해주셔서 감사하죠. 제 주변 사람들이 뿌듯해해서 기분이 좋습니다. 지인이 전화로 “누가 네 사인을 부탁한다” 같은 말을 해요. 그렇게 지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저를 자랑할 수 있다는 게 무척 좋았어요. 연극 공연도, 전에는 연극을 잘 보지 않던 분들께서 공연을 보러 와주셔서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연극인들은 연극 무대에 대한 애착이 큰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연극을 놓지 않을 건가요?
놓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적어도 1년에 한두 작품은 꼭 하고 싶어요. 지금 신구 선생님과 이순재 선생님도 계시잖아요. 계속 그렇게 하고 싶어요.
연극보다 월등히 큰 규모의 작품 제안이 와도 연극을 계속할 건가요?
할 것 같아요. <더 글로리>가 잘되어서 대중에게 더 알려졌기 때문에 제가 하지 못했던 더 좋은 연극 제안이 들어와요. 스케줄상 못해서 아쉬운 것도 있고요. 연극은 제가 너무 좋아할 뿐 아니라 아주 큰 공부가 되기도 해요. 드라마 연기도 공부지만 저는 연극계 사람이라 계속 이쪽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젊은 친구들의 호흡이나 연출은 기존과 다르기도 해서, 그것도 공부가 됩니다.
연극 연기와 카메라 앞에서의 연기가 기술적으로 다른가요?
예전의 연극배우는 온몸으로 에너지를 다 보여주듯 연기했어요. 요즘은 연기와 현실 사이의 괴리감이 많이 줄어들었죠. 조금 더 현실에 가깝게 연기합니다. 매체 앞에서의 연기는 카메라 앵글이나 동선 등의 변수는 있지만 저는 둘을 뚜렷하게 구분하지는 않아요. 다만 연극에서는 행동으로 표현할 것들이, 드라마에선 얼굴 표정이나 감정에 집중한다는 차이는 있습니다.
배우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습니까?
누나의 권유였어요. 대학 진학을 앞두고, 공부를 해서 가는 대학이 아니라 다른 대학을 찾았습니다. 연기를 배워서 대학을 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연기 연습을 열심히 했습니다. 대학교에서 연극 동아리를 하면서 배우를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우 일은 멋지지만 생활을 꾸려나가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만 힘들면 ‘나 왜 이렇게 힘들지’라고 생각할 텐데 주변이 다 힘드니까 ‘이 정도면’이라고 하면서 버텼던 것 같습니다. 같이 시작했던 친구나 동생들, 형들이 힘들어서 중간에 그만두기도 했죠. 열 명 중 한두 명 남아 있을까요. 그런데 ‘이것 말고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봤을 때 못할 것 같았습니다. 배우 중에는 회사에 취직했다가 돌아오시는 분들도 있고, 배우 일을 놓지 못해 자리 잡은 후 또 오시는 분들도 있어요. 저는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일 말고 다른 걸 할 수 있을까’ 싶어서 버텼습니다.
배우 정성일은 좋아하는 일을 위해 버텼고, <더 글로리>의 문동은은 복수를 위해 인생을 걸었습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 에너지 자체가 삶을 다른 곳으로 갖다놓기도 합니다. 배우 정성일을 여기까지 오게 한 동력은 무엇인가요?
가족인 것 같아요. 누나와 엄마는 내가 뭔가를 하는 걸 계속 응원해주고 기다려주었어요.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뭔가를 꼭 갚아주고 싶다. 이런 생각이 컸어요. 가족과 함께할 먼 미래를 생각했을 때 내가 빨리 자리 잡을 수 있는 방법은 해왔던 일을 계속하는 것, 내가 잘하는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일을 하는 데 큰 원동력은 가족이었어요.
단순히 연기가 좋아서만은 아니었군요.
