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다른 사람 연애 얘기 듣는 건 재밌다. 오죽하면 학창 시절 실습 나온 교생 선생님에게도 “첫사랑 얘기 들려주세요”가 ‘국룰’이었겠나. <아찔한 소개팅 >류의 배틀 형식 데이트가 유행이던 2000년대 초중반부터 연애는 잘 팔리는 예능 장르 중 하나였다. 하지만 2022년 대한민국 예능은 연애라는 리얼리티에 진심을 넘어 과몰입 중이다. 아무래도 제작진은 생전 처음 보는 남녀가 일정 시간 특정 장소에서 숙식하며 짝을 찾는 형식으로는 만족이 어려운 모양이다. 헤어질 위기의 연인들을 모아놓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보라고 유혹하거나, 지나간 첫사랑을 소환해 다시 사귈지 묻는 새로운 상황을 설정한다. 혹은 남사친, 여사친을 굳이 연애 상황에 밀어 넣거나, 친한 친구들끼리 사랑 쟁탈전을 하게 만든다. 또 그간 연애 리얼리티에서 소재로 쓰이지 않았던 돌싱과 퀴어 커플도 등장하고 있다. 한마디로 지금 대한민국에서 불륜 빼고 할 수 있는 연애의 모습을 총망라해 방송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올여름 케이블과 OTT 포함, 10여 개의 연애 리얼리티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면 ‘사랑밖에 난 모르는’ 국가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SNS에서는 연애 리얼리티의 주요 ‘짤’들이 돌며 댓글을 통해 연애에 관한 사회적 담론이 형성될 지경이다. 애인이 내 친구의 깻잎을 떼어주는 걸 허용하는지에 대한 ‘깻잎 논쟁’이 전국을 강타하면서, 유튜브에는 <바퀴 달린 입> 같은 다양한 연애 상황을 두고 논쟁하는 프로그램까지 편성됐다. 연애 콘텐츠는 이렇게나 범람하고 있건만, 정작 현실 세계에선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진다.
지난 3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2021년 인구포럼 통계’ 결과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애인이 없는 미혼 중 2020년 2월 코로나19 확산 이후부터 조사 시점까지 새로운 이성을 만나거나 소개받은 경험이 있는가 묻는 질문에 78.1%가 ‘없다’고 응답했다. 쉽게 말하면 조사에 응한 미혼 남녀 78.1%가 연애하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약 1년 동안 열 명 중 두 명만 이성을 만나본 경험이 있다는 것. 그렇다면 혹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때문은 아닐까? 코로나19 이전과 현 상황을 비교해본 항목도 있다. 요즘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소개받는 빈도가 달라졌는지를 묻는 설문에 응답자의 약 절반은 ‘변화 없다’고 답했다. 특히 여성의 31.7%, 남성의 32%는 ‘매우 줄어들었다’고 답할 만큼 새로운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애 프로그램의 인기와 청년 세대의 연애 비율이 정확하게 반비례하는 결과다.
콘텐츠 속 연애는 인기인데, 현실 속 연애는 왜 어려운 걸까? 연애에 집중해야 할 2030세대의 삶을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면 ‘갓생’일 거다. 연애 대신 주식 투자를 고민하고, 가슴을 설레게 하는 사람을 찾는 대신 메타버스 세상 속에서 익명의 친목 활동을 하며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목표를 설정하고 성취하기 위해 만다라트 계획표까지 공부하기도 한다. 야구 선수 오타니 쇼헤이가 성공 비결로 언급하면서 화제가 돼 ‘갓생러’가 MZ에게 대유행이 됐다. 대학생은 대외 활동에, 취준생은 스펙 쌓기에, 직장인은 사이드 프로젝트와 재테크를 병행하다 보니 연애가 끼어들 틈이 없다. 인스타그램 스토리만 둘러봐도 이들의 ‘갓생’ 트렌드를 알 수 있다. 운동도 열심히, 전공 혹은 업무 관련 스터디도 열심히, 빼곡하게 하루를 기록한다. ‘계획대로 24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나, 제법 멋진걸?’ 이러한 정신과 태도가 2030세대에게는 힙 그 자체다. 반면, 좋아하는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속상해하거나 애인이 변한 것 같아서 불안하거나 하는 고민은 전혀 힙하지 않다. 자아와 자기애로 꽉 차 있는 2030의 삶에서 연애는 ‘나답지 못한 것’일 확률이 매우 높다. <바퀴 달린 입>에서 곽튜브가 ‘연애 찌질남’이 된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여자친구를 사귀는 동안 매달리고, 잘해줬다는 식의 언급들, 누가 나를 좋아하는 경우가 흔치 않기 때문에 무조건 사귄다는 의견 피력 등을 통해 ‘쿨하지 못하게 연애하는 사람은 찌질해’라는 프레임이 씌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다라트 계획표에서 연애는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코로나19 상황이 장기화하면서 현생은 더욱 험해졌다. 연애보다는 먹고사는 문제와 건강에 더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뉴스에서는 데이트 폭력 같은 범죄가 연일 보도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남혐’이니 ‘여혐’이니 논쟁이 벌어진다.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구를 만나 간질간질하게 ‘썸’을 타고, 우리가 사귀는지 아닌지 서로 마음을 확인하다가 키스를 ‘갈기고’ 연애에 돌입하는 이 모든 과정이 버겁다. 차라리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에서 이준호와 우영우의 ‘키갈’ 장면을 유튜브로 돌려보면서 설렘을 충전하고, 현생에 집중하는 게 마음이 편할 정도다. 연애의 흥망성쇠보다 주식 폭락과 코인 떡락이 더 가슴 아픈 것도 현실이고. 최근 연애 프로그램의 인기에 힘입어 한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마녀사냥>이 티빙 오리지널로 부활했다. <마녀사냥>에는 신동엽을 비롯해 코드 쿤스트와 비비까지 합세해 마라 맛 섹드립이 펼쳐진다. 하지만 시청자의 관전 포인트는 2013년과 전혀 다르다. 더 이상 연애 고민 사연에 몰입해 ‘그린 라이트인가 아닌가’를 두고 설전을 벌이지 않는다. 2022년엔 캐릭터 좋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토크쇼일 뿐이다. ‘원나잇’ 같은 자극적인 이야기가 나와도 그건 그냥 예능으로서의 재미일 뿐 현생과는 상관없다고 여긴다.
넘쳐나는 연애 리얼리티와 점점 연애를 하지 않는 청년들. 2022년을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에게 연애는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로 친구를 소환할 만큼 재미있는 콘텐츠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들이 연애를 1순위로 두고 뜨겁게 청춘을 불태울 수 없는 현실인 것 또한 분명하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는 ‘내가 하는 것’ 말고 ‘내가 보는 것’으로 연애를 재정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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