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트하우스> 이후 어떻게 지냈어요?
1년이 조금 지났네요. 신기하게도 곧바로 <구미호뎐1938> 제작에 들어갔어요. 긴장하는 마음으로 지내느라 온전한 휴식은 못 누렸네요.
<구미호뎐1938>은 판타지 무협 액션물인데요. 장르물은 처음 아닌가요?
처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 <체인지>가 있었어요. 결이 조금 다르죠. 다시 판타지물에 출연할 줄 몰랐는데, <펜트하우스>가 준 선물인 것 같아요. 그리고 제 캐릭터 이름이 류홍주예요. 너무 예뻐요.
<구미호뎐1938> 출연을 결심한 계기가 있었을 것 같아요. 어떤 점에 끌렸나요?
판타지물을 좋아하는데요. 출연할 기회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한편으로는 케이트 블란쳇처럼 여러 종류의 장르를 소화하는 게 너무 멋있고, 동경하는 점이기도 했어요. 그런 터라 판타지물에 출연한다는 게 좋아서 선택했어요. 그리고 캐릭터가 매력적이에요. 장르에 상관없이 ‘츤데레’ 역할을 해보고 싶었어요. 류홍주가 걸크러시지만 츤데레 느낌이 있어요. 그런 점에 많이 끌렸어요.
천서진 캐릭터는 차갑고 악독하며 때로는 웃기고 슬프기도 했어요. 한 캐릭터의 다양한 모습을 연기한 게 연기 영역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너무 큰 도움이었어요. 그러면서 숙제가 생겼죠. 천서진과는 결이 완전히 다른 느낌을 표현해야 하는 숙제요. 감사하게도 분장팀이 천서진과 비슷한 점이 있는지 모니터링해주었어요. 천서진과 같이 화려하지만 완전히 다른 결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어요.
<아레나>와의 2020년 12월호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말했어요. 새로운 인상을 보여주기 위해 안 쓰던 얼굴 근육을 사용했다고요. 안 쓰던 얼굴 근육을 시즌 3까지 사용하면 습관이 되지 않나요?
천서진의 표정을 빌려 쓴 것도 있어요. 빌려 쓸 때는 다르게 표현했어요. 천서진 얼굴에는 사람을 얕잡아보는 느낌과 비열함이 있다면 류홍주에게는 그런 부분이 없어요. 천진난만하고 당당하고 어쩔 때는 해맑아요. 그래서 다른 느낌이 나게 노력했는데, 지금도 너무 어려워요.
인스타그램을 보니 액션 스쿨을 다닌 것 같아요. 액션신도 있나요?
액션스쿨은 촬영 한 달 반 전부터 다녔어요. 제가 엄청나게 큰 칼을 휘두르는 캐릭터예요. 남자들을 다 이길 정도로 힘이 세다는 게 매력 있죠.
요즘 촬영용 칼은 소품이라도 무겁던데요.
도저히 칼을 들 수도 없더라고요. 감독님께서 배려 왕이에요. 가벼운 걸 준비해주셨는데도 너무 무거워서 제가 한 번 만들어보겠다고, 사비로 소품 칼을 제작했어요. 그런데 제가 만든 소품 칼이 두 번째 촬영에 부서졌어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아주 재밌게 잘 찍었어요.
천서진으로 연기 대상을 수상했고, 류홍주 캐릭터를 만났어요. 천서진으로 커리어 전환점을 맞이한 이후 배우 김소연에게 기대하는 것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어떤가요? 부담되나요?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제 신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구미호뎐1938>을 만난 게 큰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대상을 받고 정말 많이 울었어요.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집에 갔는데, 오빠 눈도 부어 있더라고요. 제가 그날 하루 종일 못 먹어서, 오빠가 LA갈비와 무채를 만들어놨어요. 새벽에 둘이 식탁에 마주 앉아 밥 먹으면서 오빠에게 나 대상 받았다고 다시 얘기했죠. 오빠는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라고 말했어요.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었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라고요. <펜트하우스>로 상을 받았고, 지금 저는 다른 작품을 하고 있어요. 28년 연기 활동에 많은 굴곡이 있었고, 이제는 나이도 있어서 들뜨지 않아요. 감사할 뿐이죠. 또 다른 작품으로 이겨내야 한다, 헤쳐나갈 게 많아요. 제가 조금이라도 어렸거나 굴곡을 덜 겪었다면 수상에 들떠 있었을 텐데, 지금은 아무리 좋았던 순간이라도 나만 기억하지 남들은 그렇게 기억하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대상 받은 것도 지금 인터뷰를 하니까 생각나네요. 담담해지는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는 상을 타는 게 목표가 될 수 있어요. 전문가와 대중에게 인정받았다는 뜻이니까요. 배우 김소연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목표 생각 안 한 지 몇 년 됐어요. 서른 중반쯤 하고 싶은 작품이 있었어요. 누구나 탐내는 역할이었는데, 결국 다른 분에게 갔어요. 그런 경험이 꽤 있어요. 그러다 보니 치열하게 싸울 게 아니라 혹시라도 나를 찾는 곳이 있다면 그것에 만족하며 연기 생활하기로 했어요. 목표를 높게 갖지 말고, 안주하는 삶에도 감사함을 느끼면서 살아보자고요.
