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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과 디테일

데뷔 30주년, 박찬욱은 칸 국제영화제의 수상자로 세 번째 호명됐고 감독상을 수상했다. 칸에서 돌아온 그를 파주에서 만났다. 박찬욱은 고요한 소용돌이 같은 영화 <헤어질 결심> 속 서로 다른 언어나 해변 위에 우뚝 선 바위, 벽지의 무늬, 탕웨이의 담담한 눈빛에 대해서 섬세한 애정을 털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영화에 대해 논할 때는 ‘이 영화의 주제는 뭐지’보다는 ‘그 커피잔은 무슨 색이지’가 괜찮은 시작이지요. 디테일에 모든 게 있으니까요.”

UpdatedOn June 2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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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의 첫인상으로 우선 한 폭의 동양화 같은 포스터가 아름답습니다. <아가씨> 해외 포스터를 제작한 영국 엠파이어 디자인사에서 만든 건가요?
맞아요. 그 동양적인 표현이 조심스러운 부분이기도 한데 그들이 처음에 해온 것은 확실히 우리가 보기엔 이상해요. 파도를 구현한다고 하면 무조건 가쓰시카 호쿠사이 판화의 파도를 그려온다든지 하는 식이죠. 그들도 조심하는데 어쩔 수 없는 게 있어요. 그들이 생각하는 아시아의 아름다움과 우리가 생각하는 아시아의 아름다움이 다른 거예요. 시안부터 세밀한 수정 지시까지 이메일이 수십 번은 왔다 갔다 했죠. 초상화 포스터를 만들기 위해 인물 사진을 골라도 우리와 다른 걸 고르고, 포토샵을 해도 우리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해오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출발점부터 다른 건 흥미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서로 다른 미감을 조화시켜 나가는 게 재미있거든요.

산 같기도 하고 파도 같기도 한 벽지 문양이 눈에 띕니다. 그런 정경을 보여줄 바다를 찾느라 세트를 짓는 것만큼 공을 쏟았다고도 하셨고요. 이 영화에서 산처럼 높이 솟은 것 같기도 하고, 파도처럼 일렁이는 것 같기도 한 광경은 어떤 의미인 걸까요?
굳건하게 버티는 산 이미지와 유동하며 격렬하게 압도하는 파도 이미지와의 대조예요. 서래와 해준은 극 중 이질적인 세계에 속한 두 인물인데, 대화하면서 묘하게 같은 종족임을 느끼죠. 해준(박해일) 대사를 빌리자면, 우리는 산 사람이 아니라 바다 사람이라는 거예요. 반면 서래의 남편은 산을 너무 좋아해서 서래와 갈등을 일으키곤 했죠. 여기서 공자의 ‘인자요산 지자요수’를 인용했어요.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니, 서래가 자신은 어진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하죠. 해준도 동의하고요. 형사가 용의자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나눈 대화치곤 좀 이상하죠.

산과 바다가 이 영화의 대립항인 셈이네요.
그 말이 맞아요. 원래 이 영화는 완전히 챕터가 나뉘어 있었어요. 검은 바탕에 제목이 ‘산’이라 쓰인 챕터로 시작해 중반부에 검은 바탕에 제목이 ‘바다’라 쓰인 챕터로 넘어가죠. 서래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이자 외할아버지의 유품인 <산해경>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필사하는데, 자신이 창작한 내용을 조금씩 덧붙입니다. 그렇게 긴 세월에 걸쳐 여러 사람이 덧붙이고 덧붙인 책이 되는 것이죠. 그 세계관 속에서는 산과 바다가 나뉘지 않고 우주 전체가 됩니다.

결국 그 멋진 산수를 담아낼 촬영지도 찾아내셨고요.
그랬죠. 영화 속 중요한 무대인 해변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놓여 있어요. 커다란 산을 미니어처로 만든 것처럼 독특하게 생겼죠. 이 바위는 서래의 남편이 떨어져 죽은 암벽 산을 연상시켜요. 우린 그걸 산 모양 바위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자리한 해변은 동쪽에 있고, 마지막에 낙조가 있는 해변은 반드시 서해안에서 찍어야 하니까 그것을 편집상 한 장소인 것처럼 꾸몄죠.

