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서거 직후, 소셜미디어에는 그를 추모하는 행렬이 넘쳐났고, 그의 패션 또한 재조명되었다. 수십 년 동안 그의 패션은 유행보다 왕실의 우아함을 일관되게 강조했고, 디자인만 9개가 제출될 정도로 공들여 제작된 대관식 의상은 군주의 역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말해주는 봉건적 유산으로 남았다. 여왕의 패션은 영국 통치자로서의 역할을 가시적으로 표현했다 할 수 있다. 유행을 따라가지 않는 세련되고 감각적인 드레스 선택은 여왕을 세계적인 리더로서 위상을 알리는 데도 한몫했다.
이런 여왕의 패션에는 몇 가지 보수적인 제약이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선 안 되고 주름이 최대한 적게 생겨야 하며, 돌풍이 몰아쳐도 드레스나 치마가 들리지 않도록 밑단 디테일에 신경을 써야 했고 땀 자국 또한 나지 않아야 했다. 실루엣에 한계가 있었음에도 여왕은 생동감 넘치는 색상, 생생한 프린트, 포인트가 되는 모자와 장갑 등의 액세서리로 다양한 변화를 추구했다. 영국 패션 문화의 필수적인 모자는 여왕의 시그너처가 되었으며, 독특한 디자인의 디테일은 그녀의 패션 센스를 가늠케 했다.
그 밖에도 웰링턴 부츠, 퀄팅 재킷, 실크 헤어 스카프, 그리고 패턴이 돋보이는 트위드 재킷과 수트를 즐겨 착용했다.
여왕은 업계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오래도록 패션 뮤즈와 같은 존재였다.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한 인터뷰에서 “여왕은 세상에서 가장 기발한 사람 중 한 명입니다”라고 말했다. 미켈레는 여왕의 서거 직후 가장 먼저 경의를 표한 디자이너다. 그는 인스타그램에 트위드 코트와 머리에 두른 스카프로 스타일링을 한 그녀의 사진을 게시했다. 실제로도 여왕의 평소 스타일과 미켈레의 구찌 사이에서 유사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왕이 착용한 것과 같은 디자인의 코트와 스카프는 구찌 쇼에 자주 등장했다. 버버리의 리카르도 티시는 여왕의 우아함은 버버리의 영국적 감각을 높이기 위한 핵심적 요소라고 언급한 바 있다. 또 영국을 매력적인 곳으로 만드는 이유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그 밖에도 미우치아 프라다는 2000년 로마 왕실 방문 당시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우아한 여성 중 한 명”이라고 말했고, 칼 라거펠트는 “그녀는 결코 우스꽝스럽지 않다. 그녀는 완벽하다”라며 그의 확고한 스타일에 대해 언급했다.
물론, 일관된 우아함이 항상 디자이너를 자극하는 요소는 아니었을 것. 이후 여왕의 이미지를 파격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던 이들도 있었다. 여왕의 대관식 의상 디자이너 노먼 하트넬의 디자인을 참조한 크리스토퍼 케인은 2011 봄 컬렉션에서 네온 컬러를 사용해 미래 지향적인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고, 1958년 피아니스트 듀크 엘링턴과 어린 엘리자베스 여왕의 만남에서 영감받은 에르뎀은 2018 봄 컬렉션에서 할렘 르네상스 시대 재즈 클럽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세트와 패션을 연출했다. 또 비비안 웨스트 우드는 여왕의 이미지를 훼손한 디자인의 ‘God Save the Queen’ 티셔츠를 선보이며 전복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한 세대가 흘러도 여왕의 영향력은 젊은 디자이너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2018년 리처드 퀸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영감받은 스카프와 패딩 재킷에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맥시멀 플라워 패턴 디자인을 쇼에서 선보였다. 2023 봄/여름 런던 패션위크는 여왕의 추모 기간에 진행되어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막을 내렸다. 라프 시몬스와 버버리는 일정을 미루어 진행했고, JW 앤더슨은 그를 애도하는 레터링이 적힌 티셔츠를 런웨이에 선보였다. 물론 모든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여왕의 영향력이 건재한 것은 아니다. 웨일즈 보너와 수프리야 렐레 등 오늘날 많은 디자이너들은 기존 체계에 반하는 반제국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며 컬렉션을 통해 제국주의에 공개적으로 투쟁한다. 세상이 변했다. 영국도 마찬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건 그 어떤 왕족도 그와 같이 패션계를 군림하는 스타일 아이콘이 될 수는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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