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 연기부터 시작했다고요. 당시 어떤 마음으로 임했나요?
적성에 맞으면 하고, 아니면 말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재미를 느끼면 잘하고 싶잖아요. 그래서 제 연기 인생 통틀어 그때 가장 열심히 연기에 임했어요. 그땐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밤새워 코피 쏟으면서 연습했어요.
창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연습했다고요?
한밤중에 가족에게 방해될까 싶어 작은 불 하나 켜놓고 읊조리며 연습했어요. 그만큼 간절했던 거죠. 그때는 자존심이 세서 부모님의 반대에 대한 반발심이 컸던 것 같아요. 내가 꼭 좋은 학교를 가야 부모님이 믿고 지지해주실 것 같았거든요.
그 시절 하윤경은 연극이나 영화를 아주 좋아했다고 들었어요. 배우를 꿈꾸게 해준 작품이 있을까요?
중학교 때 본 뮤지컬 <라이온 킹>이요. 무대 위에서 몸 쓰며 노래하는 배우들이 멋있었고, 어떤 마음으로 저런 걸 할 수 있을까 궁금했죠. 그게 첫 출발인 것 같네요. 이후로 무대 연기에 대한 호기심을 키웠고, 20대 때는 연극, 무대 연기를 참 좋아했어요.
20대의 윤경 씨도 연기 열정이 대단한 노력파였군요.
그때는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었어요. 성숙하지 못하고 뾰족한 사람이었죠. 그래도 그런 모습이 그 나이 때만 가질 수 있는 치기라고 생각해요. 그 치기가 저를 독하게 만들었고요. 지금은 너무 유해져서 나약해지는 순간을 자주 직면해요. 염세적인 사람이었던 내가 한 살 한 살 먹으면서 더 긍정적으로 밝게 변했죠.
연극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로 데뷔했고, 이후 여러 매체에 발을 들였어요. 다양한 방식의 연기를 접해본 만큼 그 차이를 느끼는 순간도 있었겠죠.
실질적, 물리적으로 달라요. 무대 연기는 멀리 있는 관객에게까지 소리와 몸짓을 통해 내용을 전달해야 하죠. 그러기 위해선 연기가 과장될 수밖에 없어요. 영화나 드라마 같은 매체 연기를 해보니 무대 연기가 엄청 커 보였어요. 모니터 화면을 통하면 작은 손짓 하나도 커 보이고, 눈동자의 떨림도 자세히 보이니까. 처음에는 연기를 안 하는 것 같다 느껴졌죠. 동작이나 몸짓이 작으니까요. 무대 연기처럼 연기를 더 크게 표현하고 싶다는 갈증을 느꼈어요. 지금은 매체 연기에 적응해 무대 연기를 해보라고 하면 자신 없다고 해야 할까요? 이젠 섬세하게 연기하는 버릇이 생겨 무대에서는 내 연기가 보이지 않겠다는 걱정이 들더라고요. 근데 연극 무대 출신 배우들이 연기를 잘하잖아요. 발성도 좋고, 배역에 대한 이해도와 시나리오 분석에 대한 기본이 탄탄하다는 말이 와닿게 연기를 하죠. 연극 무대 연기의 크기를 잘 줄여서 섬세하게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그렇게 연기할 수 있도록 노력해요. 무대에 선 경험이 지금 많은 도움이 되고요. 좋은 스텝을 밟아온 것 같아요.
연극은 관객의 호응을 직접적으로 받죠. 반면 매체는 촬영 후 시청자의 반응을 얻기까지 긴 시간이 소요돼요. 매체 연기도 무대 공연처럼 카타르시스를 느끼긴 어려울 것 같아요.
