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결국 공으로 회귀한다. 둥근 축구공은 어디로든 굴러가고 누구나 굴릴 수 있다. 축구 얘기를 할 때면 우리는 잠시 괴로움을 잊는다. 축구팀에 대해 떠들다 보면 하락한 주식, 상승한 물가, 남의 집 살이, 취업난, 슬픔, 절망 언저리에 있는 문제들을 우리 삶에서 아주 잠깐 떼어놓을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축구를 이야기하게 된다. 누구나 ‘맨유’를 비난하고, 누구나 ‘나폴리’를 칭송할 수 있다. 축구는 계급이 없고, 경계가 없으며 모두에게 열려 있다. 2022 FIFA 카타르 월드컵을 앞두고 우리는 다시 축구를 생각한다. 우리가 축구를 얘기할 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대한민국에서 축구를 가장 사랑하는 축구 팬을 만나고, 축구를 시작해서 인생이 달라진 사람, 프로리그에서 선수로 활약하는 사람, 축구로 먹고사는 사람을 만났다. 그들 모두 축구를 사랑한다 말했다.
위대한 이야기는 좌절에서 시작된다. 최선을 다하지만 그래도 안 되는 것이 있다. 이기기 위해 몇 번의 공을 찼던가. 발톱이 빠지고 무릎에 상처가 나도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희생일 뿐이다. 내 희생으로 역전되지 않는 상황에서 찾아오는 감정은 무력감뿐이다. 필드에선 그렇다. 강팀을 상대로 공 한 번 건드려보려 쫓고 뛰지만 공에 발끝이 닿지도 않는다. 하지만 경기 시간은 남았고, 뛰는 것만이 약팀이 할 수 있는 전부다. 열망이 시키는 대로 몸을 내던지는 그 행위에 살아가는 의미가 있다는 듯 선수들은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달린다. SBS <골 때리는 그녀들>(이하 <골때녀>)의 FC 아나콘다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새벽에 EPL은 안 봐도 <골때녀>는 본다는 축구 팬이 심심치 않게 있다. 프로 축구 경기에서 못 본 절실함과 열정이 <골때녀>에서 느껴져서 찾아보게 된다고 한다. 축구공도 제대로 못 차던 선수들이 성장하는 모습과 기술은 어설프지만 최선을 다해 뛰는 모습, 포기하지 않는 자세는 감동을 자아냈다. 이것이 스포츠 정신이고, 스포츠가 가진 긍정적인 기능이다.
그리고 <골때녀>에서 시청자의 눈물을 가장 많이 자아낸 팀은 언더도그 ‘FC 아나콘다’였다. ‘FC 아나콘다’는 스포츠 아나운서들이 대거 포진했다. 스포츠에 대해 박식하지만 ‘국대’ 출신이나 풋볼팀에서 ‘현역’으로 뛰는 선수, 축구 ‘경력자’, 운동신경이 뛰어난 ‘선수’를 보유한 팀은 아니다. 필드에서의 실력만 보면 ‘평범’하다. 우리는 늘 어디선가는 ‘평범’하다. 평범하다고 열정이 없다는 것은 아니며, 뛰어나지 않다고 노력을 게을리하는 건 아니다.
윤태진은 ‘FC 아나콘다’의 미드필더다. 중원을 책임지며 여린 몸으로 육탄 방어를 하고, 전방에 날카로운 패스를 찔러주며, 과감한 슛으로 팀 분위기를 바꾸는 다재다능한 선수다. 팀 내 최다 출장과 최다 득점, 최다 도움, 최다 공격 포인트를 기록한 명실공히 ‘에이스’다. 윤태진의 인생은 축구를 시작하며 ‘조금’ 변했다. 2011년 ‘KBS N SPORTS’의 아나운서로 시작해 오랜 시간 방송일을 해온 그녀에게 일은 ‘혼자’ 하는 것이었다. 나의 발전을 위해 공부하고 노력해온 그녀에게 팀원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생소했다. 축구를 시작하며 팀원들과 함께 패스를 이어가고, 골을 넣고 궁극적으로 승리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다 보니 끈끈한 동료애를 느꼈다고 한다.