지금은 목표를 세우기 더 애매하겠군요.
어렸을 때는 시상식에 못 갈 때가 많았어요. 작품이 안됐을 때도 많았고, 시상식 가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어요. 그래서인지 지금도 목표를 세우려 하지 않는 것 같아요. <구미호뎐1938>이 저에게 온 것이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제 나이에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좋아요.
연기하면서 행복할 때는 언제예요?
신기하게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현장이 어려워요. 아직도 사람들과 편하게 교류하지를 못해요. 첫 촬영 갈 때는 두렵기도 해요. 대본 연습할 때는 우황청심환 먹고 가요. 이럼에도 쉴 때는 빨리 작품 하고 싶다는 마음이에요. 그래서 연기를 제가 왜 좋아하는지 신기해요. 어렸을 때는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게 잘됐을 때 만족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이 고통스러운 작업을 왜 놓지 못하는지 생각해요.
연기가 이렇게 중독성 강한 일인가요?
연기는 진짜 중독적이에요. 근데 저는 다른 일에는 큰 관심이 없어요. 취미 생활도 특별할 게 없고요. 연기를 하면 제 인상도 변해요. 오그라드는 표현이지만 연기는 사랑한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인데, 그것만 생각해요. 이건 무슨 마음일까요?
연기가 그만큼 재밌다는 뜻일까요?
아니요. 너무 고통스러워요. 제 안에 갈망이 있는 것 같아요. 표현하고 싶어 하는 꿈틀거리는, 뭔지 모를 갈망이 있어요.
연기는 참 어렵네요.
그러니까요. 어렸을 때는 단순했던 것 같아요.
옛 생각하면 후회되는 지점이 있어요?
왜 20대 때는 연기를 더 진지하고 소중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지금은 한 컷 한 컷이 아까워 죽겠는 마음이에요. 젊어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았을 때 좀 더 열심히 하지 못한 게 아쉽지요.
저는 당신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세대예요. 유년기 추억을 들추면 김소연 배우가 어렴풋이 남아 있어요. 이런 거죠. 부모님이 야근하던 시절에 누나 형과 함께 밤늦도록 방바닥에 누워 TV를 보던 풍경을 떠올리면 TV에선 <이브의 모든 것>이 나오고 있었어요. 명절에 방에서 영화 <체인지> 주제곡을 부르던 사촌누나 뒷모습도 생각나고요. 그러고 보면 1990년대와 2000년대 김소연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 배우예요. 적어도 1980년대생에게는 유년 시절 풍경의 일부로 남아 있어요.
기분이 몽글몽글하네요. 상우 오빠도 고등학교 때 극장에서 본 <체인지>의 배우가 지금 와이프가 되어서 친구들이 다 신기해한다고 해요. 그러고 보면 진짜 오래 일했네요. 저는 중고등학교 때 모습도, 수능시험 보러 가는 모습도 모두 방송에 보였어요. 대학 졸업하는 모습도, 힘듦을 겪다가 다시 일어나고, 심지어 결혼하는 모습까지 대중에게 보여줬어요. 그런 배우들이 많은데 제가 특별하다고 얘기하는 건 좀 쑥스럽네요.
옛날에도 김소연은 멜로의 여주인공이었는데, 지금도 멜로에서 여주인공을 연기해요.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도 신기합니다.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28년째 비슷한 나이대를 연기하는 건 정말 감사하죠. 연기 시작한 게 엊그제 같아요.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난 거죠? <펜트하우스> 촬영 때만 해도 현장에 신은경 언니가 계셔서 체감하지 못했는데, <구미호뎐1938> 현장에 가니까 전부 다 저보다 어린 거예요. 심지어 감독님이 동기예요. 이동욱 씨도 현장에서 자기보다 연륜 있는 사람 만나는 거 흔치 않다고 하더라고요.
지난 인터뷰에서 천서진은 도전하고 싶은 캐릭터라고 말했어요. 기억나세요? 무엇이 도전하게 만드나요?
연기는 저에게 잡히지 않는 무언가예요. 잡히지 않아서 해내고 싶은 승부욕이 생겨요. 다양하게 분장하는 게 너무 좋아요. 고민하고 연구하고 밤낮으로 치열하게 생각하다가 거울 보면 그 캐릭터가 된 제 얼굴이 보여요. 그럴 때 기뻐요. 요즘 제 사진을 보면 예전과 다른 느낌이 들어요. 주위에서도 제 얼굴이 달라진 것 같다고 얘기해주고요. 그럴 때 얻는 쾌감이 있어요.
