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서사는 주인공이 죽어야만 하는가
다소 진부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자기의 시대 앞에서 드라마의 소명은 자기 나라에서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을 미리 스펙터클하게 감상하게 하는 일이다. 아마 다소 앞서 있기 때문에 그 스펙터클을 누구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는 일, 그래서 그럴 리가 없는 장면을 할 수 있는 한 그럴듯하게 보여주면서 대중이 안심하고 저건 뻥이야, 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명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건 물론 말할 필요도 없이 이제 곧 벌어질 일을 미리 예행 연습시키는 것이다. 하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처음 맞이한다면 얼마나 놀라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같은 상황을 두 번 살게 된다. 한 번은 바깥에서, 다음 한 번은 그 안에서. 그때 여기서는 옛 선현의 말씀을 살짝 바꿔놓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한 번은 희극으로, 다음 한 번은 비극으로. 오늘날 고상한 예술가들이 향수에 젖어 있다면 돈맛에 들린 또 다른 예술가들이 예언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약간만 뒤로 되돌아가겠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2년 혹은 3년 전 부산영화제에서 해외영화제 프로그래머, 기자들, 비평가들이 늦은 밤에 모여 비공식적으로 술을 마시는 자리에 갔다. 내가 영화평론가라는 걸 알자 그중 한 명이 내게 (절반은 농담을 하는 말투로, 하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최근에 제가 본 한국영화는 전 세계 어떤 나라 영화와도 다른 특징이 있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주인공이 분노조절장애라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한번 뚜껑이 열리면 둘 중 하나예요. 다 죽어야 끝나든지 아니면 주인공이 죽어야 끝나요. 정말 무서워요.” 상대방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나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오싹해졌다. 서로 깊은 토론을 하는 대신 나는 다음 날부터 영화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만일 이제까지 드라마의 과도한 얼룩이라고 생각한 폭력이 미쳐 날뛰는 정신병리적 현상일 뿐 아니라 사실은 욕망을 뛰어넘어 그 무언가를 요구하는 충동이라는 어떤 핵심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처음부터 다 죽여버리는 것을 목표로 한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아수라>(2016)), 웃자고 시작한 영화도(<극한직업>(2018)), 심지어 예술영화들도(<기생충>(2020), <버닝>(2018))같은 경로를 따라갔다.
그런데 이 경로가 바뀌었다. 내 생각에 그 첫 시작은 <부산행>(2016)이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뉴올리언스 부두교의 좀비가 한국영화에 등장해도 괜찮구나, 라는 정도의 생각만 했다. 그런데 1천1백56만5천4백79명이 이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칸영화제에도 초대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가 보다 했을 뿐이다. 새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무대가 OTT로 옮겨갔다. <킹덤>(2019)은 조선 시대를 무대로 좀비들이 창궐했다.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스위트 홈>(2020)은 같은 이야기의 다른 판본이다. 다들 성공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오징어 게임>(2020)을 보았다. 내내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처음 보는 게 분명한데 왜 나는 이걸 이미 본 것만 같은 것일까. 그리고 <지금 우리 학교는> 앞에 마주 앉았다. 마치 먼 길을 돌아 제자리에 온 것처럼 다시 한 번 좀비가 돌아왔다.
나는 <부산행>을 중심에 놓고 이 둘을 지루하게 나열하는 대신 좀 더 뒤로 물러난 다음 과감하게 하나로 합쳐서 생각해볼 것을 제안해보고 싶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좀비야말로 분노조절장애의 더할 나위 없는 물화(物化) 아닌가. 아마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좀비는 감정이 없잖아요.’ 내 말이 그 말이다. 영화 속 분노조절장애 주인공(들)은 일단 행위에 들어서는 순간 원인을 잊어버린다. 그런 다음 목표를 향해 끝까지 간다. 그때 무엇을 지나쳐 가는가. 자신의 목적. 그렇게 됨으로써 목적과 목표가 분리된다. 그러면 그게 어떻게 좀비로 옮겨가게 되었나. 여기서 좀비가 낯선 타인이 아니라 이웃, 친구, 백성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처음에는 하나였던 좀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다. 이상한 셈법이 등장한다. 우리 속에서 좀비가 나타난 다음 점점 늘어나면서 우리 속에서 내가 ‘왕따’가 되어간다. 이 서사의 외설적 변증법은 고통받는 나와 나를 포기해서 고통을 잊는 우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이며 그 둘 사이의 결합을 목표로 한 드라마가 전개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유혹한다. ‘그저 단 한 번만 물리면 돼요. 그러면 당신은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거예요’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이 힘든 경쟁을 끝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게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몰락의 서사이며 전멸의 스펙터클이다. 그걸 전 세계에서 구경하면서 즐거워하는 중이다. 내가 사는 나라가 아니라면 한 나라의 몰락을 구경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그러면 이 드라마의 끝은 어디일까. 이 질문 앞에서 당신은 어떤 장면을 떠올렸나. 우리는 같은 장면을 떠올리면 안 된다. 그때는 정말 큰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Word 정성일(영화평론가)
한국형 서사의 힘, 유연성과 역동성
콘텐츠 제국 디즈니가 가지고 있는 콘텐츠 목록을 보면 주눅이 든다. 때로는 압도된다. 디즈니는 자신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IP를 활용해 슈퍼히어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새로운 영웅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마블 유니버스를 확장시키고 있다. 차이와 반복 속에서 새로운 서사를 구축해나간다고도 할 수 있지만 때로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굳이 마틴 스콜세지의 “마블 영화는 시네마가 아니다”라는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공식에 짜 맞추는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디즈니로 글을 열기는 했지만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피로감은 21세기 넘어서면서 서서히 조성되어왔다. 콘텐츠는 투자에 있어 리스크가 매우 큰 분야다. 식상함을 무릅쓰고 다시 과거의 관습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너무 새로운 것에는 이용자들이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성공하는 콘텐츠는 대체로 기존 관습을 조금씩 비트는 경우가 많다.
