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투호 빌드업의 중심 선수는 누구이고, 공격을 전개할 선수는 누구일까. 축구 칼럼니스트 세 명이 대표팀의 엔진과 미션을 꼽는다.
‘1996 라인’ 황인범-황희찬, 벤투호의 엔진과 미션
WORDS 정지훈(<포포투 한국판> 편집장)
언제부턴가 한국 축구에 출생 연도와 관련된 라인이 생기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없었다.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황선홍과 홍명보를 ‘1968 라인’으로 묶는 것은 조금 억지스럽지 않은가? 대표팀에 ‘라인’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축구 천재’ 박주영이 등장하면서다. 박주영이 연령별 대표팀에서 맹활약하며 ‘1985년생’ 이근호, 백지훈, 김승용, 정성룡 등이 주목을 받았다. 이후 런던 올림픽 세대인 기성용-구자철의 ‘1989 라인’, 손흥민-황의조-김진수-이재성의 ‘1992 라인’이 생겨났다. 현 벤투호는 ‘1996 라인’이 중심이다. 멤버는 김민재, 황희찬, 황인범, 나상호. 이 중 ‘벤투호의 엔진과 미션’이라는 주제에 가장 적합한 선수는 황인범과 황희찬이다. 모두가 손흥민과 이강인 조합을 기대했겠지만 차분히 이유를 설명하려고 한다.
파울루 벤투 감독은 이번 9월 A매치 2연전에서 실험보다는 조직력 다지기에 집중했고, ‘가상의 우루과이-가나’ 코스타리카-카메룬전을 맞아 1승 1무의 성적을 거뒀다. 이후 이강인의 출전 불발, 수비 불안 등 여러 이야기가 나왔지만 한 가지 확실해진 것도 있다. 바로 벤투호의 ‘뼈대’다. 9월 A매치에서 2경기 모두 풀타임 활약한 선수는 단 4명. 바로 벤투호의 ‘뼈대’인 손흥민, 황인범, 김민재, 김승규다.
중원의 핵심은 황인범이다. 코스타리카전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 카메룬전에서는 더블 볼란치로 활약하며 벤투호의 ‘엔진’ 역할을 수행했다. 정교한 패싱력, 경기 조율, 수비 가담, 활동량 모두 합격점을 줄 수 있었고, 유럽 무대에 진출한 후 확실히 클래스가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제 황인범의 파트너가 누구냐가 관심사다. 황인범이 벤투호의 엔진이라면 미션은 황희찬이다. 미션은 자동차 변속에 도움을 주는 장치다. 축구에서는 공격의 속도를 더 높여주는 선수를 말하는데, 폭발적인 스피드를 자랑하는 ‘프리미어리거’ 황희찬만 한 선수가 없다. 한국 축구의 전설 박지성도 자신의 후계자로 황희찬을 뽑으면서 “많이 뛰고, 팀에 에너지를 많이 가져오는 선수”라고 찬사를 보냈을 정도다. 황희찬은 지난 9월 A매치 2경기 모두 선발 출전해 총 1백51분을 소화했다. 황희찬이 공을 잡으면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에이스’ 손흥민이 집중 견제를 받는 상황에서 황희찬은 손흥민이 만든 공간을 적절하게 활용했고, 폭발적인 스피드를 살린 돌파로 측면을 파괴했다. 여기에 왕성한 활동량, 강한 압박, 적극적인 수비 가담도 좋은 평가를 받았고, ‘온 더 볼’ 상황에서 자신감 있게 드리블을 치는 모습에서 ‘황소’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았다. 프리미어리그 진출 후 약점이었던 상황 판단과 슈팅력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처음 이 원고를 요청한 담당자는 황인범-황희찬 조합을 듣자 “황황 파워트레인이네요”라고 했다. 하하. 좋은 별명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벤투호가 16강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두 선수의 활약이 절실하다. 많은 축구 팬들은 손흥민에 대한 기대감이 높다. 하지만 축구는 혼자 할 수 없다. 손흥민이라는 ‘슈퍼카’를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엔진’ 황인범과 ‘미션’ 황희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벤투호 빌드업 시작과 완성은 김민재, 황인범, 손흥민