“동료를 위해 뛰는 것이 제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성취감이 커요. 축구를 하면서 기쁨은 함께하면 배가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체험했죠. 다 함께 땀 흘리고 노력한 끝에 조그마한 성과라도 얻으면 진짜 엄청난 희열이 느껴져요.” 윤태진은 축구를 접하고 방송인으로서의 성과만 얻은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골때녀>의 축구 선수 윤태진에게 가장 인상적인 경기를 물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며 우리는 매 경기 간절한 사람들이라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하나만 꼽을 수 없다며, 경기마다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고 했다. 시청자가 기억하는 순간은 첫 골이 터졌을 때일 것이다. 연속된 패배와 긴 침묵은 ‘FC 아나콘다’를 최약체로 몰아갔다. 그러나 선수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제가 코너킥으로 아영이에게 패스를 했고, 아영이가 공을 받아서 골을 넣었어요. 저는 항상 골을 넣어야 된다, 기회를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때까지는 의심도 있었어요. 정말 우리가 골을 넣을 수 있을까? 잘하고 싶은데 진짜 될까? 상대 팀들은 우리보다 더 잘하는데 이길 수 있을까? 마음속에선 갈등이 있었죠. 그래서 첫 골이 터졌을 때 신기했어요.” 전기 맞은 것처럼 짜릿했던 순간은 ‘FC 액셔니스타’와의 경기였다. 리그 최약체와 최강팀의 경기였다. 그때 윤태진은 첫 선제골을 기록했다. “세트피스에서 은영 언니의 패스를 받아 제가 골을 넣었어요. 항상 끌려다니는 경기만 하다가 선제골을 넣으니 너무 행복한 거 있죠. 감전된 것처럼 짜릿했어요.” 윤태진은 골을 넣었을 때의 희열을 다시 느끼고 싶다고 했다.
윤태진이 축구에 매료된 것은 짜릿함과 절실함 그리고 동료애 때문이었다. 원체 승부욕이 강한 편이기도 하지만 연습한 패스를 실전에서 성공했을 때의 짜릿함은 계속 축구를 하게 되는 요인이다. 또 팀원들과 함께 힘든 시간을 겪으며 끈끈해진 관계, 공동의 목표가 생긴 것도 축구를 좋아하게 된 이유다. 방송에서 그녀가 부상 입는 장면이 ‘몇 번’ 나왔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몸 아프면 약 먹으면 되고, 발톱은 빠지면 다시 자라잖아요. 무용을 해서 몸 다치는 건 두렵지 않아요. 저의 약한 부분을 발견한 거고, 훈련으로 극복하면 되니까요.”
윤태진은 축구를 시작하고 매일 연습했다. 스케줄이 없을 때는 축구센터에 나가는 게 일상이었다. 하루 반나절을 연습장에서 보냈고, 코치를 만나면 조금이라도 더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현재는 매주 세 번의 팀 훈련을 한다. 훈련 내용을 경기에 적용하려면 개인 기량이 좋아야 하기에, 틈틈이 개인 연습도 병행하고 있다. 거의 축구만 하며 사는 생활 같지만 윤태진은 부족하다고 말했다. “혼자 연습하는 것과 경기에서 수비수를 달고 뛰는 건 차원이 달라요. 더 많이 연습하고 경험해야 나아질 것 같아요.”
우리가 왜 축구를 해야 할까. 축구공 앞에서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윤태진은 공을 차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진다고 말한다. 축구가 스트레스를 풀고, 성과를 내고,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날 쉼표가 될 것이라며 초보자일수록 더 재밌다는 점도 강조했다. “경기가 안 풀려서 자책할 때도 있어요. 그걸 이겨내는 과정에서 마음이 단단해져요. 정신력을 강화하고 신체도 건강하게 만들고 싶다면 축구에 매력을 느낄 거예요. 아! 그리고 살도 빠지고 힙업도 돼요.” 윤태진과 FC 아나콘다의 서사는 이제 막 도입부를 지났다. <골때녀> 3번째 시즌에서 그녀의 플레이는 기대해도 좋다. 물론 이건 승부와는 상관없다. 승리보단 축구를 향한 그녀들의 진심이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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