연기 외에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요?
상우 오빠 얘기를 하게 되네요. 오빠를 만나기 전에는 연기하는 기간에 아무도 안 만났어요. 만나도 한두 번 보는 게 전부였죠. 그래서 제 생활이 부족했어요. 근데 오빠는 “소연아, 너의 생활도 중요하고 행복해야” 한다고 늘 얘기해줘요. 연기 활동과 일상을 함께 누리는 지금이 너무 행복해요. 또 아침에 둘이 30분 정도 드라이브 다닐 때가 있어요. 일찍 문 여는 커피숍 가서 커피 한 잔 사서 드라이브하는 거예요. 그 순간이 그렇게 좋아요. 정말 행복해서 제 삶도 더 중요하게 느껴져요. 아무 소란도 없는, 행복하고 무탈한 삶이요.
이상우 배우님에게도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말수가 적은 캐릭터로 유명한데, 집에서는 말을 많이 하나요?
청산유수예요. 말을 너무 잘해요. 오빠는 제가 본인 입을 트이게 만들었다고 해요. 또 말도 잘 들어줘요. 굉장히 선하고 좋은 말을 많이 해요. 교과서에 나오는 말 같은데 듣다 보니까 저도 좋은 생각이 들어요.
심형탁과 이상우 두 배우의 의리는 여전하고요?
네, 그들만의 예쁜 세상이 있어요. 특이하다는 표현이 저는 신기해요. 오빠는 특이하다기보다는 순수해요. 심형탁 오빠도 그런 것 같고요. 그들만의 예쁜 눈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부럽고 저도 세상을 그렇게 보았으면 싶어요.
이상우 배우님과 연기 얘기도 나누나요?
엄청 해요. <펜트하우스>를 오빠가 열심히 봐줬어요. 지금 오빠가 작품 하고 있는데, 서로 열심히 모니터링하고 얘기해줘요. 캐릭터 얘기도 하고,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도 나눠요. 어쩔 때는 연기에 대해 2시간씩 얘기할 때도 있어요. 연기 얘기를 할 수 있어서 저에게 큰 도움이 돼요.
싸울 때도 있나요?
상우 오빠는 부딪히려고 해도 딱히 싸움으로 이어지게 만들지 않아요. 제가 뭔가 앙칼지게 말해도 “그랬어?”라고 다정하게 저에게 공감해줘요. 그러면 제 기분이 풀려요. 이렇게 쉽게 풀릴 일인데, 그때는 내가 왜 예민하게 굴었을까? 이런 생각도 들어요. 오빠에게 많이 배웠어요.
이상우 배우님은 예능에서 레전드를 많이 남겼어요. <해피투게더>의 코끼리 지각 사연이 기억나네요.
오빠 주위에서 뭔가 재밌는 일이 생기는 것 같아요. 제가 봐도 무척 신기해요. 우리는 평생 가도 안 만날 일을 보았으니, 오빠는 복 받은 사람이에요.
40대를 지나고 있어요. 가치관도 라이프스타일도 서서히 달라질 것 같아요. 연기 외의 삶에서 이루고 싶은 것이 있을까요?
지금처럼 계속되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부모님 건강하시고, 오빠와 아침에 커피 마시며 드라이브하는 무탈한 삶이 계속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직 철이 안 들어서 그런지 안정적인 미래에 대한 생각보다는 매일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펜트하우스> 이후 촬영을 계속하셨지만 <구미호뎐1938>이 내년 방영이에요. 커리어에서 1년 정도 비는데,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도 있나요?
예전이었으면 그랬을 거예요. 코로나 이슈와 여러 사정이 겹쳐서 차기작 공개가 늦춰졌어요. 좋은 기회가 왔는데, 시간을 흘려보낸 게 아니냐고 하시는 분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별 생각 없이 일을 안 해서 좋았어요. 마침 상우 오빠도 쉬는 기간이라 둘이 함께 보내는 생활이 행복했거든요. 그런 여유 역시 <펜트하우스>가 준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치열함을 견뎌냈으니 마음 놓고 게을러지라는 선물이요.
지난 인터뷰에서 천서진 캐릭터를 어떻게 준비했는지 설명했었죠. 그때 하신 말씀 중에 “사람들은 진짜를 알아봐”라는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어요. 사람들은 진짜로 ‘진짜’를 알아보기 시작했으니까요. 배우님의 연기도, 역주행하는 어느 가수의 노래도 그렇고요.
신기해요. 연기도 진짜일 때 제일 쉬워요. 감정이든 뭐든 내가 진짜 마음으로 느껴서 말할 때 제일 쉬워요. 사람들이 진짜를 알아봐주리라 믿어요.
진짜를 알아봐주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괜찮아요. 그래도 알아봐주시는 분들이 이렇게 생겼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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