한국형 호러나 좀비가 성공을 거둔 이유는 기존 장르를 한국식으로 창의적으로 수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2016)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기존에 관습화된 장르의 문법을 따르면서 그것을 한국식으로 번안해내는 데 탁월한 역량을 보여온 K-콘텐츠의 힘을 ‘유연성’이라는 용어로 표현해볼까 한다.
한국 콘텐츠가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였다. 1990년대는 문화적 역동성이 넘치는 시기였다.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같은 기존 대중음악의 문법을 혁신하는 아티스트들이 등장했고, <기생충>(2020)으로 아카데미를 평정한 봉준호 감독을 비롯해 이제는 세계적인 거장이 된 이창동과 박찬욱도 1990년대에 데뷔했다. IMF로 미디어, 문화산업을 비롯한 전 산업이 침체를 겪었지만 경기가 회복되면서 21세기 이후 드라마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한류 확산이 시작되었고, K-팝은 대중음악에서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2016년 넷플릭스의 국내 진출은 K-콘텐츠 향방에 있어 변곡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영상 플랫폼으로 많은 글로벌 가입자를 보유하고 있는 넷플릭스를 통해 K-콘텐츠가 전 세계 가입자와 조우하면서 K-콘텐츠의 경쟁력을 입증받는다. <#살아있다>(2020) <승리호>(2020) 같은 영화들이 글로벌 이용률 1위를 기록했다는 사실은 이제 회자되지 않을 정도로 넷플릭스를 통해 유통된 K-콘텐츠들은 엄청난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2021년은 대한민국 콘텐츠 역사에서 <오징어 게임>(2021)으로 기억되겠지만, <지옥>(2021)이나 <D.P.>(2021) 같은 콘텐츠들이 보여준 성과와 미학적 성취 역시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2022년에 공개된 <지금 우리 학교는>도 이용률 1위를 기록했다. 2022년에도 K-콘텐츠의 약진은 계속될 것이다.
시대정신은 넷플릭스가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가치이고 대한민국적 역동성은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콘텐츠가 생산되는 동력이 되고 있다. 앞서 1990년대적 역동성을 강조한 바 있지만, 대한민국은 기본적으로 경쟁이 치열한 사회다. 이에 따른 갖가지 부작용이 큰 것도 사실이지만 치열한 경쟁만큼 역동적인 사회라는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콘텐츠 역시 다른 지역에 비해 시대정신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또한 이용자들은 콘텐츠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콘텐츠 제작자들은 이에 대해 유연하게 대처한다. 유연성과 역동성은 K-콘텐츠의 주요한 동력이다.
한국형 서사가 힘을 갖추고 있고 그 힘은 더욱 커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한국형 서사를 둘러싼 환경은 또 다른 변곡점을 맞이했다.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사업자에 대한 제작비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IP 확보가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OTT 플랫폼 간 경쟁이 심화되고 이에 따라 제작비가 높아지면서 IP의 다각적 활용이 콘텐츠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부각되고 있다. 2022년은 콘텐츠 경쟁력 제고와 더불어 IP 확보와 다각적인 활용 등 한국형 서사가 가진 힘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나가는 것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한국형 서사의 글로벌한 경쟁력은 충분히 입증되었고, 사회적 양극화 같은 시대정신을 미학적으로 담아내는 역량도 갖췄다. 하지만 콘텐츠의 내용과 형식은 끊임없는 혁신이 필요하고 산업적 환경은 콘텐츠의 가치를 극대화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내몰리고 있다. 지금까지의 성취에 안주할 수 없는 이유는 여전히 너무 많다.
