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했던 펌은 풀었네요? 잘 어울렸는데.
변화를 주고 싶어 과감히 도전했는데 관리하기 어렵더라고요. 뒤엉킨 머리 푸는 게 고생스러워 그냥 풀어버렸죠. 헤어 펌은 처음 해봤어요.
헤어스타일에 권태를 느낄 때가 있죠.
스스로에 대한 아주 작은 반항이라고 할까요?
2019년에 했던 <아레나> 인터뷰 기억나요?
그럼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에서 함께했던 배우들과 찍었잖아요.
맞아요. 3년 만이죠. 그때는 막 시작하는 단계였죠.
그때와 비교해 인생이 크게 바뀐 건 없어요. 자세와 대사량은 달라졌어요. 촬영 현장에 올 때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고, 대사량은 많아졌죠.
당시 인터뷰에서 ‘재수 시절에 집 앞 영화관을 드나들며 배우의 꿈을 키웠다’고 했죠. 그때 봤던 영화 중 여전히 기억에 생생한 작품 있어요?
일단 영화 보는 걸 정말 사랑했어요. 집에서 한 정류장 더 가면 영화관이 있었는데, 항상 영화를 본 뒤엔 걸어서 돌아왔어요. 그때 본 영화가 모두 기억에 남지만 유독 당시의 공기와 분위기도 생생히 느껴지는 작품들이 있어요. <택시운전사>와 <신과 함께>. 내 얼굴이 저 스크린에 비칠 수 있을까? 저렇게 연기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들이 회의감으로 이어지면서도 가슴을 뜨겁게 해준 영화들이에요. 2017년은 배우의 꿈을 키우던 행복한 해죠.
2019년부터 빠르게 도약했고, 결국 꿈을 이뤘어요.
맞아요. 저도 저를 보면 신기해요. 차비 아끼려고 걸어가던 길을 다시 걸으며 그런 생각을 해요. ‘아주 많이 달려왔고 잘 달리고 있구나.’
재욱씨 얼굴은 복합적인 분위기를 풍겨요. 때론 날카롭지만 어떤 땐 순수하고, 담백하면서 로맨틱하고.
감사합니다.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연기가 편해요. 스스로도 날카롭게 날이 선 모습이 마음에 들어요. 연기를 떠나서 상황이든 감정이든 극적인 게 좋더라고요. 그래서 회피하지 않고 마주하려 해요. 친구와 싸울 때도 흐지부지 끝내지 않아요. 찝찝하잖아요. 화끈하게 감정을 표현하면서 싸워봐야 제대로 풀리죠. 기쁠 땐 더욱 크게 웃어버리고.
아낌없이 감정을 표현하는 타입이었군요.
그렇죠. 스스로도 솔직해질 수 있고 상대방에게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으니까요.
1998년생인데 20대부터 30대까지 연기했어요. 30대의 오라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데, 어렵진 않았나요?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30대 역할을 맡았어요. 나이가 주는 무게나 말투, 행동, 분위기는 직접 살아보지 않으면 표현하기 어렵잖아요. 감히 따라 하거나 흉내는 낼지언정 그 깊이는 못 따라가겠더라고요. 그래서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속 ‘장우’ 역할을 임하며 아쉬운 부분이 많았어요. 더 유머러스하게 해볼걸, 극적으로 표현해볼걸, 하는. 30대를 사회의 보석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 저는 그 보석이 되어본 적이 없거든요. 더욱 모범적이고 유쾌한 보석같은 사람으로 풀어내고 싶었는데.
2019년부터 꾸준히 달려왔는데,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 있어요?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요. ‘설지환’ 역할에 캐스팅된 건 여전히 꿈만 같아요. 아직도 오디션 현장 들어가던 그 순간이 가끔 떠올라요. 그 작품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연기에 임할 수 있었어요.
오디션에서 감독님을 매료시킨 비법은 뭐였을까요?
‘이 사람이 날 싫어하면?’ ‘지금 이곳에서 캐스팅이 안 된다면?’ 이런 생각이 들면 어디선가 불도저 같은 힘이 끌어 올라요. 그 힘으로 제 능력을 속 시원히 다 보여주게 돼요. 내가 만족할 수 있을 만큼 에너지를 끌어올려 보여드리고 나오는 게 제 장점 아닐까요.
인터뷰에서 종종 스스로를 ‘운 좋은 사람’이라고 표현했어요. 그 표현 속엔 부담감도 서려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항상 확률적으로 맞아떨어지지 않아요. 운이라는 건 말 그대로 운이고. 그런 말을 했던 당시 저도 모르게 스스로를 한계 지었던 것 같아요. 무한한 가능성이 있을 텐데 말이죠. 이제는 운이라는 단어에 이끌리기 싫더라고요. 그냥 잘 하고 싶어요. 그래서 더 집요하게 파고들게 돼요. 완벽하게 해내고 싶으니까.
평소 완벽주의자예요?
완벽주의자는 아니지만 완벽주의이고 싶은 사람이에요. 현장에서 제 예상대로 흘러간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이고, 감독님의 즉흥적인 지시가 많아요. 그럴 때 신속하고 제대로 대처하고 싶은 거죠. 잘 보여드리고 싶으니까.