매체의 가장 큰 매력은 남는다는 사실이죠. 아무리 연극 무대를 촬영해도 현장 분위기까지 담아낼 순 없거든요. 그래서 한 번 선보이고 휘발돼버리는 게 공연의 장점이자 단점인데, 매체는 내가 섬세하게 준비해서 선보인 연기가 기록으로 남죠. 그것도 역시 장점이자 단점이죠. 왜냐하면 제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부끄럽기도 하고 늘 아쉬움이 남거든요. 저는 제 연기를 보면서 한 번도 만족해본 적이 없어요. 화면으로 보면 고칠 점만 눈에 띄어서 끊임없이 공부하게 되더라고요. 매체 연기의 다른 장점은 즉흥성이에요. 연극은 두세 달 연습한 후 그대로 선보이지만, 매체 연기는 현장에서 결정되는 부분이 많아요. 아무리 많이 준비해도 현장에서 내가 이겨내야 하죠. 그 점이 스트레스로 다가올 때도 있지만, 이겨내고 여러 가지가 잘 맞아떨어져 좋은 장면이 나올 때의 기분, 그게 저한테는 일종의 카타르시스죠.
가장 깊게 몰입한 배역이 있을까요?
몰입이라고 하면 조금 낯간지럽지만, <경아의 딸>을 가장 많이 고민하며 임했어요. 한 장면, 한 장면을 그냥 넘기지 않고 열심히 했어요. 성범죄 관련 소재를 다룬 영화이기도 하고, 그 주제를 쉽게 연기해버리고 싶지 않아 정말 조심스럽게 작업했어요. 조심스럽게 작업한 부분이 영화에도 조금은 담긴 것 같아 그 작품을 제일 좋아해요. 가장 추천해드리는 영화이기도 하고요.
좋아하고 아끼는 작품인 만큼 넘어야 했던 허들도 많았을 것 같아요.
맞아요. 감정적인 신이 정말 많았는데, 오히려 감정을 절제해야 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차라리 울거나 화내버리는 감정 연기는 배우 입장에서 재미있게 할 수 있거든요. 저는 감정을 막 분출하면 편안하다고 느끼는 배우이기도 하고요. 근데 <경아의 딸>에선 감정을 아주 절제하면서 동시에 표현해야 했죠. 정말 어렵죠. 어떻게 하면 관객이 영화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몰입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그 지점이 가장 어려웠어요.
고민에 대한 해답을 얻는 방법이 있을까요?
일단 정말 많은 레퍼런스를 봐요. 제가 임하고 있는 작품의 소재와 관련된 작품들을 많이 찾아 봐요. 최대한 다양하게 보려 하고, 관련 기사도 찾아 봐요. 주변 배우들이나 영화감독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요. 음악도 많이 들으려고 해요. 그런 사소한 것들이 정말로 도움이 되는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연기를 하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강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이것저것 많이 뒤져보는 편이에요.
연기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고 음악을 많이 듣는다는 건 새로워요.
음악은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가장 좋은 수단인 것 같아요. 근데 연기할 때는 절대 안 들어요. 오히려 감정 몰입에 방해되더라고요. 작품 준비 과정에선 음악이 큰 도움이 돼요. 연기할 인물의 정서를 이해하면, 그 정서와 비슷한 무드의 음악을 들어요. 그럼 그 인물과 더 가깝게 느껴지죠.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통해 대중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는데, 인기를 체감한 적 있어요?
요즘 가족이 전화를 자주 해요. 매일 전화해서 사인해달라고 하죠.
인기를 체감하는 순간 부담감이 확 생기죠.
정말 그래요. 그래서 다음 작품에 대한 부담이 커요. 내가 맡은 연기를 했을 때 실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크고요. 근데 사람이 완벽하지 않으니까 누군가에게 또 실망을 주겠죠. 그래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최대한 노력하려고 해요. 근데 뭐, 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는데 큰 관심을 받은 건 아니라서 마음이 붕 뜨지는 않았어요.(웃음) 저는 여전히 똑같아요. 예나 지금이나. 초심 잃지 않고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소중히 하면 되지 않을까.
윤경 씨의 시원시원한 모습이 좋아요.
