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표면에 그칠 뿐”이라던 16세기 영국 시인 토마스 오버베리의 구절이 감상자의 시각이라면, 창작자 입장에서 이를 변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표면을 가꾸는 데 집중하고 아름답지 않은 건 그 안에 숨기자.’ 모든 디자인의 역사는 이 원칙에 따라 발전해왔다. 보이지 않는 것은 으레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으며, 디자이너들은 오롯이 표면의 아름다움에 집중했다. 건축에서 이 도식은 간단하다. 구조는 빈틈없이 감추자. 그리고 아름다운 외장을 갖추자. 구조재인 콘크리트는 당연히 아름답지 않은 재료였다.
1950년대 영국에서 시작한 브루탈리즘은 이 도식을 거부하는 데서 출발했다. 아름답지 않은 속을 그대로 겉에 드러내는 사조다. 어원 자체가 ‘가공되지 않은 콘크리트(béton brut)’라는 의미를 지니듯, 숨겨져야 마땅한 콘크리트를 ‘노출 콘크리트’라고 일컫는 돈호법이 여기 있다. 그렇기에 브루탈리즘을 대표하는 건축물인 바비칸 센터의 건축 투어 프로그램은 이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 건물 못생긴 것 같으세요? 아님 아름다운 것 같으세요?” 당장 철거를 요구받던 도시의 흉물로서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다움의 일종으로 보게끔 한 사조였던 만큼, 아름답다는 대답이 마냥 반갑지만도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유행하는 노출 콘크리트 공간들은 이 역사적 사례를 빌려온다. 안도 타다오를 따라 충분히 익숙해진 노출 콘크리트 건물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1950년대 사람들에게 브루탈리즘이 준 충격만큼이나 ‘설마 이게 완공된 게 맞다고?’를 되묻게 하는 공간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한 공간 옆으로는 마치 반 세기 전에도 그랬듯, 이 공간도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마케팅 문구가 눈에 띈다. 과연 절대적 아름다움 대신 ‘취향 존중’이 미적 규범이 되고, 싫든 좋든 새로운 것이 중요한 미덕이 된 인스타그램 시대에 어울리는 설명이다.
그러나 한 번쯤 ‘카페를 해볼까’를 상상해본 사람은 안다. 오늘날의 브루탈리즘, 이른바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의 유일한 근거는 예산 절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공간을 정리 정돈하는 것도, 새로운 디자인을 덧붙이는 것도 다 돈이다. 단지 기존 재료를 제거한 것만으로 새 디자인을 완성할 수 있으니 무척이나 간편하다. 애초에 불편을 전제하는 콘셉트인 덕에 추가적 문제에 대응하는 발생 비용의 처리까지 효율적이다. 브루탈리즘의 선구자인 피터 스미스슨은 건축이 자연과 같아지는 방법을 고민하며 ‘자연은 일방향이 아니라 무분별하게 형성되는 것’이라는 관점을 견지했는데, 지금 시대에 등장하는 브루탈리즘이란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자연의 논리를 철저하게 일방향으로 따르는 모양이다. 더 쉽게, 더 싸게, 더 편하게.
겉모습은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상호 간 괴리가 적지 않다. 한쪽의 아름답지 않음이 아름다움에 대한 고찰로부터 귀결된 것이라면, 다른 쪽은 돈이라는 가치 기준을 일단 따른 다음 관련 논의를 갖다 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제대로 노출 콘크리트를 타설하면 다른 재료로 마감하는 것만큼이나 드는 비용이 엇비슷하다. 그렇지만 인테리어는 건축법의 규제를 제대로 받지 않는다는 업계 특성을 살려, 대부분 해당 공법의 기본적인 것들을 어기면서 허울뿐인 디자인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러니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라는 주장 자체를 신뢰할 수가 없다. 오늘날 유행하는 노출 콘크리트 인테리어와 건축적으로 발전해온 논의들을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하는 게 불가능한 이유다. 둘은 재료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르다. 일련의 마케팅 문구와 잘못조차 인스타그램 감성으로 수용되어 소비되는 모습에 큰 문제를 느낀다. 기존 담론에 오해를 만드는 것은 물론, 안전 문제를 포함한 기본적인 공간 설계의 원칙조차 지켜지지 않은 사례를 종종 보기 때문이다. 원칙은 애당초 살펴보지도 따르지도 않는 게 관례이며, 일시적으로 돈이나 벌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 만연하다. 비용만을 우선순위로 삼은 이들, 그리고 전문성을 갖추지 않은 업자들로 가득한 시장이 약속하는 퀄러티란 없는 셈이다. 자칭 디자이너는 늘었으나 기본을 준수하는 일은 더 줄어들었다.
따라서 표면적인 재료의 공통점만으로 논의를 건축에서의 노출 콘크리트에 대한 담론으로 옮길 게 아니라, 차라리 재료를 다루는 방식과 태도를 가지고 오늘날 인테리어의 맥락에서 이야기해보는 게 적합해 보인다. 노출 콘크리트가 아닌 다른 재료를 가지고서도 규제를 피해가며 눈가리고 아웅하는 사례가 수없이 많다. 공간의 실체와 무관하게 한 줄짜리 마케팅 문구로 포장하면서 말이다. 노출 콘크리트를 어떻게 다루었든 그것의 일차원적 속성만 가지고 곧장 브루탈리즘의 논의로 환원해버리듯, 한 마디 마케팅 문구와 한 줄 방문 후기만을 위해 생산되고 소비되는 공간들이 오늘날 인테리어의 거대 집합을 이루고 있다. 건물 내외부를 모두 노출 콘크리트로 설계하는 발레리오 올지아티는 9년 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다. “마케팅에 의해 물건의 가치가 결정되는 현대사회를 신념처럼 주장하는 이들은 믿음직스럽지 않다.” 현대인이라면 으레 공간조차 콘텐츠의 일종으로 교환되고, 마케팅에 의해 가치가 결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을 신념 삼아 생산하고 소비하는 일은 또 다른 문제다.
표면과 내면, 아름다움과 아름답지 않음을 고민한 끝에 등장한 노출 콘크리트의 담론을 차마 오늘날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공간들에 대입하기란 불가능하다. 이 공간들이 담고 있는 것은 재료의 고유한 표면이 아니라, 그것을 재차 허울로 감싸버린 ‘포장으로서 표면’이기 때문이다. 감성으로, 분위기로, 어디선가 베껴온 마케팅 문구로 포장한 것이 일련의 표면을 이룬다. 애써 교훈을 찾자면 이런 것일까. 역사적으로 늘 내장되어 있던 콘크리트가 노출됨으로써 ‘표면적 아름다움만 좇던’ 사회의 가치를 재고하게 해주었듯, 공간의 표면조차 보정된 이미지와 허울뿐인 텍스트라는 ‘또 다른 표면’으로 포장되어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 사회가 찾는 가치를 되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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