재욱씨의 마음을 흔든 완벽한 연기를 선보인 캐릭터는 뭔가요?
너무 많지만,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조커’요. <알함브라궁전의 추억> 속 ‘마르꼬 한’ 역할을 맡았을 때, 오마주 삼으려 역대 조커들을 참고했어요. 조커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광기’라고 생각했고, ‘히스 레저’가 그 광기를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이라고 단정 지었죠. 그러다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를 보면서, 조커를 광기의 인물로 가두었던 자신이 한심했어요. 광기 뒤에 숨겨진 게 슬픔이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들어준 호아킨 피닉스에게 고마울 정도죠.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도 다시 보면 그 내면을 재발견할 수도 있겠죠. 처음 봤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세상을 보는 관점과 가치관이 많이 달라졌으니까요.
캐릭터에 몰입하기 위한 자신만의 방법이 있나요?
아직 경험이 부족한 스물다섯 살이라 민망하긴 하지만요.(멋쩍은 웃음)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백경’은 슬픔으로 정의했고, 슬픔을 유지하도록 내면에 최면을 걸었어요. 이렇듯 대본을 읽었을 때 첫인상과 신별로 키워드에 맞춰 감정을 표현했어요. 경험이 쌓이면 다른 선배님들이 저마다 노하우가 있듯 저도 그렇게 될 수 있겠죠?
그럼요. 그나저나 다음 작품 촬영하느라 바쁘죠?
요즘 <환혼>을 준비하느라 바쁜 까닭에 소소한 것들이 크게 느껴질 때가 많아요. 짬을 내어 친구와 라이딩 가는 것도 소중하더라고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위한 취미 생활을 더 많이 찾으려고 노력 중이에요.
발견한 취미 활동 있어요?
두 달 전에 당일치기로 스키를 타고 왔는데 너무 행복했어요. 그리고 집에서 할 수 있는 것들, 뜨개질도 배워보고 싶어요.
뜨개질과 굉장히 잘 어울리는데요?
뜨개질이 그렇게 재미있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수세미 뜨는 걸 배워보고 싶은데 아직 실행에 옮기진 못했어요. 집에서 그림 자주 그리고, 밥도 웬만하면 직접 요리해 먹죠.
향수도 좋아하신다면서요. 여전히 바이레도의 ‘슬로우 댄스’ 자주 뿌려요?
제일 많이 뿌리는 향수이긴 하죠. 그날의 기분이나 맡는 캐릭터에 따라 다른 향수를 뿌리기도 해요. 연기할 캐릭터를 분석하고 나면 그에 맞는 향수를 장만하기도 해요. ‘이 캐릭터에선 이런 향이 풍겼으면 좋겠다’ 하면서요. 그리고 작품이 끝난 후에 그 향을 맡으면, 연기했던 캐릭터에 대한 향수도 느낄 수 있죠.
재욱씨는 모험을 즐겨요?
맞아요. 100% 확률로 1억 받기, 10% 확률로 100억 받기 중 고르라고 하면 후자를 택할 거예요. 도전적인 걸 좋아해 활동적인 스포츠도 즐겨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또 매일이 모험의 연속이에요. 완벽하게 꾸려지지 않은 현장에서 연기하는 것 자체가 모험이죠. 그걸 즐기지 못하면 이 직업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성향이기도 해요?
실패가 두렵기도 하지만 성공에 더 가까울 거라고 자기암시를 해요. ‘실패는 일단 나중의 실패한 재욱이한테 이야기할 문제고, 지금은 성공만 보고 달리자’는 주의죠.
그럼 가장 두려운 건 뭐예요?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죽음이 두려워요. 지방 촬영 갈 때 이동 시간이 길면 생각이 많아지거든요. 멍 때리다 보면 별 생각이 다 들어요. ‘촬영장을 가다 죽으면 남은 장면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올라가고 싶은 위치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죽으면?’ 같은 생각들이죠. 죽으면 모든 게 한 방에 끝나버리잖아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들을 나도 모르게 상상하고 있어요. 추가로 제일 두려운 존재는 장수말벌.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온 장수말벌 채집하는 아저씨 생각이 나네요.
그 장면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에요.(웃음) 아무튼 장수말벌은 진짜 무서워요.
평소 위기를 마주했을 땐 어떻게 대처해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런데 생각을 하다 보면 결국 누군가는 손해 보는 결과가 나올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그 누구도 피해 없이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감정은 배제하고 이성적으로 고민하는 타입인데, 어쨌든 결과는 항상 있더라고요. 그게 잘못된 선택일지라도 끝까지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도록 이성을 유지해요.
감정을 잘 표현하는 걸 좋아한다고 했지만 선택의 상황에선 안 그런가 봐요.
그걸 잘 조율하는 게 중요해요. 기쁘고 화나고 슬플 때는 감정을 후회 없이 쓰되, 타인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선택에 대해선 이성적으로 바라봐요. 그럴 때 감정에 휘둘리면 나만 생각할 수도 있게 되니까요.
타인을 배려하는 섬세한 재욱씨는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어요?
너무 잘 하고 있고 잘 이겨나가고 있는 것 같아. 그 결과에 대한 보상은 분명 있을 테니 지금처럼 열심히 했으면 좋겠어. 잘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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