감독님 영화의 미술은 늘 아름답죠. 그 속에서도 벽지의 디테일이 새삼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감독님 덕에 영화과 학생들이 벽지를 사들이고 있다고. (웃음)
류성희 미술감독 덕이지요. 다 직접 디자인해서 프린트한 겁니다. 벽지를 왜 사요. 만들면 됩니다.(웃음)

어찌됐든 감독님의 영화가 아름답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처럼 느껴집니다. <아가씨>의 코우즈키,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 대사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엄격한 기준이 언뜻 드러나죠. 물론 그 대사가 곧 감독님의 생각은 아니겠지만.
물론요. 전혀 아니지요.

그렇다면 감독님에게는 어떤 것이 아름답나요?
지금 떠오르는 것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 동진(송강호)이 해고한 팽 기사(기주봉)의 집이네요. 해고 노동자의 가난한 집이지만 자본가 동진의 집보다 훨씬 아름답죠. 없는 살림이지만 오랜 세월 가꾸고 꾸려 나간 그 집의 정경이 동진 집의 휑하고 공허한 풍경보다는 아름답지 않나요? 반면 <올드보이>에서 이우진(유지태)이 마음껏 낭비해가며 구성한 인테리어도 아름다울 수 있겠죠. 아름다움은 고정된 것이 아니니까요.

저는 감독님 영화에서 비감에 잠겼을 때 종종 발작적으로 터져 나오는 유머도 좋아합니다. 감독님은 무엇을 웃기다고 생각하나요?
말씀하신 것처럼 예상되지 않는 상황에서 웃음이 유발되는 것. 그런 장면이 제겐 소중하고 필요합니다. 저도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 웃기는 합니다만, 제가 하고 싶은 유머와는 다르죠. 저는 슬프거나 무서울 때,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웃음이 자리할 때 좀 더 인간 삶의 총체성이 완성된다는 기분이 들어요.

오래전 <복수는 나의 것>이 얼음의 영화라면 <올드보이>는 불의 영화라고 하신 적이 있지요. 전작에서 채우지 못한 동력으로 차기작으로 나아간다고요. 그렇다면 <헤어질 결심>은 전작들에서 어떤 동력을 얻었나요?
전작은 <리틀 드러머 걸>, 그 전작은 <아가씨>였네요. 일단은 원작에서 벗어나고 싶었고요.(웃음) <리틀 드러머 걸>의 후반 작업을 할 때 정서경 작가가 가족과 함께 여행을 왔는데, 애들은 아빠에게 맡겨놓으라 하고 카페에 앉아 정색하고 이야기를 했어요. 이번엔 오리지널 스토리를 만들고 싶다고. <리틀 드러머 걸>의 찰리(플로렌스 퓨)는 아주 무모하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그의 젊음이 이 작품에선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혁명의 분위기가 채 가시지 않은 분방하고 에너지 넘치는 시대상, 젊음의 열기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죠. 강렬한 원색을 썼어요. 패턴이고 뭐고 없이 통째로 ‘블록 컬러’를 썼죠. 이번엔 그런 젊음과는 반대로, 서래의 캐릭터는 성숙하고 침착해요. 그 안에 담긴 에너지는 찰리 못지않게 무모하리만큼 대담하지만, 표현은 절제되어 있어요. 차분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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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을 불과 물에 비유하셨듯이, 이번 영화는 어떤 이미지로 은유해볼 수 있을까요?
이런 이미지가 떠오르네요. 소용돌이요. 영화 속에 파도가 휩쓸려 가는데 그 안에 웅덩이 속에서 물이 요동치는 클로즈업이 있어요. 실제로 물리적으로 소용돌이를 만들었고, CG로도 강조했죠. 그 소용돌이가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느꼈어요. 한 번 휩쓸리면 헤어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는 운명의 힘 같기도 하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이 영화를 두고 히치콕의 <현기증>을 떠오른다고 하는 것이, 형사가 신비의 여인을 미행하는 이야기여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소용돌이 이미지 때문일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해요. 겉으로는 침착하지만, 내면에서는 들끓는 소용돌이 같은 것이죠.

