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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린 파리에 대하여

한가을의 어떤 날 파리로 향했다. 거기엔 낯익지만 생경한 문화와 건축 그리고 예술이 있었다. 지금 이 도시에 가야 하는 세 가지 이유.

UpdatedOn December 1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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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낯익지만 새로운 문화가 펼쳐지는 도시, 파리

파리행 비행기 티켓을 산 건 우발적이었지만, 돌아보면 유럽에 가겠다는 집념이 보름간의 파리 여행으로 이어졌다고 말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사력을 다해 거기서 해야 할 일을 만들었고, 만날 사람을 추렸다. “이 시국에 괜찮겠냐”라는 질문이 사방에서 쏟아졌지만, 따끈따끈한 백신 접종 완료 서류로 답변을 대신했다. 어쩌면 불장난 같은 마음이었다. 화끈하게 재밌고, 아찔한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 도시의 어떤 점을 갈망한 걸까. 파리가 처음인가? 아니. 익숙한가? 글쎄. 이 도시가 새롭다기엔 스마트폰 너머로 쉽게 볼 수 있는 수많은 정보와 멋진 사람이 있었고, 차라리 남미나 아프리카 같은 예측할 수 없이 생동하는 매력에 비하면 동시대적이지 않다고 판단했었다. 어쩌면 잘 모르지만 낯익은 도시였다.

그러던 어떤 날 문득 파리가 궁금해진 건, 이 도시의 서브 컬처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정확하게는 11구 인근, 서울의 가로수길처럼 유명해서 뻔해진 마레(Marais)의 옆 동네다. 거기에는 주말 밤이면 레코드로만 플레이하는 디제이들의 파티가 열리는 클럽 밤비노(Bambino)가 있었고, 때때로 자마엘 딘과 같은 컨템퍼러리 재즈 뮤지션 라이브를 볼 수 있는 공연장도 있었으며, 이 모든 행보는 파리에 사는 젊은이들의 감각과 추진력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곳은 과연 파리. 새로 문을 연 세련된 칸틴(Canteen)과 이 도시의 전통과 명맥을 잇는 레스토랑이 이웃처럼 자리한 도시. 나란히 놓일 수 없다고 생각한 것들이 보기 좋게 나란하고, 섞일 수 없어 보이는 것들이 젊음과 도전 정신으로 근사하게 뒤엉킨 유럽의 중심지.

파리에서 살 수 있는 것들은 대체로 서울에서도 구할 수 있지만, 파리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감각적인 것들은 반드시 파리에서만 가능하다. 서울에서는 영하의 날씨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집했다면, 이곳에서는 땀 뻘뻘 흘린 직후에도 뜨거운 ‘알롱제’ 커피를 마시는 게 자연스러웠다. 새롭지만 익숙하고, 친숙하다기엔 생경한 이곳에서만큼은 다른 일상을 보내도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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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와 트렌드를 품어 안은 건축의 도시, 파리

파리만큼 즐겁게 길을 헤매기 제격인 도시가 있을까. 코로나 시국에 입국 절차가 너무나 간단해서 의아하기까지 했던 이 도시는 야외에선 ‘노 마스크’가 가능하다. 첫날은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이튿날부터는 자연스럽게 마스크라는 족쇄를 벗었다. 도시의 향기가 코끝을 에워쌌다. 까마득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기분. 파리의 공기, 습기, 햇살 한 줌조차 소중해서 온몸으로 흡수해야겠다 마음먹고, 거리를 두 발로 성실하게 누비기로 했다.

거리에 나오자, 온통 비슷하게 하얀 외벽에 푸른 지붕의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아름다운 미로가 펼쳐졌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정치가 오스만이 만든 미학과 생활 방식을 논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걷기 편한 도보 환경과 통일성이 주는 편리함은 2021년에도 유효했다. 그렇게 전통이 읽히는 거리를 쏘다니다, 불쑥 완전히 새로운 건축물을 마주했다. LVMH 그룹이 2001년부터 15년간 7억5천만 유로를 들여 리노베이션한, 올해 다시 문을 연 백화점 사마리텐. 류에 이시자와와 가즈요 세지마가 이끄는 건축 그룹 사나(SANAA)를 중심으로 리노베이션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에펠탑보다 더 동쪽에는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역작이자 열두 개의 돛을 형상화한 아름다운 랜드마크 ‘퐁다시옹 루이 비통’이 있다던데. 여행객들에게는 미지의 지역과도 같은 센 강 너머 남쪽에는 약 18세기에 건립된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 팡테옹이 있구나.

오랜만에 다시 찾은 파리는 더 멋진 얼굴로 나타난 것 같았다. 불현듯 파리는 건물을 완전히 허물고 새로 짓는 도시가 아니라는 사실이 스친다. 불편하고, 비싸며, 오래 걸릴지언정 지키고 싶은 전통과 낭만이 있고, 그것을 공들여 이뤄내는 도시다. 뉴스를 통해 접한 불타버린 노트르담 대성당과 팬데믹으로 텅 빈 거리는 더 이상 지금의 파리가 아니었다. 당시에는 유럽의 문화적 요충지인 이 도시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는 것 같았고, 운이 다한 게 아닐까 짐작했다.

