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소비 금액이 꽤 컸다. 여행을 가거나 고가의 제품을 산 것도 아니었다. 내역서를 뽑아보니 가스·전기요금 및 관리비를 제외하고 가장 자주 지출한 영역은 음식과 주류였다. 배달 앱 주문 빈도도 높았고, 그 외에 전시나 영화 관람료, 다수의 구독료도 상당했다. 이 밖에 자기계발을 위한 소비도 있었다. 1년 스페인어 수강료 60만원, 이게 꽤 컸다. 결론적으로 나는 먹는 것과 보는 것(콘텐츠 플랫폼 구독)에 큰 가치를 두고 살아왔다. 다른 20대는 어떤 방식으로 소비할까. 가장 큰 가치를 둔 소비 영역은 무엇일까. 나의 소비 습관을 바탕으로 앙케트 항목을 만들었다. 배움(스페인어), 일탈(음주가무), 편의(배달 앱 사용), 문화생활, 취향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20대 스무 명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디에, 어떻게 돈을 쓰고 있습니까?
귀차니즘이 낳은 충동구매
취재한 것들을 모아보니 20대에게서 눈에 띄는 소비 습관은 배달이었다. 20대는 배달 서비스를 아주 잘 활용하고 있었다. 환경공학을 전공하는 23세 C는 말했다. “생필품은 배민 마트에서 주문하면 한 시간 내로 도착하고, 빨래는 세탁 서비스 런드리고에 구독료 11만5천원만 지불하면 세탁부터 배달까지 절로 되는 세상에 내가 굳이 직접 해야 할까요? 차라리 집에서 쉬면서 보다 만 예능 <나는 솔로>나 마저 볼래요.” 지금 20대에게 배달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수단이기보다 당장의 귀차니즘을 해소하는 수단이다. 좋아하는 것만 하기도 바쁜 일상에 필수적인 일은 접어두고 싶은 게 20대다. 그래서 웃돈 주고서라도 할 일을 플랫폼 서비스에 미루었다. 이런 습관에는 문제점도 있었다. 충동구매다. 생필품을 배달받기 위해선 일정 금액 이상 물건을 구매해야 하며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까지 고르게 된다는 거다. “샴푸 사려고 마트 가는 게 귀찮아 3만원 이상 구매하면 배달해주는 올리브영 오늘드림으로 주문했어요. 근데 샴푸가 8천원이라 나머지 2만2천원을 채우려 4만5천원 하는 안마기도 샀어요.” 24세 승무원 D가 말했다. 수고로움을 지양하는 지금 20대는 눈앞의 편리함과 여가 활동에 시간을 쏟으려 플랫폼 서비스에 소비를 아끼지 않았다.
고급 취향 자랑하려고
최근 아키라백에서 먹은 코스 요리 사진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렸더니 DM이 마구 도착했다. 다들 하나같이 ‘좌표 좀 달라’ 혹은 ‘거기 맛있지’라는 내용을 보냈다. 이미 가봤거나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남녀 구분 없이 고급 레스토랑이나 힙하다고 소문난 곳이라면 사정없이 달려든다. 그런 곳은 휘황찬란하게 입은 Z세대 천국이고 가격도 비싸다. “얼마 전에 예약이 필수인 와인 바에 갔거든요. 거기에서 2만원 하는 뇨키가 맛있어서 세 번 연속 시켜 먹었어요. 한 달 소비액이 1백50만원 정도인데 그중 절반 이상을 외식에 쓰고 있어요.” 27세 렌즈연구원 E가 말했다. 지난달 28세 모델 F는 거금을 들여 그랜드 하얏트에서 숙박했다. “40만원이 아깝지 않았어요. 다들 호텔 수영장 사진을 올리는 걸 보고만 있자니 비주류가 된 것 같았어요. 동년배가 하는 경험은 나도 해봐야 직성이 풀려요.” 20대는 고급 취향을 쌓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 여기서 고급은 고품격보단 힙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표현주의 시대에 ‘내가 이렇게 힙한 취향을 가졌다’는 걸 자랑하고자 하는 심리가 강했다.