Word 노창희(카이스트 경영공학부 겸직교수)
지구 함수와 한국형 서사의 보편성
내가 처음 SF 작가로 데뷔했을 무렵에는 ‘한국형 SF란 무엇인가’에 관한 논의가 가끔 눈에 띄었다. 뾰족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고, 지금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별로 없다. 외국 SF 작가들로부터 ‘한국 SF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하는 질문을 받을 때는 있지만, 반대로 ‘그 나라 SF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하고 물으면 결론은 바로 나온다. 어느 나라 SF든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답이다.
2000년대의 ‘한국형 SF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이 2022년 ‘한국 SF의 특징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한국적인 무언가를 써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사라진 점이다. ‘한국형 SF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진의는 사실 ‘한국형 SF란 무엇이어야 하는가?’였던 셈이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한국 독자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고, 외국인들의 관심도 끌 수 있는 경쟁력 있는 스토리를 갖게 되는 걸까? 더는 이 질문을 접하지 않게 된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정답은 의외로 싱겁다. 우리가 보기에 재미있고 우리에게 필요해서 만든 이야기면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문화는 창작자와 수용자 사이의 긴 대화다. 모든 문화 콘텐츠에는 문화 향유자의 반응에 관한 경험적 데이터가 촘촘하게 반영되어 있다. 글쓰기처럼 외견상 일방적으로 보이는 창작 활동도 마찬가지다. 당장 이 글을 쓰는 내 앞에는 독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지금 내가 쓰는 모든 문장에는 지난 20년간 작가로 활동하면서 수집한 피드백이 실시간으로 반영되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재미있고 우리에게 필요해서 만든 이야기’에는 이처럼 문화 향유자의 경험이 반드시 포함된다. 외국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표면적으로 우리는 작가 개인의 생각을 따라가게 되지만, 그러면서도 ‘이 나라 사람들은 이런 걸 좋아한단 말이지?’ 하는 생각을 완전히 지울 수 없다. 그 시대 그 언어권 독자의 안목이 작품의 많은 부분을 결정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형 서사가 만들어지는 한국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한국인이 잘 자각하지 못하는 사실 하나는, 한국이 의외로 보편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사회라는 점이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사건 사고를 보면서 “세상에 이런 나라가 어디 있어?” 하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서 그렇겠지만, 세상에 그런 나라는 수없이 많다. 우리 사회가 지닌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근대화와 산업화, 냉전과 탈냉전, 세계화와 민족주의 같은 글로벌한 도전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런 행성 규모의 변화에 운명이 뒤바뀐 나라가 단지 한국만은 아닌 까닭이다. 예를 들어, 식민지 해방 후 민주 정부가 들어서고 혼란을 틈타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 다시 민주화 혁명이 일어나는 과정은 수많은 나라에서 비슷하게 반복되는 패턴이다. 한국에서만 유독 심해 보이는 부동산에 대한 집착도 사실 한국만의 특징이 아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부동산 문제는 기괴하고 비정상적이다.
물론 제2차세계대전 후에 독립한 모든 공동체가 똑같은 모습으로 귀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 많은 나라와 사회가 같은 함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비슷한 것을 꿈꾸고 비슷한 문제 때문에 좌절해야 하는 보편적인 구조 때문이다. 홍콩이나 미얀마의 민주화 시위대가 한국의 민주화를 언급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함수의 한쪽 편에는 꽤 성공한 시나리오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실례이기에, 이 함수에서 한국의 존재는 꽤 유의미하다. 이런 보편성은 우리 문화를 조금 덜 특별한 것으로 만들지만 반대로 다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사회문제에 대한 한국식 해법이나 시행착오 과정에 더 잘 공감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에게 닥친 바보 같은 상황에 대해 깊이 고민하면 다른 나라 독자가 보기에도 꽤 흥미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그 서사의 어느 부분이 한국적이었는지를 찾아내는 것은 다시 향유자의 몫일지도 모른다. 20년 전에 한국형 판타지나 한국형 SF를 고민하던 이들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나, 갓, 반지하, 양념 치킨 같은 것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요소가 될 것을 예측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자가 제일 궁금해하는 음식은 식당에서만 파는 특별한 음식이 아니라 그냥 그 나라 사람들이 즐겨 먹는 것들이다. 외국인들의 입맛을 어떻게 사로잡을지 고심하며 비빔밥을 내놓을 때보다, 짜파구리를 찾아 먹는 외국인들을 보며 ‘진짜로 저걸 먹고 싶어 한다고?’ 하며 의아해하는 시기에, 우리 문화는 세계와 더 가깝다.
이러다 너무 평범한 것만 남는 건 아닐까? 하지만 향유자들이 찾아낼 우리 문화의 특이한 면은 아직 많다. 12월 말에 태어나면 생후 열흘 만에 두 살이 될 수도 있는 기묘한 나이 체계를 쓰는 나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왠지 두 번씩 해야 하는 사회. 이런 동네는 정말 여기밖에 없다.
Word 배명훈(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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