하지만 세상의 거의 모든 패션하우스 브랜드가 모여 쇼를 여는 이 도시는 달랐다. 영화감독 우디 앨런이 센 강의 낭만적 정취에 반해 찬가와도 같은 영화를 만든 도시,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제럴드가 역사적인 소설을 쓴 도시, 피카소가 눈에 띄는 모든 것이 영감이라며 붓을 쥘 수밖에 없었다는 도시, 파리. 이 예술가들의 업적에 파리의 도시 설계와 건축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도시의 정서와 사람들의 생활 양식이 건축물과 공생하는 건 분명했다.

취한 것처럼 두 눈 크게 뜨고 한참 도시를 서성이다 다리가 풀려 이름 모를 카페에 주저앉았다. 하필 사르트르와 프로이트가 글을 쓰러 자주 방문했던 카페라고 한다. 너털웃음이 났다. 계획에 어긋나는 삶을 용납할 수 없던 나는 이런 천금과도 같은 우연을 만나기 위해 여행이라는 향락을 끊을 수 없는 걸까? 적어도 파리에선 길을 잃는다는 것조차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3 예술이라는 말에서 무게감을 덜어낸 사람들의 도시, 파리

파리에 도착한 날은 이 도시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들이 모이는 패션쇼가 끝난 직후이자, 아트페어가 열리는 기간이며, 1년 중 이 도시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시가 많이 열리는 기간이었다. 머릿속을 온통 예술 작품들과 전시로 채웠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지도 앱에서 가보고 싶은 갤러리들에 ‘별 도장’을 찍어뒀다. 사람들 틈에 기차처럼 한참을 줄 서 있다 <모나리자>라는 명작을 순식간에 지나칠 수밖에 없는 루브르 박물관처럼 유명한 곳은 거르기로 했다.

지금의 파리가, 늘 예술 분야의 선두에 있는 이 도시의 동시대적 관점이 궁금했다. 지하철을 탔다. 여기는 파리, 세계 최초로 전철을 대중교통으로 활용한 도시이자, 서울보다 빼곡하게 전철역이 있어 편리한 곳이었다. 승강장 곳곳에 자리한 광고판을 보며 파리지앵의 소비 문화를 읽던 찰나, 유명 SPA 브랜드와 루브르 박물관의 협업 컬렉션 광고를 마주했다. 파리는 박물관도 하나의 고유한 브랜드로 대하는구나.

고개를 돌리자 유럽사진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광고가 있다. 지하철까지 오는 거리에서도 전시 포스터나 광고 문구를 봤다. 그로부터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했다. 어디에나 전시 포스터가 있다는 건 누구나 쉽게 갤러리 문턱을 넘고, 대중문화의 일부라는 게 아닐까. 어쩌면 나는 서울에서 예술이라는 단어를 대단한 칭호처럼 여기고, 화이트 큐브를 신성시 여기며 어렵게만 생각한 게 아닐까.

그렇게 도착한 곳은 마레 지구에 위치한 갤러리 페로탕.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래픽 아티스트 배리 맥기와 회화 작가 클레어 타부레의 작품이 연이어 전시되어 있었다. 페로탕은 프랑스와 아시아 작가들의 현대미술 작품을 주로 전시하는 갤러리답게 젊고 총명한 작가들의 전시를 여는 곳이다. 그리고 지난주 관람한, 페로탕 반대편인 동쪽에 자리한 팔레 드 도쿄의 안느 임호프 개인전을 나란히 떠올렸다. 테크노 음악을 비롯한 서브 컬처에 대한 애호를 퍼포먼스와 설치미술 등으로 풀어낸 작가 임호프, 그리고 페로탕이 선택한 신진 작가들로부터 이 도시가 전개하는 ‘젊은 예술’이 선명해졌다.

이날의 마지막 행선지는 피노 컬렉션(Bourse de Commerce - Pinault Collection), 구찌, 생 로랑, 발렌시아가 등 명품 브랜드의 회장 피노가 소유한 현대미술관이다. 슈퍼 아트 컬렉터가 전개하는 곳이라는 점만큼 놀라운 건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3년간 건물을 리노베이션했다는 점이었다. 건물 내부에 들어서면 다다오의 성과가 한눈에 들어온다. 중심에 자리한 지름 30m에 달하는 다다오의 상징과도 같은 노출 콘크리트 벽이 원형을 이룬다. 그 중앙에는 우르스 피셔의 양초와 같은 성질의 밀랍 조각상 ‘Untitle’이 있다. 전시 시작과 동시에 작품에 불을 붙였고, 작품은 전시가 끝나는 12월 31일까지 조금씩 녹는다. 작품을 소유한다는 개념과 예술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반예술운동을 추구하는 작가다운 발상이었다.

이 압도적인 예술적 경험 앞에서 파리에서 예술이란 어떤 의미일까 생각했다. 이 도시에 살면 이렇게 거대한 규모의 작품과 그만큼 거대한 이름들 사이에서 압도당하는 순간이 잦은 걸까.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순간을 쉽게 맞이할 수 있을 만큼 감정적으로 풍요로운 걸까. 도대체 예술이란, 작품이란 우리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작품을 일상적 물건에 비교하면 무용하지만, 그 가치는 우리를 정서적으로 풍요롭게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예술은 유용성을 넘어 높은 가치를 책정받는 게 아닐는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린 파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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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CONTRIBUTING EDITOR 양보연
PHOTOGRAPHY 양보연

202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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