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배우가 아니라서 부끄럽지만 바보 같은 질문을 하게 되는데요, 연기는 기본적으로 많은 대사를 다 외우잖아요. 연기를 하고 나면 대사를 다 까먹습니까?
싹 까먹죠.
기억나는 대사가 하나도 없나요? 최근 끝난 <슈룹> 대사도요?
노력하면 기억은 날 수 있죠. ‘이 대사는 너무 좋았어’ 싶어서 기억하려 해도 지문까지 그대로 외우지는 못해요. 상징적인 대사 등은 기억해내긴 해요. 저는 돌아서면 잊어버려요. 바로 지워버립니다. 자꾸 비워내야 또 채울 수 있어요.
저도 나름 원고를 만들어오며 살았습니다. 제가 만든 문장들이 있겠죠. 가끔 어떤 구절이 좋았다고 해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감동합니다. 말로 설명 못할 기분이에요. 내 일을 했을 뿐인데, 누가 이걸 기억해주고 자기 삶의 어느 순간 이 글을 보며 힘을 냈다고 하면요.
우리 일이 그런 것 같아요. 그런 걸 알아줄 때 저도 ‘남에게 나쁘지 않은 일을 하고 있구나’ 싶어요. 그게 가장 중요한 가치 같고요. 우리가 하는 ‘예(藝)’의 직업은 내가 좋아서 하는 것도 있지만 그걸 통해 사람들에게 희로애락을 전달한다는 사실도 중요해요. 그게 큰 힘이 되고요. 저도 작품을 하다 좋은 말이나 힘이 되는 칭찬 댓글을 보면 딱 캡처해놔요. 힘이 되니까요. ‘내 연기, 내 작품을 이렇게 봐주시는 분이 단 한 명이라도 있구나’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죠.
나를 좋아해주는 구체적인 한 명이 고플 때가 있죠.
우리의 결과물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주면 좋지만, 소수를 위해 뭔가를 행할 수 있는 것도 맞아요. 1백 명이 봤는데 99명이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도 단 한 명이 좋아해줄 수 있다면 그것도 굉장히 의미 있다고 봐요.
처음부터 이렇게 자리 잡을 거란 자신이 있었습니까?
전혀요. 보이지 않는 안개 낀 터널 안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습니다.
오래 하셨으니 잘 아시겠지만, 배우 직군은 모 아니면도 같은 면이 있다고 봅니다. 생활 면에서 어찌될지 알 수 없고요. 그에 대한 불안은 없었나요?
저도 그런 게 가장 큰 걸림돌이자 고민이었어요. 그건 당연히 할 수밖에 없는 고민이고 두려움이나 갈등도 계속 있죠. 주변에서도 만류하고. 저는 단순하게 결정했고, 선택을 하기까지 10년쯤 걸린 것 같아요. 모험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덜컥 도전에 응했고, 방향을 혼자 찾고 고민하다 뜻밖에 좋은 운이 왔다고 봐요.
결심은 내 선택이어도 배역은 내 선택이 아니죠. 배우 일 자체가 선택받는 일이기도 하고요. 좋은 선택을 많이 받아 훌륭한 커리어를 쌓으신 인생 선배 뵙는 마음으로 여쭙고 싶습니다. 좋은 선택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좋은 선택을 받는 방법이 있다면 저도 알고 싶네요. 살다 보니 근본적인 답은 늘 단순한 것 같아요.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으면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죠. 좋은 선택을 받는 방법론의 문제가 아닌 것 같고요. 살다 보면 ‘운이 좋아서’ 같은 말을 하잖아요.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일어나는 일들이 있죠.
우리는 자신을 위해 애를 쓰죠. 저 역시 젊은 날 고군분투하고 버티고 노력하며 저를 위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닌 남을 위해 우리의 몸과 힘을 쓰기도 하죠. 그런 조화를 잘 이루며 살면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자신을 위해 애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타인과 타자에 대해서도 내가 가진 걸 기꺼이 조건과 이유 없이 내주는 것, 그게 큰 힘이 된다는 것, 이런 사실을 믿어요.
그런 걸 언제쯤 깨달았나요?