히치콕 <현기증>뿐 아니라 클로드 샤브롤의 <도살자>가 떠오르는 로그라인이기도 하지요. 감독님의 영화가 늘 그러하듯 장르의 관습을 배반하며 나아가리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죠. 영화가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1부는 확실히 그런 면이 강해요. 서래가 전형적인 팜므파탈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흘러가다가, 2부에서 그런 생각이 완전히 깨지죠. 일종의 오도로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게 장르의 관습이 깨지고 전혀 다른 성격의 러브 스토리로 변모하죠.

팜므파탈로 오인된 여성이 신비화되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주체적으로 끌고 나간다는 것. 돌이켜보면 <친절한 금자씨> 이후로 감독님의 영화에선 여성이 서사를 추동하고 있습니다.
정서경 작가 때문이죠.(웃음) 내가 정서경 작가를 필요로 하게 된 건 여성 중심의 서사 때문이고요. 그녀와 작업하며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렇다고 내가 무슨 사명감을 가지고, 세상 모든 이야기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겠다고 그러는 건 아녜요. 단지 나 자신이 관객으로서 남자들의 이야기에 물렸다고 할까요. 여성 중심의 이야기에 좀 더 할 얘기가 많이 남아 있어요. 창작자로서 더 재료도 많고 풍족한 시장인 거죠.

미도, 금자, 태주, 영군, 미아, 히데코와 숙희, 찰리, 서래. 감독님의 연출을 거친 여성 배우들은 유독 매력적입니다. 스크린에 맺힌 그들의 눈빛을 잊을 수 없게 되죠. 어떻게 하면 배우 고유의 특질을 그토록 영화 속에 잘 살려내는지 궁금한데요.
단순해요. 그만큼 영화 산업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여성 배우와 여성 캐릭터가 덜 탐험됐다는 뜻이에요. 나는 남성 캐릭터와 여성 캐릭터를 같은 방식으로 다루었는데 유난히 여성 캐릭터가 더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는 것은, 그동안 영화 속에서 여성의 감정과 욕망을 직시하고 드러내는 표현, 탐구가 많이 부족했다는 거죠.

“특별한 조명이나 촬영 없이 순수하게 연기와 대사와 편집만으로
만든 장면인데요. 그 한순간 한순간의 표정, 그리고 서래의
한국어가 너무나 사랑스럽고 또 슬프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 감독님이 아끼는 연기를 꼽아본다면 어떤 장면인가요?
서래가 시체 사진을 보다가 해준에게 툭 던지듯 개미가 사람을 먹냐고 물어요. 해준은 경험 풍부한 형사답게 사람이 죽으면 몇 분 안에 무엇이 어떻게 되어서 아주 파티가 벌어진다고 설명해주는데요.(웃음) 그걸 듣는 탕웨이의 연기가 너무 무심하면서도 캐주얼해요. 깜짝 놀랐어요. 내가 말을 안 했는데도 어쩌면 그리 의도를 잘 파악하고 있을까 감탄했죠.

해준은 스웨덴 추리소설의 주인공 ‘마르틴 베크’를 닮은, 내성적이고 청결하며 섬세한 형사입니다. 남성들이 로망을 가지는 LA의 추리소설 ‘필립 말로’ 같은 마초적인 탐정과 상반되는 인물이죠. 왜 이런 인물을 만들고 싶었습니까?
나는 자신이 하는 일에, 직업에 긍지를 가진 사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야 그것을 사랑 때문에 스스로 무너뜨려야 할 때 도덕적 딜레마가 커지고, 갈등이 커지는 법이니까요. 그렇다면 긍지 높은 형사는 어떤 모습일까요? 물론 마초적이고 거칠고 폭력적인 형사도 자부심이 커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가 생각한 긍지는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시민에게 봉사하는 공무원이다’라는 직업 의식에서 비롯된 자부심이었어요. 시민에게 친절하고, 격식을 갖추고, 예의를 갖추기 위해 수트를 입고 넥타이를 하는 것 - 그럼에도 뛰어다녀야 하기에 구두와 비슷한 검은 운동화를 신는 것 - 이 최소한의 도리라고 여기는 성격이란 말이죠. 그는 변사자가 오른 험한 암벽등반 코스를 그대로 올라가봐야 한다고 할 정도로 고지식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남편이 어제 죽었어도 나는 오늘 일을 나가 노인들을 돌봐야 한다는 간병인 서래를 후배 형사는 이상하다고 하지만, 해준은 멋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감독님도 상당히 꼼꼼하고 청결하신 걸로 아는데⋯ 감독님과 닮은 면도 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웃음)

