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일상과 가장 밀접하면서도 파급력 강한 정치적 수단이다’라는 닉 나이트의 말처럼 패션은 예로부터 시대를 대변하는 가장 좋은 지표이자 변화의 축으로 작용했다. 또한 사회정치적인 이슈를 반영하고 혁명을 위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일은 패션 역사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었다. 이를테면 코코 샤넬이 만든 여성의 반바지, 저지 소재로 만든 기능적이고 편안한 의상, 그리고 남성 수트에서 차용한 여성 팬츠 수트인 이브 생 로랑의 르 스모킹 컬렉션은 사회적인 통념을 뒤집고 자유와 해방의 기폭제로 작용한 대표적인 예다. 1984년에 발표한 장 폴 고티에의 ‘And God Created Man’ 컬렉션도 눈여겨볼 만하다. 스코틀랜드의 킬트와 웨이터의 앞치마 등 남성 유니폼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남성 스커트는 당시에 첨예한 논란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고정적인 남성성, 그리고 성별의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한 진보적인 컬렉션으로 평가되며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정치 슬로건 티셔츠로 주목받은 캐서린 햄넷, 캣워크를 혁명의 장으로 만든 비비안 웨스트우드도 브랜드를 통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있는 활동가이자 디자이너다.
동시대 디자이너들이 최근 가장 관심을 보이는 주제는 다양성이다. 사회가 규정짓는 기준으로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음지에 존재하는 것에 빛을 비춘다. 루이 비통 최초의 흑인 디자이너였던 버질 아블로는 다양성 문제를 컬렉션의 핵심 가치로 삼았다. 인종과 성별, 계급, 섹슈얼리티 등의 경계를 허물고 소외된 사람들을 되돌아본 컬렉션은 물론, 흑인 학생을 위한 장학 기금을 세우거나 유색 인종을 대표하는 아티스트, 브랜드와 협업해 사회의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듯 편견을 조명하고 시선의 변화를 꾀한 태도는 그가 우리 곁을 떠난 후에도 끊임없이 회자되는 이유 중 하나다. 버질 아블로와 함께 활동했던 디자이너 사무엘 로스도 A-COLD-WALL을 통해 계급의 다양성과 노동문제를 다룬다. 관심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열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그는 유색인종과 노동자 계층 등 패션 산업에서 배제됐던 공동체를 위한 지원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아디다스와의 협업으로 최근 가장 뜨겁게 떠오른 웨일즈 보너 또한 아프리카 문화에서 영향받은 컬렉션을 통해 소수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담은 메시지를 전한다. 다양한 인종의 모델을 기용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는 그는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컬렉션에 담는다.
최근 자신만의 신념과 방향성에 대한 견해를 풀어나가던 브랜드들이 모두 한목소리를 낸 일이 있었다. 팬데믹으로 주춤했던 피지컬 쇼가 본격적으로 부활했던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고 모두 혼란에 빠졌다. SNS에는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업로드됐고 파리의 거리에는 우크라이나 국기를 상징하는 파란색과 노란색의 옷, 전쟁을 반대한다는 의미를 새긴 다채로운 프린트가 넘실댔다. 컬렉션을 미처 중단할 수 없었던 디자이너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우크라이나에 경의를 표했다.
이자벨 마랑은 쇼가 시작되기 전 인스타그램을 통해 우크라이나 국민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표했으며, 피날레 룩으로 우크라이나 국기를 연상시키는 스웨트 셔츠를 입고 등장했다. 발렌시아가 컬렉션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뎀나 바잘리아가 올렉산드르 올레스의 시 한 구절을 우크라이나어로 낭송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세트 속을 헤치고 걸어나오는 모델들은 그 자체로 저항의 상징처럼 여겨졌으며, 쇼 말미에는 우크라이나 국기를 상징하는 노란색 트랙 수트와 파란색 드레스를 연이어 선보였다. 어린 시절 내전으로 난민이 되었던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고백한 뎀나는 행사를 취소하는 것이 곧 항복이자 굴복이라고 여겨 쇼를 강행했다고 말한다. 또한 쇼의 모든 좌석에 우크라이나 국기를 상징하는 노란색과 파란색 티셔츠를 놓아두고 발렌시아가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모두 지워 우크라이나의 아픔에 동조했다. 릭 오웬스는 원래 연주하기로 한 일렉트로니카 아티스트 이프롬의 음악에서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으로 사운드트랙을 변경해 이전과는 다른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또한 음악을 완전히 없애고 침묵의 쇼를 진행한 조르지오 아르마니, 존 케네디의 평화 연설으로 시작해 존 레넌의 ‘Give Peace a Chance’ 노래로 막을 내린 스텔라 매카트니 등 음악을 통해 우크라이나에 위로를 전한 브랜드들이 눈에 띄었다. 또한 샤넬과 에르메스 같은 하우스 브랜드부터 자라와 H&M에 이르는 SPA 브랜드까지 러시아에서 매장을 철수하고 온라인 운영을 일시 중지한다고 선언했으며, LVMH와 케어링 그룹은 국제적십자위원회와 유엔난민기구에 기부를 약속했다.
역사적인 사건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견해와 사회적 정체성을 명확히 한 브랜드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행동을 촉구하고 더 많은 사람들과 연대할 수 있도록 한다. ‘의견과 논쟁이 없는 패션은 상품에 불과해요’라는 마틴 로즈의 말처럼 자신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입는지에 대해 인식할 때 패션은 비로소 힘을 가진다. 그래서 패션을 선도하고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디자이너는 사회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이를 의식적으로 다뤄야 할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이 시대의 진정한 하이패션은 사회적인 메시지를 반영하고 투영하며, 옷을 입는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개념 있는 패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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