40 정도 넘어가면서부터? 나이에 따라 달라져요. 20대 때는 겁나고 고민이 컸어요. 30대에는 배우라는 길을 택한 입장에서 굉장히 애썼어요. 더 잘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면서, 어떻게 보면 이기적일 정도로 나 자신에게 시간을 할애하고.
제가 지금 그 시기 같습니다. 저도 일을 하고, 더 좋은 기회와 성과를 만들고 싶다 보니 말씀하신 것처럼 이기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요. 저 자신에게만 집중하고요.
그 시간이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다음 시간의 바탕이 되는 건 변함없으니, 어떤 마음으로 한 시절을 보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저는 나말고 가족에게 시간을 써야 합니다. 내 힘과 에너지는 한계가 있을 테니 잘 배분해서 써야 하고, 그러다 보면 힘들거나 버거울 때도 있죠. 그게 지금 제가 잘 보내야 하는 시간이겠죠.
배우 일 하고 가족과 함께하다 보면 내 취미에 쓸 시간은 없겠네요.
거의 없어요. 그래서 오늘도 화보 촬영하며 기분이 좋은게, 저 옷 되게 좋아했거든요. 패션에 관심도 많았고, 가끔 시간이 날 때 제 자신에게 좋은 옷을 선물하기도 하고. 그거 말고는 취미가 없었어요. 운동도 연기를 위해 체력을 키우려고 한 거지 재미있고 즐거워서 한 게 아니었어요. 포커스는 연기에만 두었죠.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에만 집중했어요.
프로 배우도 여전히 연기 교습을 받거나 선생님께 배웁니까?
그런 분들도 계실 겁니다. 배우는 대본과 작품이 주어지면 어떤 방법으로든 연습을 계속하죠. 훈련의 대상이 있든 자기만의 방법이 있든, 일상에서도 연습하려 애를 쓰고요.
최근 끝난 <슈룹>에서의 배역은 옛날 왕이었어요. 이런 배역은 무엇을 참고합니까?
<슈룹>은 가상의 이야기를 전제로 한 작품이어서 특별한 걸 참고하지는 않았어요. 대신 현장 가서 분장을 하고 옷을 입고 최대한 그 역할을 가까이 느끼려 했습니다. 사극 촬영은 진짜 깊은 산속도 가고 고궁도 가요. 땅도 많이 밟아보고 앉은 의자도 만져보았습니다. 오감으로 느끼려 순간순간에 집중했죠.
매번 작품에 최선을 다해도 매번 다른 교훈을 얻을 것 같아요.
결과가 좋았고 반응이 좋았으니 함께한 모든 사람들이 더 기쁘고 행복할 수 있었어요. 그 감정을 공유해서 특별하고 애틋한 마음이 있었고요. 모든 작품 현장에서 촬영에 임한다는 건 잘되기 위해 애를 쓰는 일입니다. 그런 한마음으로 움직이니 그 순간에는 힘들어도 즐겁고, 괴롭지만 기쁘기도 하고, 많은 감정이 교차합니다. 거기서 동료 의식이 생기고 촬영 현장의 매력이 생기고요. <슈룹>은 배우, 스태프, 감독님 모든 사람들이 작품을 사랑하고 애쓴다는 게 느껴져서 좋았어요. 힘들어도 잘해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임했으니까요. 그걸 리드하는 좋은 선배님이 계시고, 즐거운 분위기에서 할 수 있어서 남달랐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그렇지 않은 분위기일 때도 있죠.
그럼요. 다 사람이 하는 일이고 어떤 목표를 위해 모였다가 헤어지는 일이니 마찰도 생기죠. 예상치 못한 변수로 마음을 다치기도 하고 오해도 생기고요. 그래서 우리 모두 안전하게 무탈하게 작업하는 게 무척 중요해요. 저는 늘 작업을 무사히 마치길 염원합니다.
이제는 고를 작품이 많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데요, 작품 선택 기준이 있나요?