좋아서 하는 게 가장 컸죠. 가정을 꾸리고 아기가 생겼을 때 ‘그만둬야 하나’ 싶기도 했습니다. ‘나만 좋자고 이 일을 하는 게 맞나. 가족을 먹여 살리려면 돈을 벌어야 하는데’ 같은 고민도 했죠.
그때 밀고 나간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제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도 경제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방법이 연기뿐이었어요. 그때도 조금씩 나아가고 있을 무렵이라, 더 노력하면 먹고살겠지, 이런 희망이 있었죠.
인스타그램 프로필에 적어둔 ‘신은 실수를 만들지 않는다’는 말처럼요.
아, 그건 비와이의 노래 가사예요. 제가 <쇼미더머니>를 엄청 좋아하는데요, ‘자화상’이란 노래에 그 가사가 있어요. 그 문구가 확 와닿았어요. 그때 저는 뭐든 자꾸 이유를 찾았거든요. 왜 이건 안 될까, 그런 생각을 하다 저 문구를 보고 깨달았습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구나. 내 좌절 또한 신이 주신 거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해준 글귀였습니다.
비와이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쇼미더머니>를 너무너무 좋아해요. 하나도 빠짐없이 다 봤어요. <스트릿 우먼 파이터> <스트릿 맨 파이터> <팬텀싱어> <슈퍼밴드> 그런 프로그램도 다 봤어요. 음악도 춤도 좋아해서요. 노래를 잘하는 분들, 무대에서 잘하는 분들이 어디서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신기합니다.
저는 그런 경연 프로그램을 보다가 불안할 때도 있어요. 자기 걸 열심히 준비했는데 보잘것없을 수도 있고, 좋았는데 대중성이 떨어지거나 운이 없어서 프로그램에서 탈락할 것 같을 때도 있잖아요. 저는 그런 사연에 아주 감정이입하게 됩니다.
그런 것도 있죠. 보면서 ‘저 사람 진짜 잘될 것 같아. 나는 너무 좋은데 사람들은 알아주질 않네’ 싶을 때도 있고요.
배우 역시 남들 앞에서 평가를 받아야 하는 일이죠.
무대에 서기 전에는 진짜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그런데 공연이 시작되고 집중하다 보면 떨리지 않습니다. 공연 때마다 느끼는 그 떨림을 좋아해요. 연습한 결실이 나오고 매번 바뀌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 긴장감을 좋아하며 무대를 계속합니다.
이런 질문 별로 안 좋아합니다만, 그러면 흔히 말하는 mbti의 i입니까?
E라고는 합니다만 못 외웠습니다. 몇 번을 들어도 안 외워지네요.(웃음)
<비밀의 숲>에서의 ‘나이스한 나쁜 사람’ 이미지를 보고 김은숙 작가께서 섭외를 결정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알려졌습니다. 이번에 연기하면서 중점을 둔 건 무엇이었나요?
‘나이스한 개새끼’라는 워딩 자체였어요. 그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다행히 감독님도 말씀을 많이 해주셨고, 대본에 작가님도 명확하게 써놓으셨어요. 예를 들어 비서에게 비 오는 날 와인을 건네는 장면이 ‘나이스하지만 나쁜 새끼’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악의는 없지만 누군가 봤을 때 나빴다 싶을 수도 있고, 누군가가 봤을 때는 ‘나이스한데 뭐 어때서’가 될 수도 있어요. 하도영은 그런 양면성이 있는 캐릭터입니다.
하도영 연기를 준비하면서 감독에게 ‘이 삶은 내가 모르는 삶이다’라고 솔직하게 말하셨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부끄럽게 산 것도 아니고 환경이 그랬으니까요. 어른이 된 뒤에는 그렇게 커온 걸 굳이 이야기하지 않기도 했고요. 감독님께 말씀드린 건, 내가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해야 답을 받거나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저는 괜히 아는 척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해요.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죠.
내가 모르는 하도영의 태도는 어떻게 배웠습니까?