배움은 소통을 위한 것
취재 항목 중 ‘배움’에 대한 답변에서 가장 자주 보인 건 골프와 필라테스다. 29세 쇼핑몰 운영자 G는 골프 연습에 소비하는 비용만 한 달에 60만원이다. 29세 프랑스어 통역가 H도 마찬가지로 골프 강습에 50만원을 투자하고 있었다. 20대 사이에서 골프가 유행이고 인스타그램에 골프 하는 사진을 올리면 골프가 취미인 사람끼리 팔로잉을 맺으며 유대감이 형성된다는 게 그들의 말이다. 골프는 인스타그래머블한 행위가 된 것이다. 헬스 퍼스널 트레이닝에 61만원을 투자한 29세 딥러닝 개발자 I는 보디 프로필 촬영을 앞두고 있다. 보디 프로필 촬영이 유행이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했다. 문득 홀로 스페인어를 배워보고자 학습지를 결제한 내게 지인이 한 말이 생각났다. “그런 건 유튜브에 검색하면 다 나오고 심지어 무료야.” 결제한 스페인어 강좌는 1년에 60만원이다. 한 달로 계산하면 5만원으로 꽤나 합리적인 가격 아닌가. 하지만 다른 20대는 혼자 익히는 자기 계발을 위해 큰돈을 투자하는 것보단 사람들과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것에 투자하는 걸 유익하다고 느꼈다.
트렌드, 놓치지 않겠어
아직도 안 갔어? 최근 오픈한 성수동 디올 매장을 다녀온 28세 웹 디자이너 A가 물었다. 시간이 없어서 못 갔다고 말하려다가, 가긴 갔는데 시간이 없어서 자세히는 못 봤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디올 매장에서 제품을 구입하는 건 제쳐놓고, 최신 문화 이슈를 경험했느냐 못 했느냐는 요즘 20대에게 중요한 사항이다. 문화 트렌드를 좇지 않으면 대화를 주도할 수 없고, 대화의 맥락을 이해하기도 어렵다. 20대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선, 대중문화 트렌드라는 보편성을 갖춰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만의 내밀한 취향과 남다른 감각을 내세워야 한다. OTT에서 유행하는 드라마 시청은 필수다. 하지만 OTT를 여러 개 구독해야 하니 한 달 구독료만 해도 만만치 않아, 20대는 계 모임 하듯 친구들끼리 계정을 공유하기도 한다. 인스타그램에 등장한 공연과 전시도 경험해야 한다. 바이닐을 수집하기 시작했다는 블록체인 개발사의 B씨는 최근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3일권을 결제했다. “공연 관람료에 이틀간 묵을 숙소 비용까지 약 60만원 넘는 돈을 결제한 건 취미를 넘어선 과소비였어요. 하지만 페스티벌 기간에 인스타그램 피드가 공연으로 채워질 텐데, 남들 다 하는 경험을 저만 안 하면 촌스럽고 고지식한 사람으로 비칠 것 같았어요.” 유행에 민감한 20대는 또래가 지금 가장 많이 경험하는 영역에 소비한다. 지금 20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은 다채로운 문화생활이다. 달리 말하면 최신 콘텐츠 경험. 그리고 콘텐츠 경험에는 시간과 비용이 요구된다.
금융소득 시대의 투자
최근 지인에게 연락을 받았다. 이건 정말 역대급 사건이라며 이야기를 풀어냈다. 사내 개발자(27세)가 적게는 50만원, 많게는 2천만원을 동료들에게 빌리고 갚지 않은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 개발자는 권고사직 처리됐다. 그는 지난 1년간 주식에 빠져 있었단다. 말 그대로 ‘빚투’다. 지금 20대가 주식, 청약, 펀드 등 각종 투자에 몰두하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금융소득 시대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는 저축보다 투자를 선호한다. 매달 월급의 일정 금액을 적금에 쏟아부으며 주식을 위한 시드머니를 만든다. 27세 사회복지사 J는 최근 주식에 발을 들였다. “내가 들어가니까 주식 시장이 하락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렇지만 1천만원을 투자하려고 매달 50만원씩 저축하고 있어요.” 한편 내 집 마련의 꿈을 품은 28세 자동차 디자이너 K는 주택청약저축을 붓고 있지만 울며 겨자 먹는 행위라고 느낀단다. “경기가 급격히 침체돼 이게 소용 있는 일일까 싶어요. 집값은 폭등했고 월셋집을 구하는 것도 힘든 사정이죠.” 20대에게 투자는 당연한 소비의 일환이었다. 경기가 침체돼도 언젠가는 펼쳐질 미래를 꿈꾸며 투자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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