WORDS 박경희(<소년중앙>기자)
빌드업 축구.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끄는 파울루 벤투 감독의 기본 철학이다. 수비에서 미드필드로, 미드필드에서 공격까지 짧은 패스로 빠르게 전진하기 위해 지난 4년간 벤투호는 빌드업 디테일을 쌓아갔다. 벤투호 빌드업 축구에서 수비의 김민재, 중앙의 황인범, 공격의 손흥민은 ‘언터처블’이다. 월드컵에서 우루과이, 포르투갈, 가나를 만나 강한 전방 압박에도 벤투호가 원하는 빌드업 축구를 하고 싶다면 이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김민재는 무결점 중앙 수비수가 됐다. 터키 페네르바체에서 올 시즌 이탈리아 세리에A 나폴리로 이적해 첫 시즌 만에 새로운 환경에 완벽 적응했다. ‘몬스터’라는 별명답게 피지컬, 순발력, 속력, 헤더, 클리어링, 태클, 대인 마크 뭐 하나 빠지지 않는다. 여기에 발밑이 좋아 수비 시 그냥 걷어내는 볼이 없다. 지난 9월 리버풀과의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A조 1차전에서 김민재는 팀이 4-1로 승리한 가운데 88%의 높은 패스 성공률(UEFA 공식)을 기록했다. 정확하게 미드필더와 공격수에게 패스를 전달했고, 공격의 시발점 역할을 했다. 이 역할을 대표팀에서도 하고 있다. 김민재는 오른쪽 중앙 수비수로 나섰다. 왼쪽 중앙 수비수로 김영권, 권경원 등이 서고 있지만 이들은 빌드업 시 불안한 모습을 보여줬다. 결국 벤투호는 수비 진영에서 공격 작업 시 김민재의 패스를 믿을 수밖에 없다.
김민재가 패스를 공급하면, 중앙엔 ‘벤투호 황태자’ 황인범이 있다. 공수를 오가며 때로는 수비형 미드필더나 중앙 수비수 자리까지 내려와 패스를 받고, 좌우 윙에게 오픈 패스를 열어주거나 중앙에서 날카로운 침투 패스를 넣어준다. 황인범은 드리블과 볼 간수 능력도 뛰어나 미드필드 어느 지역에서 뛰든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벤투호를 상대하는 나라의 선수들은 황인범을 집중 마크할 수밖에 없다. 황인범이 상대 압박을 잘 풀어내느냐가 공격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다. 황인범을 보호하기 위해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 명 배치하는 ‘투 볼란치’를 써 미드필드 지역 수비를 강화하고, 황인범을 자유롭게 공격형 미드필더로 쓸 수 있지만, 벤투 감독은 지금까지 치른 경기에서 투 볼란치보다 ‘원 볼란치’를 선호한다는 걸 드러냈다. 결국 황인범이 개인 능력으로 압박을 풀어내지 못한다면 위기를 맞이할 것이며, 주변 미드필더와 풀백 또는 윙이 옆에서 도움을 줘야 할 것이다.
공격 진영까지 넘어온 볼을 처리하는 건 결국 공격수의 몫이다. 손흥민의 한 방을 믿어야 한다. 토트넘에서 손흥민은 윙 또는 케인과 함께 투톱으로 서며 공격에 치중하지만, 대표팀에서는 ‘프리 롤’ 역할을 맡아 미드필드 지역까지 내려오면서 볼 공급을 해주기도 한다. 미드필드 지역에 손흥민이 가세해 선수 숫자 싸움에서 이기려는 것이다. 다만, 손흥민이 내려온다는 건 공격이 잘 안 풀린다는 의미다. 김민재가 황인범에게 패스하면, 황인범의 첫 번째 선택지는 손흥민이 된다. 이 선택지를 상대도 잘 알고 있어 상대 수비가 두세 명 붙는다. 다른 공격수들이 상대 수비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황인범의 선택지가 많아지게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손흥민은 밀집 수비에서 벗어나 자신의 플레이를 선보일 수 있다.
벤투호가 빌드업 축구를 하는 목적은 ‘골’이다. 김민재가 수비에서 쓸어주고, 볼을 황인범에게 넘기면 황인범은 손흥민의 움직임을 파악해 침투 패스를 넣어준다. 그리고 손흥민의 마무리. 우리가 원하는 그림이다. 이 셋의 시너지가 터지고, 다른 선수들도 상대의 압박을 분산하는 유기적인 플레이를 해야 우리가 원하는 1승, 아니 16강을 바라볼 수 있다.