저는 연진에게 무릎 꿇고 신발을 신겨준다든가 사람을 대할 때의 태도는 잘 몰라요. 그래서 준재벌 등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 자료를 많이 찾아봤어요. 어릴 때부터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들의 자료를 많이 찾았어요.
배우의 일이 100% 상상만은 아니군요.
상상은 상상일 뿐이에요. 직접 눈으로 보고, 겪은 게 아니면 사진이라도 찾아봐서 그게 무엇인지 내 머릿속에 담아놓아야 거기 있는 나를 상상할 수 있어요. 자료를 많이 찾아보죠. 찾을 수 있는 자료는 다 찾아봐요. 밑천이 있어야 장사를 하듯이.
준재벌 관련 자료는 찾기 쉬웠습니까?
한국의 준재벌에 대한 자료는 단편적인 게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도영의 태도는 외국 드라마의 귀족을 참고하기도 했어요. 사람을 대할 때 어떻게 하는가, 이런 것에 대한 모티브를 그곳에서 찾았습니다.
그렇게 자료로 찾은 멋진 남자, 다 가진 남자는 어떤 점이 다르던가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나는 굳이 내세우지 않아도, 어릴 때부터 내 주변 환경을 알고 있다’는 느낌. 그래서 상대방을 대할 때 티를 내지 않아도 자기 자신이 묻어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자신을 명확히 알고 믿으면 굳이 내세우거나 표현하지 않아도 남이 봤을 때는 뭔가 느껴지죠.
정성일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습니까?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저는 활발하고 재미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일을 할 때는 피곤할 정도로 진지하기도 하지만, 외적인 면에서는 유쾌합니다. 사람을 좋아하고요.
<더 글로리>의 문동은처럼 사람 때문에 상처받기도 하는데도요?
저는 다행히 어릴 때부터 눈치를 보면서 살아와서 그런지 사람 보는 촉이 좋아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 것 같다’는 느낌이 대충 맞아요. 이 사람은 있는 척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 이 사람은 말이 앞서는 사람, 아니면 말은 이렇게 해도 속은 따뜻한 사람 정말 많은 사람들을 보다 보니 그런 걸 빨리 눈치채게 됐어요.
사람 이야기를 하니 SNS에 올린 고등학교 은사님 포스팅이 생각납니다.
저는 공고를 나왔어요. 공고도 공고 나름입니다만 공부를 많이 하지 않는 공고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생님들은 대부분 그 분위기에 지치곤 했어요. 그런데 이 선생님은 정말 지치지 않고 누구 한 사람 도태되지 않게 다 챙겨주셨어요. 저는 가정환경이 조금 그렇다 보니 신경을 더 많이 써주셨고요. 그분은 제게 너무 큰 은인이에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매번 연락드리고, 대구 가면 찾아 뵙습니다. 아이들을 정말 사랑하고 챙겨주신 올바른 선생님이었어요. 서성희 선생님께서 저를 헌신적으로 지도해주셨습니다.
그 시기를 지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배우 정성일의 꿈은 이루어졌습니까?
아직 이루고 싶은 것들은 많죠. 상도 받고 싶을 거고, 경제적으로 더 나아졌으면 싶기도 할 거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싶을 거고. 그 꿈을 아직 다 이룬 것 같지는 않아요.
배우 정성일의 긴 커리어에서 <더 글로리>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저에게는 배우로서 가장 큰 영광이에요. 저는 지금까지 좋은 작품을 많이 해왔어요.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그중에서도 <더 글로리>는 제가 좀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어서 영광인 작품입니다.
더 큰 영광이 많이 있을 거예요. 앞으로 이루고 싶은 정성일의 ‘더 글로리’는 어떤 걸까요?
멋진 배우, 진짜 연기 잘하는 배우, 그런 말을 듣는 게 배우에게 제일 큰 영광이겠죠. 배우에게는 그 한마디보다 큰 영광이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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