지금까지 만들었던 작품 중에 감독님의 어떤 모습을 따왔다거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닮은 구석이 있다거나 하는 인물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나는 그런 유형의 창작자는 아니에요. 스스로를 투영해서 만들고자 한 캐릭터는 없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리틀 드러머 걸>에서 마이클 섀넌이 연기한 요원 마틴이 비슷한 면이 있네요. 자신이 쇼의 각본가이자 연출자, 프로듀서라고 말하는 점이 말이에요. 나의 직업적인 면이 그 캐릭터에 투사되어 있습니다.

중국어가 모국어인 탕웨이가 한국어로 소통하며 보면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간극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나요?
우선 탕웨이를 캐스팅하기 위해 여성 주인공을 중국인으로 설정했습니다. 순서는 그래요. 거기서 발생한 좋은 점은, 외국인으로서 한국인 캐릭터와 차이가 생기고, 그 대조 안에서 드라마가 더 좋아지는 거죠. 외국인 캐릭터는 늘 유리한 점이 있습니다. 또한 이 캐릭터는 한국어를 잘하지만 발음도 억양도 단어 선택도 조금씩 낯설어요. 우리가 무심코 사용한 단어도 저 사람 입을 통해 들으니 객관화되면서 다시금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거죠. 영화 속에서 ‘마침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사용되는데, 일상생활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이 어휘를 자꾸 떼어서 말하니까 심오한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낯설게 하는 효과 외에도 다양한 용법을 썼습니다. 서래는 답답할 때 한국어를 포기해버리고 통역 어플을 쓰는데, 여기서 감정과 뉘앙스는 모두 빠진, 아주 건조하고 플랫한 톤의 성우 목소리로 대사가 전달되어 기묘한 인상을 주죠. 중요한 대사를 중국어로 말해버리고, 그걸 자막 처리해 관객에게만 보여주기도 합니다. 또한 중국어로 열변을 통할 때, 한국 관객은 속수무책으로 무슨 뜻인지 모른 채 그녀의 얼굴과 표정에만 집중해서 보다가 나중에야 그 뜻을 알게 되고, 머릿속에서 합쳐야 합니다. 이렇게 의도된 지연 효과는 능동적인 관람으로 이어지죠.

다른 언어로 연기한다는 것은 음운적으로도, 음성적으로도 효과가 있네요.
그렇죠. 해준도 중국어를 독학해서 서래와 대화를 시도하는데, 아직 초보니까 한 마디 할 때마다 수줍어합니다. 자신이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 관계에서 우열 관계가 뒤집어지는 순간이죠. 서로 다른 언어로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본 것 같네요.(웃음)

이 영화는 해외 영화제의 수상보다도 한국 개봉 시 결과가, 한국 관객이 어떻게 봐주실지가 궁금하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네요.
그렇죠. 한국어를 쓰지 않는 외국인은 ‘저건 한국어가 서툴러서 잘 안 쓰는 단어를 쓰는 장면이구나’라는 걸 감 잡을 수 있겠지만 정확한 뉘앙스까지는 전달받기 어려워요. 한국어를 쓰는 관객이 이 영화를 가장 정확하게 봐줄 수 있기에 궁금한 겁니다.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이후로 오랜만에 선보인 청소년 관람가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경계심을 풀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좋습니다.(웃음) 해외 판매가 많이 되어서 극장 수입은 그렇게 높지 않아도 손익분기점은 맞출 수 있지만, 그래도 많은 분들이 봐주셨으면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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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은 어쩐지 흥행에 초연할 것 같은데, 의외이기도 한데요.
아니에요. 윤제균, 김용화 감독 못지않게 관심 있어요.(웃음)

오래전 영화 잡지 <키노>에서 신인 박찬욱에게 던졌던 질문을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해보고 싶습니다. “당신 영화에서 외부의 평가와 상관없이 ‘나만의 장면’이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당시엔 <3인조>의 언해피한 해피 엔딩을 꼽았습니다.
<박쥐>에서 태주(김옥빈)를 죽였다가 되살리는 장면이에요. 아이코닉하다고 생각합니다.