두 황태자 황인범, 황희찬
WORDS 조효종(<풋볼리스트> 기자)
한국 남자 축구 국가대표 명단을 천천히 살펴보면 눈에 띄는 성씨가 있다. ‘황’의조, ‘황’희찬, ‘황’인범. ‘황 씨가 이렇게 많았나?’란 생각이 들어 통계(인구총조사, 2015)를 찾아보니 황() 씨 성을 가진 우리나라 인구 비율은 약 1.4%, 전체 16위에 불과하다. 그러나 9월 A매치 명단 기준으로, 대표팀에는 황 씨가 김 씨 다음으로 많다. 모두 주축이라 존재감은 더 크다. 대표팀 황 씨들은 자리도 많지 않은 코스타리카전, 카메룬전 선발 라인업에 각각 세 자리, 두 자리를 차지했다.
황인범과 황희찬은 2경기 연속 자리를 지켰다. 9월 A매치 기간은 2022 카타르 월드컵에 앞서 마지막으로 유럽파를 소집할 수 있는 시기였다. 이때 기회를 받기만 해도 본선에서 중용될 가능성이 높은데, 둘은 우리 대표팀이 터뜨린 모든 골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기까지 했다.
황인범은 일찍부터 파울루 벤투 감독의 ‘황태자’로 통했다. 벤투호 출범 경기에서 대표팀에 데뷔했고, 못 나올 때를 제외하고는 매 경기 뛰고 있다. 벤투 감독은 황인범이 어디에서 뛰든 제 몫을 해줄 거란 믿음이 있다. 공격형 미드필더가 필요하면 공격수 뒤에 두고, 수비를 강화해야 할 때는 수비진 앞에 세운다. 경기 중 공격수가 부상을 당했을 때도 미드필더를 투입하고 황인범을 전진 배치할 정도다. 9월 A매치 2연전 때가 그랬다.
다재다능한 황인범의 여러 무기 중 최고는 앞으로 찔러 넣는 패스다. 대표팀엔 내로라하는 패서들이 많지만 황인범의 패스는 그중에서도 가장 창의적이라 패스 방향과 타이밍이 상대 급소를 겨냥하기 적절하다. 스스로도 자신의 역할을 “공격진에 좋은 패스를 공급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차곡차곡 전개하는 벤투호 공격이 발톱을 드러내는 건 공이 황인범의 발을 떠날 때부터다. 발톱을 휘두르는 일은 황희찬이 한다. 황인범이 패스로 변수를 만든다면 황희찬은 돌파로 상대 수비진에 균열을 낸다. 세련미는 부족해도 우직해서 보는 맛이 있다. 과감하게 밀고 들어가는 힘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도 통할 정도다. 별명이 괜히 ‘황소’인 게 아니다. 황희찬이 자리 잡으면서 공격진의 역할 구분이 훨씬 명확해졌다. 황희찬이 수비수와 경합하며 공을 운반하는 동안 반대편에서는 이재성 혹은 권창훈이 패스를 통해 공격을 전개한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피니셔’ 손흥민은 슈팅에 집중한다. 황희찬의 A매치 선발 비중이 높아진 최근 1년간 손흥민은 황희찬과 함께한 경기에서 11경기 7골을 기록 중이다. 앞선 3년보다 많이 넣었다. ‘손흥민은 대표팀만 오면 왜 골을 못 넣어?’라는 의문이 해결된 것이다.
황인범과 황희찬은 1996년생 동갑내기다. 연령별 대표팀 시절부터 오래 호흡을 맞춰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이 둘과 더불어 김민재까지, 모두 1996년에 태어난 이들은 ‘대표팀 1996 라인’으로 불린다. 4년 전 세계 챔피언 독일을 무너뜨린 1992년생 손흥민이 그랬듯 이번 월드컵은 ‘1996 라인’이 실적을 내고 대표팀 리더로 거듭나야 하는 시기다. 수비는 김민재가 알아서 할 테니, 공격은 ‘황-황’ 듀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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