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메이커 권오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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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권오준은 영상을 만든다. 주로 뮤직비디오와 퍼포먼스 영상, 광고 영상이다. 힙합 신의 전설들, BTS 등 글로벌 K-팝 스타, 새로운 감각의 뮤지션 모두 그를 기다린다. 권오준의 힘은 메모에 있었다.
우리는 흐르는 강물 위에 떠 있다. 보고 듣는 경험은 물 위에서의 일이지만, 그것이 내재화되어 나를 형성하는 것은 물속의 일이다. 지금의 생각, 느낌,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이미지와 문장은 수면 아래서 희미한 형체만 드러났다 사라진다. 그것이 무의식이고, 창작의 원천임을 깨달았다면 놓치지 말고 잡아둬야 한다. 어떻게? 메모로.
필름 메이커 권오준은 메모하는 습관을 지녔다. 고등학생 때부터 메모하기 시작했다고 하니, 그의 습관은 꽤 오래되었고, 방대한 아카이빙을 이룬다. 그는 무엇을 메모할까. 메모는 어떻게 그의 무기가 되나? “꿈에 비주얼이 보일 때가 있어요. 뮤직비디오 트리트먼트 제작을 위해 곡을 며칠 동안 반복해 들으면, 그 곡이 꿈속에서 이미지로 발현됩니다. 잠에서 깨면 꿈이 날아가지 않도록 바로 메모하죠. 메모가 뮤직비디오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에게 메모는 무의식을 저장하는 방법이고, 또 자신만의 무의식을 불러와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소스가 되기도 한다. 휴대폰이나 종이, 손에 잡히는 그 무엇으로든 그는 문득 떠오른 것들을 잡아둔다. 영감을 포섭하는 방식은 문장이다.
권오준은 타투이스트였다. 그의 팔은 타투로 가득하다. 마치 메모장처럼 그는 무언가를 영구적으로 새기는 사람이다. 때로는 꿈에서 타투이스트를 만나기도 한다. “타투이스트를 따라 지하실로 내려갔는데, 그가 연쇄살인마였어요. 제가 왜 거기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벽에는 문신이 새겨진 수많은 인피들이 걸려 있었죠. 문신이 새겨진 몸을 예술품처럼 전시하듯이요. 그 장면이 강렬하게 남았어요.” 짧은 이미지를 비주얼화하고, 그 비주얼들을 연결해 서사를 짜며 명분을 만드는 것은 그의 본업이다. 때로는 꿈이 아니라 문득 이미지가 떠오를 때도 있다. 뮤직비디오 제작을 의뢰받으면, 해당 곡을 며칠 동안 반복해 듣는데, 최근 작업한 비비의 곡은 닷새째 이미지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길 한복판에서 메모하기 시작했다.
뮤직비디오는 길어야 5분 남짓. 그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전부 담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그는 작업을 확장하고픈 욕구가 생겼다. 즉, 이야기를 만드는 것. 뮤직비디오보다 긴 호흡의 스토리텔링이다. “메모장에 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해 썼어요. 금액과 아이데이션도 꼼꼼하게 적었죠. 다이나믹 듀오 형들과 작업한 뮤직비디오에서 파생된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럼 그 뮤직비디오가 이야기의 시작이 되는 거죠.”
그는 휴대폰 메모장을 보여주며 스크롤을 당겼다. 한참이나 내려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인생을 시각화해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언젠가 메모의 끝에 도달하면, 그는 과거의 자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텍스트로 존재하는 그때의 자신을 마주하면 어떤 기분일까? “가끔 보면 안쓰러워요. 메모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하거든요. 일기보다는 업무 아이디어를 기록한 거니까. 감정이 격할 때 쓴 것도 있어요. 전 술도 안 마시고, 흡연도 안 해요. 힘들 때 풀 거리가 없어서 대신 메모를 해요.” 창작의 귀신에 들린 것처럼 메모하는 그이지만, 사실은 힘듦을 토로했다. 영상 작업은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두 달이 소요된다. 일정은 겹쳐가며 계속된다. 창작이 잘되는 감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부정적인 감정 상태로 자신을 몰아붙인다. 그것이 좋지 않은 작업 방식임을 알지만, 창작을 향한 그의 열정은 너무 컸다.
적개심은 어떻게 창작이 되는가? 2000년대를 소년으로 지나온 그는 억압된 상황에 불만을 갖고 살았다. 힘든 가정과 경제 상황에서 그는 분노를 표출하고 싶었다. 글과 타투, 영상에 적개심을 담았다. “그때는 날카로웠던 것 같아요. 지금은 그런 마음을 갖지 않죠. 작업량이 많아질수록 부정적인 감정 상태로 돌아가기에 작업량을 줄이고 있어요. 새로운 제가 되기 위해서요.”
그는 2차 창작자의 위치에 있다. 폭력의 미학을 애정하는 그가 자신의 성향에 맞춰 1차 창작물을 무시하고 새로운 걸 만들 수는 없다. 그가 제임스 코든 쇼에서 BTS의 ‘Dynamite’ 퍼포먼스 영상을 촬영할 때의 일이다. BTS는 희망을 노래하기에, 권오준의 성향을 드러낼 수 없었다. 하지만 폭력적인 비주얼을 좋아하는 자신에게도 행복을 좇는 자아도 있음을 깨달은 작업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좋았어요. 제가 긍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음을 처음 깨달았죠. 영상에 개인적임 바람도 넣었어요. 프랑스에 사는 동생을 코로나19로 2년간 못 봤거든요. 비행기를 타고 등장하는 BTS를 보여주며, 우리의 일상이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담았어요.” BTS와의 작업은 전환점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권오준은 좋아하는 것을 쫓으며 살았다. 흑인 음악이 좋았고, 타투가 멋있어 보였고, 영화가 좋았다. 흑인 음악과 타투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영상을 만들다 보니 뮤직비디오 감독이 되었다. 이제는 이야기를 만들 차례다. 소재는 그의 메모에 가득 준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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