예전에 은빈이가 여행 갔다가 난처한 상황을 겪었던 에피소드를 저한테 얘기하길래 제가 “누구야! 누가 그랬어!”라고 말했거든요. 그랬더니 은빈이가 넌지시 “너랑 여행 가면 너무 좋겠다”라고 말하는데 진심 같은 거예요. 그러면서 “너같이 그렇게 시원시원한 면을 가진 친구들이 부럽고 좋아”라고 하는데 그때 감동받았어요. 은빈이는 정말 순수하고 맑은 친구거든요. 저는 오랜 시간 연예계 생활을 한 은빈이에 비해 일반인으로 산 시간이 길잖아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 하고 시원시원해 보인 것 같아요. 제가 워낙 감정선이 다양하기도 하고요.
도전하고 싶은 장르 있어요?
장르적인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일상 연기는 자주 해봤지만, 스릴러나 액션, 시대극처럼 장르적인 작품은 안 해봤거든요. 일상에서 벗어난 톤의 연기를 해봐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악역도 해보고 싶고, 하고 싶은 연기가 너무 많아요. 정말 진한 멜로도 해보고 싶어요.
비일상적이고 개성 강한 역할의 하윤경도 궁금해요. 그리고 공포 영화 좋아한다고요.
귀신 나오는 공포 영화보단 심리적인 공포에 흥미를 느껴요. 아리 애스터 감독의 <유전> 정말 좋아해요. <미드소마>도요. 감독님이 저런 괴랄함을 어떻게 창조한 건지, 의도를 생각하는 걸 좋아하고요. 기이한 미장센을 살리는 연출이나 창의력이 흥미롭죠. 감독님은 저런 세계를 어떻게 구축했을까 하면서요.
<서스페리아 1977>나 <킬링 디어>도 좋아하죠?
아주요. <더 위치> 봤나요? 안 봤다면 추천해드려요. 마녀에 대한 영화인데 아마 좋아할 거예요. 제작한 감독들이 다 천재 같아요. 작가주의적인 영화보단 장르적인 영화에선 카메라의 무빙이나 연출이 중요한데, 모든 연출이 딱 맞아떨어지는 작품 보면 나도 저런 작품을 연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죠.
인상적인 작품이나 캐릭터가 궁금해요.
너무 많아서 . 배우는 케이트 윈슬릿을 정말 좋아해요. 에너지가 강렬한 사람인데 아주 유악한 면도 있어서 그 배우가 표현하는 떨림 같은 것이 좋아요. 건강해 보이지만 예민한 구석이 있죠. 저는 배우에 따라 작품을 보기도 하거든요. 케이트 윈슬릿이 나오는 작품이면 몰아서 죽 봐요. 반면 인상적인 캐릭터는 <결혼 이야기>에서 니콜(스칼릿 요한슨 분)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결혼 이야기>의 스칼릿 요한슨 연기죠. 아름다운 배우의 상징이잖아요. 근데 미모보다 그 사람의 연기력이 빛을 발하는 캐릭터라고 느꼈어요.
배우 하윤경은 어떤 사람일까요?
정말 어렵네요. 저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러니까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여운이 남는 배우이고 싶은 사람. 당장 강렬한 연기를 하는 배우가 아닐지라도, 돌아서면 이상하게 마음에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사람이고 싶어요. 지금의 나는 어떤 사람인지 말한다면, 부족함을 인정하고 노력하는 사람이요.
인생에 경험치가 쌓이면 자신을 잘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더 모르겠지 않아요?
너무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어떨 땐 거짓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내가 이렇게 생각한 것이 맞나? 하는 의문까지 들죠. 나는 이렇게 생각해서 말한 게 맞긴 해, 그렇지만 진짜로 난 이렇게 생각해서 말한 건가? 그래서 모르겠어요.
현재 맞닥뜨린 고민은 뭐예요?
잘해야겠다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싶어요. 완벽해지려는 부담감.
완벽주의자인가요?
그런 걸까요? 완벽주의자인데 완벽하지 않다는 게 문제인 거죠. 그 괴리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는 거예요. 그 마음을 내려놓고 대충 살고 싶어요. 그래서 ‘대충 살자’가 제 모토예요. 왜냐하면 어차피 저는 대충 못 살거든요. 그런 생각이라도 하면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노력은 평생 해야 될 숙제나 마찬가지예요. 현장에서 놀이처럼 연기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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