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좀 클리셰이긴 한데, 영화를 보면 피 끓는 지점이 있다. 특히 전쟁 영화. 결전을 앞둔 왕의 비장한 각오는 가슴 속 뜨러운 무언가를 건드린다. 오그라들 수도 있는데, 나는 아직 순수해서 그런지 목숨을 던지자는 왕의 외침이 좋다.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에서 ‘맛탱이’ 간 로한의 군주 세오덴이 반지배송팀의 노력으로 정신을 차린 다음 기마병 앞에서 결전을 각오하며 외친다. “일어나라, 세오덴의 기사들이여!” 멋있지 않나? 드라마의 절정을 팔팔 끓이는 촉매 아닌가? 나만 그런가? 그럼 이건 어떤가. 좀 더 긴 버전을 꼽자면,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위 워 솔져스>에서 참전을 앞둔 병사들에게 멜 깁슨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전투에 투입되면 내가 먼저 적진을 밟을 것이고, 마지막 적진을 나올 것이며, 한 명도 내 뒤에 남겨두지 않겠다.” 이것도 오글거린다고? 멜 깁슨이 말해서 그렇다. 짧고 명쾌한 버전도 있다. <글래디에이터>에서 로마 북부군 군단장 막시무스 데시무스 메리디우스는 뜸들이며 기다리다, 마침내 게르만족이 선을 넘자 기마대와 함께 돌격하며 외친다. “로마에게 승리를!” 살육이 난무하는 아수라를 향해 달리는 막시무스와 반려견. 개는 말이 없듯, 막시무스도 말없이 칼을 휘두른다. 참으로 비장하다. 영광이란 무엇이길래 누워 있는 시청자가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드나.
영광은 우크라이나도 원한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의 연설이 뉴스로 전송되고 있다. 연설은 전 세계로 번역되어 모든 사람이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게 전해진다. 개전 12일이 지난 3월 7일 집무실 첫 연설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렇게 입을 뗐다. “월요일은 힘든 날이라고들 한다. 우리나라에 전쟁이 벌어져서 매일이 월요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낮밤이 그렇다는 사실에 익숙해졌다.” 이 첫 문장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나와 상관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귀 기울이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월요일이 무엇인지 알고, 매주 체감하고 있어서다. 나도 월요일이 힘들다. 연설은 담담하게 이어졌다. 대통령은 의사, 외교관, 언론인, 운전수들을 영웅으로 칭송했고, 러시아군과 맞서는 국민은 우크라이나인다움을 보여줬다고 평했다. 그리고 “한 가지 말하겠다. 나는 여기 키이우에 있다. 숨어 있지 않다. 누구도 두렵지 않다”고 강조했다. 또한 국민에게 물러서지 말라고, 우크라이나인은 물러서지 않는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마감 중인 회사원도 움찔거릴 숭고한 워딩을 젤렌스키 대통령은 매일 전한다. 그의 말에 깃든 울림이 서방세계 사람들을 동하게 만들었다.
피가 끓어서 우크라이나로 달려간 서방세계 민간인들이 많다. 용병이라거나 전직 군인이라거나, 의용심 넘치는 사람이거나. 그들의 행동이 옳냐고? 옳고 그름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다. 죽은 자에게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비난하면 뭐 하나. 인권을 위해, 정의를 위해, 평화를 위해 등등 참전 이유는 다양하다. 일상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느끼지 못해 크림반도로 달려간 퇴역 군인도 있을 거다.
민간인이 참전하는 이유는 우크라이나 지도부가 러시아의 침공에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전쟁의 중요한 점이다. 침공에 맞서자 많은 사람들이 언더도그의 편에 섰다. 무엇이 현명한 결정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항복했다면 이 전쟁으로 죽은 수천 명이 살아 있을 거다. 터전이 파괴되지도, 피난 가지도 않았을 거다. 그러나 항복했다면 우크라이나는 영혼을 잃었을 거다. 우크라이나 지도부는 의미 있는 삶을 선택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처럼 행동하는 지도자를 본 적 없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 세대에는 있었겠지만, 나는 못 봤다. 전선에서 국민과 함께하는 통수권자는 판타지 세계인 ‘로한’에나 있다. 엑스칼리버를 뽑아 든 신화에나 존재한다. 그래서 젤렌스키 대통령의 존재는 비현실적이다. 전쟁 21일을 맞은 지금도 그는 항전 의지를 다지고 있다. 같은 시기 국내에선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과정도 결과도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선거는 끝났고, 리더가 바뀌었다. 정권이 교체되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전과 같은 방식으로 꿈틀거린다. 가짜 뉴스의 전파력은 강력하고, 휩쓸린 사람들은 분개하며,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거리로 나선 사람들은 호소한다. 풍경은 전과 다름없다. 새로운 대통령을 보며 리더에 대해 생각했다. 국가 단위의 리더는 아니다. 작은 집단에도 리더가 필요하니까. 학교나 직장의 리더들을 떠올렸다. 어떤 리더가 좋은 리더일까? 아니 다시 질문한다. 나는 누구를 따르고 싶어 했나?
믿을 수 있는 사람, 그러니까 책임지는 리더를 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행동은 리더의 책무가 무엇인지 환기시킨다. 리더의 선택이 실패할 수 있다. 리더가 제시하는 방향이 비합리적일 수도 있다. 피해를 보거나, 팀원들이 그 선택을 싫어할 수도 있다. 그럼 반발하겠지. 그때 리더는 어떻게 해야 하나? 원칙을 고수해? 원칙만 고수하다가는 독불장군 되기 쉽다. 팀원의 의견이 기우는 쪽을 선택해야 할까? 다 함께 기울어져? 글쎄. 선택은 상황을 따르고, 상황은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결과가 어떠하든 선택했다면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그 리더가 나라면? 내가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라면? 함께하고 싶은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가 된다면 좋을 거다. 혜안을 가진 리더. 얼마나 듬직한가. 상황에 맞는 합리적인 판단으로 모두에게 이로움을 선사하는 팀장. 좋다. 정치적인 이유로 흔들리지 않고 팀원이 동의한 원칙을 지킬 줄 아는 뚝심도 갖춘 리더.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모두가 만족하는 선택이란 없다. 공리주의적인 판단을 내리고 싶지만, 그런 선택을 상상해낼 능력이 있는가? 솔직히 모르겠다.
우리는 젤렌스키라는 비현실적인 존재를 목도했다. 상반된 성격의 리더들이 경쟁하는 대선도 지켜봤다. 방송에서 여러 종류의 리더들을 보았고, 비난했고, 훈수 뒀다. 그럼 나는? 나도 어디선가 리더가 된다. 책임은 미약할지라도 선택해야 할 상황에 놓인다. 그전에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나는 저들보다 나은 리더인가? 집단의 영혼을 지킬 만한 용기를 가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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