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처럼 국적에는 프리미엄이 존재한다. 자동차가 독일 브랜드면 괜히 더 근사해 보인다. 의자 하나도 ‘메이드 인 이탈리아’ 라벨이 붙는 순간 비싸진다. 시계는 역시 스위스 제품이 최고다. 이런 국적 프리미엄은 직업인에게도 적용된다. 한국 아이돌, 프랑스 파티시에, 케냐 마라토너 등이다. 축구에서는 더 세분화된다. 브라질 공격수, 네덜란드 미드필더, 이탈리아 수비수처럼 포지션별 프리미엄이 존재한다. 한국인 윙어? 글쎄 .
지금 손흥민은 최고의 시즌을 보내고 있다. 현재(5월 14일 기준) 프리미어리그 20골 고지를 밟았다. 세계 최고 인기 리그에서 21골로 득점 랭킹 2위다. 1위 모하메드 살라(리버풀)와 한 골밖에 차이가 없다. 시즌 하반기 들어 살라는 주춤하고 손흥민은 펄펄 날고 있어 득점왕 등극에 대한 기대가 커진다. 프리미어리그 한국인 득점왕이라니 상상만 해도 흥분된다. 그런데 여전히 손흥민은 과소평가받는다는 인식이 존재한다. 국내 팬들로서는 ‘도대체 얼마나 더 증명해야 하는 거니?’라는 불만을 품을 만하다. 손흥민의 현지 기량이 ‘월드 클래스’라는 사실에는 이견을 달기 어렵다. 최근 토트넘과 1-1로 비긴 리버풀의 위르겐 클롭 감독은 “월드 클래스들을 갖고 있으면서 수비적으로 경기를 운영하다니!”라고 불평했다. 선수를 특정하진 않아도 그 ‘월드 클래스’가 손흥민과 해리 케인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뻔하다. 지난 시즌 손흥민은 리그 17골 10도움, 시즌 22골로 모든 면에서 커리어하이를 찍었다. 올 시즌 그걸 뛰어넘는 중이다. 시즌 종료까지 2경기가 남은 상태에서 손흥민은 리그 득점을 이미 4골 경신했다. 시즌 득점도 22골에 도달했다. 손흥민의 리그 득점 수는 페널티킥이 없어서 더 큰 칭찬을 받는다. 더 놀라운 통계가 있다. 왼발 득점 수다. 올 시즌 리그 왼발 득점 순위표에서 살라가 18골로 1위에 있다. 손흥민은 왼발로 12골을 기록해 2위에 올랐다. 그 뒤로 리야드 마흐레즈(11골), 부카요 사카, 하피냐(이상 10골)가 있다. 눈치챘겠지만, 다섯 명 중에서 손흥민만 오른발잡이다. 양발 사용자가 희귀종은 아니어도 손흥민처럼 반대 발로 골을 더 많이 넣는 사례는 거의 없다.
축구계의 실물경제에 해당하는 이적 시장은 이미 손흥민의 가치를 정확히 안다. 웹사이트 ‘트랜스퍼마르크트’는 손흥민의 이적 가치액을 8천만 유로(약 1천77억원)로 매긴다. 전 세계 축구 선수 중에서 13번째로 비싸다. 압도적 몸값인 킬리앙 음바페와 에를링 홀란을 제외하면, 사실상 그다음 가격대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올해 34세인 리오넬 메시(6천만 유로)는 물론, 소위 세계적 스타인 티보 쿠르투아, 버질 판다이크, 은골로 캉테보다 비싸다. 이적료를 결정하는 요인은 다양하다. 3대 변수는 나이, 기량, 남은 계약 기간이다. 나이가 어릴수록, 남은 계약 기간이 길수록 가격이 상승한다. 손흥민은 올 7월 만 30세가 된다. 몸값 산정에서 불리해지는 연령대에 접어들었다. ‘트랜스퍼마르크트’ 이적 가치 상위 25인 중 손흥민보다 나이가 많은 선수는 1991년생 케빈 더브라위너뿐이다. 모하메드 살라, 사디오 마네, 네이마르는 생일만 빠를 뿐 손흥민과 1992년 동갑내기다.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이들은 나이의 마이너스 변수화를 압도적 경기력으로 만회한다. 선수 비교군을 아시아로 줄이면 손흥민이 얼마나 ‘넘사벽’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아시아 1위는 당연히 손흥민이다. 최근 레버쿠젠으로 이적한 이란의 사르다르 아즈문(27세)과 아스널의 풀백인 토미야스 다케히로(23세)가 그 뒤를 따른다. 둘 다 2천5백만 유로(약 3백36억원)로 손흥민의 30% 수준이다.
그런데 왜 유럽 현지 여론에서 손흥민은 여전히 과소평가될까? 두 가지 원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우선 타이틀이 없다. 축구는 기록보다 기억에 의존한다. 세상은 손흥민이 90분당 비페널티킥 득점이 0.6골로 리그 1위라거나 유효슛 비율이 52. 6%나 된다는 식으로 세세히 기억하지 않는다. 팬들의 기억 코드는 딱 두 개다. ‘골을 펑펑 터트렸다’ 그리고 ‘우승했다’다. 특히 축구는 팀 스포츠다. 팀의 우승 여부가 가장 중요하다. 압도적 기량의 결과물이 팀 우승이어야지 UEFA챔피언스리그 출전권 순위라면 팬심을 강하게 움켜쥐기 어렵다. ‘트랜스퍼마르크트’ 상위 25인을 다시 보자. 메이저 타이틀이 없는 선수는 손흥민과 케인, 데클란 라이스(웨스트햄), 잭 그릴리시(맨체스터시티) 4인이다. 나머지 21인은 전부 우승 경력을 보유했다. 공격 단짝인 케인도 팀 우승이 없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이라는 확실한 훈장이 3개나 된다.
두 번째 과소평가 원인은 국적이다. 손흥민은 축구 변방 아시아 그리고 대한민국 출신이다. 아시아에 사는 45억 명은 손흥민이 지금 자리에 갔다는 사실 자체가 어마어마한 성취라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유럽 축구계와 언론, 팬들은 그런 업적에 공감하지 않는다. 같은 기량이면 자국 선수, 최소한 축구 강국 출신자를 더 쳐준다. 앞서 소개한 라이스와 그릴리시의 국적이 만약 동유럽 어딘가였다면 저런 몸값 산정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트랜스퍼마르크트’ 상위 25인의 국가 중에서 대한민국의 FIFA 랭킹(29위)이 가장 낮다. 월드컵처럼 세계 대회에서 승보다 패가 많은 국가대표 선수는 심정적 고평가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손흥민이 갖춘 조건을 보자. 축구 변방 출신이다. 나이는 곧 30세다. 축구를 하면서 지금까지 의미 있는 타이틀을 딴 적이 한 번도 없다. 득점왕, 올해의 선수 같은 개인 타이틀도 없다. 그런데 이적 시장에서 몸값이 1천억원이 넘어간다. 불리한 조건이 한두 개가 아닌데 몸값이 전 세계에서 13번째로 비싸다면, 그 자체가 손흥민의 진가를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다. 측면에서 뛰는 윙어이면서 유럽 빅5 리그에서 지금까지 178골이나 터트렸다. 아시아 축구에서 이런 선수 다시는 나오기 어렵다. 과소평가라는 감정 소모를 멈추고, 손흥민의 최전성기를 마음껏 즐기면 된다. 그거, 축구 팬들에겐 대단한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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