“태주 씨, 해피 버스데이.”
네, 그 장면이요. 그리고 이번 <헤어질 결심> 2부에서 해준이 서래를 심문하는 장면을 꼽겠습니다. 특별한 조명이나 촬영 없이 순수하게 연기와 대사와 편집만으로 만든 장면인데요. 그동안 쌓아 올린 드라마와 구축해온 성격이 여기서 빛을 발하죠. 그 한순간 한순간의 표정, 그리고 서래의 한국어가 너무나 사랑스럽고 또 슬프기도 합니다.

창작자인 동시에 매섭고 빼어난 비평가죠. 요즘 눈여겨보는 젊은 감독이 있습니까?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작품으로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을 수상한 <좋은 사람>을 아주 재미있게 봤어요. 정욱 감독이라고 첫 장편 데뷔작이더군요. 대니얼 콴, 대니얼 셰이너트 두 친구가 ‘대니얼스’라는 이름으로 같이 만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도 한번 봐보세요. 골 때리는 영화인데, 양자경이 주연이고 멀티버스를 배경으로 하는 SF 코미디예요. 좀 미쳤어요. <스위스 아미 맨>이라는 시체가 나오는 이상한 영화 아시죠? 그 영화를 연출한 감독들의 작품이에요.

B무비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시군요. 문화예술에 관해서라면 파인아트든, 대중예술이든, 서브컬처든 왕성하게 섭취하는 소비자이기도 합니다. 요즘 영화 외에 흥미를 가진 작품이 있나요?
극작가 김도영의 <금조 이야기>. 네 시간짜리 희극이에요. 특이하게도 젊은 친구가 전쟁과 일제강점기의 민중 수난에 관심이 깊어 계속 그 문제를 파고들고 있어요. 연극이라서 가능한 초현실적인 기법을 써서 보통 사람들의 삶에 다가가죠.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또한 개그우먼 김신영 씨나 댄서 모니카를 섭외하는 등, 유연한 태도로 작품을 대하신다는 인상입니다.
김신영은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행님아 때부터 오랫동안 섭외를 별러왔습니다. 그리고<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모니카는 누가 봐도 멋지잖아요?(웃음) 영화 또한 대중예술인데 지나치게 엄숙한 태도로 대할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차기작은 HBO 시리즈 <동조자>입니다. 베트남전 직후 미국과 베트남 사이 첩자를 했던 남자의 이야기죠.
내가 이 작품에 흥미를 느낀 건 한국의 분단, 국가 이념, 대립, 내전이 베트남과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이었어요. 또한 아시아적인 사고방식과 가치와 미국적인 것과의 충돌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죠. 다층적인 이야기가 될 겁니다.

이전에 일생의 프로젝트라고 말씀하셨던 <도끼>도 언젠가는 영화로 만나볼 수 있을까요?
포기하지 않고 있어요. 아마 죽을 때까지 포기는 안 할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원하는 만큼 예산이 주어져야죠.(웃음) 이를테면 내가 1만원이 필요한데 누군가가 5천원만 갖고 찍어보라고 하면, 저는 안 하려고 해요. 그럴 기회는 많이 있었지만요. 최소한의 것은 지키면서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찬욱 감독님은 무엇을 믿나요?
디테일에 모든 게 있다. 모든 창조적인 대화, 실질적인 업무에서 사용하는 모든 단어는 데이터에서 출발해야 해요. 이를테면 내가 정서경 작가나 류성희 미술감독과 앉아서 “이 영화의 주제는 뭐지” 이렇게 출발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보단 “이 커피잔은 무슨 색이지?”가 괜찮은 시작이죠. 배우들과 이야기할 때도 “이 사람은 굉장히 종교적인 사람이에요”라고 대화를 시작할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넥타이를 매는 타입이에요”라고 하는 식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저는 그런 디테일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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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람은 굉장히 종교적인 사람이에요’라고 대화를 시작할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넥타이를 매는 타입이에요’라고 하는
식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저는 그런 디테일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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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Guest Editor 이예지
Photography 정철환
Location 황인용 뮤직 스페이스 ‘카메라타’

2022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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