제 작품 선택 기준은 책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출발은 시나리오예요. 시나리오가 재미있다는 건 주관이지만, 그 안에서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움직여서 울림을 준다면 ‘이 작품 재미있는데’ 싶고, 그러고 나서 내 역할을 봅니다. 한 번 더 보는데 끌림이 있고, 물리적인 여건이 맞으면 합니다.
주연, 조연, 개런티, 이런 것만 중요한 건 아닌가요?
그건 1순위가 될 수도 없고 2순위도 아닐 거예요. 거의 마지막 순위 정도? 저는 유명해져서 멋있게 살고 싶어서 배우가 된 게 아니에요. 좋은 작품을 보고 감명받고, 그 작품을 보며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 영화 안에 내 모습이 남아서, 누군가 그 모습을 보고 나처럼 영감과 감동을 받는다면 근사하겠다.’ 이렇게 단순하고 치기 어린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만 이게 제 핵심이에요.
저의 편견 속 배우는 ‘나는 무조건 잘될 거야’ ‘나는 연기 왕이야’ 이렇게 사는 사람들인가 싶기도 했어요. 제가 보기엔 다 큰 무대에 오른 분들이라서요.
배우들이 갖는 정서적인 마인드는 다양하죠. 저는 이래요. 우리의 일도 일일 뿐이고, 우리의 일은 카메라가 켜지거나 무대 위에 서는 순간 일어나는 일이지, 그 외에 우리는 결코 특별하지 않다. 일상에서 특별하다는 의식에 사로잡힐 이유도 없다. 대신 카메라 앞에서 연기할 때는 배우가 왕이다. 무조건. 어느 누가 와도 나를 건드릴 수 없다. 그 마음으로 연기해야 해요. 그 외에 저는 지극히 평범하죠. 내 앞의 일상을 똑같이 걱정하고. ‘내일 날씨 추운데’ 고민하고.
저는 성공하신 분들을 보면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것 같은데 어디서 또 동기를 얻는지 궁금합니다. 어디서 동기를 얻으세요?
근원적인 동기부여는 있어요. 잘하고 싶어요. ‘내가 잘해서 우승해야지’ 같은 게 아니라 사람들의 일에서는 뭐든 최선을 다해서 잘하고 싶잖아요. 그런 것처럼 하나하나 무엇이 올지 모르지만 그걸 잘해내고 싶은 거죠. 그 마음이 이어져 에너지가 되는 게 근원적인 동기 같네요. 현실적으로는 소중한 가족이 있으니 그에 대한 책임과 동기부여도 분명 생기죠. 그리고 결코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준비하는 다음 작품은 있나요?
지금은 구체적으로는 없어요. 다행히 2022년 한 해를 잘 마무리했으니 남은 연말은 잘 쉬며 새해를 맞이하려 합니다.
가족과 함께 좋은 시간 보내고요.
가족과 보내는 게 말로는 행복인데 붙어 있으면 막 북적북적하고 정신없죠. 순간순간 함께하는 모습을 떨어져서 영화처럼 보면, 가족이 지내는 모습이 행복임을 알 수 있죠. 막상 그 안에 있는 나는 죽겠다고 하잖아요. 그것도 맞아요. 다만 그게 행복인 거예요.
그 미장센이 행복인 거죠.
시점의 차이죠. 내가 1인 주인공 시점에 있는 것과 3인 관찰차 시점.
수영 님과 출연하신 유튜브에서 “일을 가리지 않고 순서대로 어떤 배역이든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하는 입장에서 아주 와닿았어요. 여전히 그런가요?
그건 변하지 않는 마음이에요. (일은) 저에게 주는 선물 같은 시간이고 제가 행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한 권리예요. 제가 택할 수도, 그렇다고 무언가 제가 계획해서 이룰 수도 없어요. 살다 보니 내가 행할 수 있는 제안이 오고, 그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건 너무 기쁜 일이에요. 내 삶에 들어온 일들을 당연히 감사하게 순리대로 받아들이려 노력합니다.
그러면서 생활인이니 아이들을 어린이집도 데려다줘야 하고요.
이제 집에 들어가면 자기 전에 애들 목욕시켜야죠. 하교길에 픽업도 해야 합니다. 밤에 대본을 보려 해도 아이스크림 사달라면 나가야죠.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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