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 저녁, 성수동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피치스가 만든 오프라인 공간 도원에서 또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후 6시부터 1백11분간 벌어진 행사. MC는 노홍철이었다. 한사랑산악회, 보이, DJ 소다의 공연이 이어졌다. 피치스(Peaches)와 크림(Kream)이 같이 기획한 이벤트, ‘피치스 & 크림 로또’ 한정판 굿즈가 출시되는 날이었다.
크림은 네이버의 자회사 ‘스노우’가 출시한 한정판 전용 리셀 플랫폼이다. 크림을 통해 피치스가 만든 한정판 후디나 목걸이를 사면 응모권이 함께 배송됐다. 당첨자는 총 4명. 1등 상품은 피치스가 튜닝하고 여인택 피치스 대표가 소유했던 분홍색 메르세데스-AMG GT였다. 보험료나 제세공과금 등 부대비용도 피치스가 지원하기로 했다. 이벤트 이름 그대로 로또와 다름 없는 기획이었다.
피치스는 자동차와 스트리트 문화를 중심에 두고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는 스타트업이다. 자동차 튜닝과 패션은 그들이 전개하는 여러 가지 사업 중 하나다. 시작은 영상이었다. 일본에 본사가 있는 포르쉐 전문 튜닝 브랜드 RWB의 행사를 촬영한 영상이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2017년에 올라온 이 영상의 조회수는 2021년 11월 현재 1백99만 회에 달한다. 피치스가 만든 영상의 총 조회수는 1억 회 정도. SNS 팔로어는 18만 명이다.
성수동에 있는 오프라인 공간 도원에는 노티드 도넛과 다운타우너가 입점해 있다. 스모킹타이거라는 이름의 바에서는 칵테일과 물담배, 레이싱 게임을 즐길 수 있다. 론칭 초기에는 우려가 없지 않았다. 오프라인 공간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생각하면 전개하기 어려운 규모의 사업이었다. 하지만 피치스 도원은 한 달에 약 9만 명이 찾는 성수동 명소가 됐다. 코로나 이전의 한 달 평균 방문객 수는 약 12만 명이었다.
지금까지 협업해온 브랜드의 면면도 화려하다. 현대자동차의 고성능 브랜드 N, 한국타이어, 삼성전자, 아모레퍼시픽, BMW M, 메르세데스- AMG, 포르쉐, 람보르기니 등. 최근에는 스타필드, LG 그램과도 협업했다. 피치스의 메일함에는 하루에도 20통에 가까운 협업 제안이 쏟아진다. 지금은 밝힐 수 없는 협업도 비밀리에, 전방위적으로 진행 중이다. 여인택 대표는 “약 30개의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피치스가 만든 옷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드롭(drop) 방식으로 판매한다. 완판까지는 평균 4시간 정도 걸린다. 피치스가 LA에서 활동하던 초기에는 70%가 해외에서 팔렸다. 한국을 거점으로 법인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한 2018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70%의 물량이 소진된다. 전 세계에 있는 피치스 팬들이 그들의 판매를 기다린다. 옷을 만들기 전에는 피치스 로고 스티커를 만들었다. 의구심이 없지 않았다. 팔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반응이 있었고, 피치스를 좋아하는 팬들이 실제로 움직이고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이후의 모든 사업이 이 확신으로부터 시작됐다. 요즘은 스티커도 한 달에 한 번, 1천5백 장만 살 수 있다. 중고거래 시장에서는 웃돈을 붙여 파는 사람도 있다. 정품 스티커가 잘 팔리니 이미테이션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피치스는 추후 NFT를 발행하는 식으로 가짜 스티커 문제를 해결할 계획을 갖고 있다. 팬과 시장이 동시에 열광하는 상황.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멋진 브랜드의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이유가 뭘까? 여인택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전략을 짜고 시작한 건 아니에요. 브랜딩 전략은 사실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요. 패러다임에 빠지게 되니까요. 우리 입장에서는 일단 던지고, ‘되는 것 같다’ 그러면 수정하고 수정하고 또 수정해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거예요. 그걸 반복하는 거죠.”
피치스의 화려한 성공을 부러워하는 입장이라면 얄미운 말일 수 있다. 스타트업 비즈니스의 모범답안에 가까운 대답, 정석에 가까운 접근이기 때문이다. 가설을 세웠다면 빠르게 행동해야 한다. 행동하면 결과가 나온다. 결과에 따라 더 나은 가설을 다시 세울 수 있고, 이 과정을 끈질기게 다듬고 수정해 비즈니스 모델로 정착시킨다. 이런 식으로 규모를 키우면서 성실하게 성장하는 것이다. 오해하면 안 된다. 누구에게나 교과서가 있지만 모두가 만점을 받을 수 없는 수능처럼, 정석이라고 쉬운 게 아니다. 하지만 피치스는 해냈다. 모든 활동의 중심에는 자동차가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강력하게 고수하면서.
“경계를 정해놓지는 않아요. 하지만 반드시 자동차가 중심에 있어야 해요. 우리는 자동차가 아닌 것은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LG 그램과의 협업을 의외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마찬가지 맥락이에요. 이벤트의 중심에는 튜닝이라는 키워드가 있었죠.”
스타트업 비즈니스의 원칙과 고집이 첫 번째 비결이라면, 두 번째 비결은 유연함일 것이다. 피치스가 자동차의 면면을 해석하는 시선에는 편견이 없다. 음악과 패션은 물론 세상의 거의 모든 문화가 자동차라는 필터를 통해 자유롭게 비약하는 곳이 바로 피치스다. 모든 것을 다루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의 정수로 모이는 힘. 크림과의 전무후무한 이벤트도 일단 해보자는 식이었다. 눈이 번쩍 뜨이는 기획, 전에 없던 규모였다. ‘당신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즐기기만 하라’는 식의 담대한 멋이 있었다.
“딱 하나였어요. 우리는 자동차를 사랑하고, 멋진 차를 만들어 타고 다니는 것을 좋아해요. 저는 이 시장이 커지려면 다양한 사람들이 기회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끼리만 문화로 즐기는 게 아니라 누구나 경험해봐야 하는 거죠. 피치스가 손해를 좀 보더라도 우리 차를 주고, 직접 타고 다니면서 이게 멋지다는 것을 경험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여인택 대표가 소년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투명할 정도의 솔직함. 피치스의 세 번째 비결이다. 즐거우면 한다. 기왕이면 멋지게, 고유한 방식으로 해낸다. 내가 느낀 즐거움을 팬도 느꼈으면 좋겠다. 좋아하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심플하게, 애정을 듬뿍 담아 즐기던 차를 선물한다. 진심으로 좋아하고 솔직하게 기획한 후 행동으로 퍼뜨리는 것이다. 이런 행동 양식, 투명하고 거리낌 없는 태도야말로 피치스의 본질 아닐까?
좋은 브랜드는 멋진 친구와 같다. 진심으로 응원하고 같이 즐기면서 서로의 가치를 제고한다. 성실하고 유연하며 투명한 태도를 교환하면서 같이 성장한다. 이 과정에서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된다. 피치스와 팬의 관계가 그렇다. 후디와 목걸이는 다 팔렸고 이벤트는 끝났지만 열기는 식지 않았다. 당첨자는 4명뿐이지만 설렘은 모두의 것. 팬들은 이미 행복하다. 피치스는 기대와 재미와 즐거움을 선물했다. 성실하고 유연하며 투명한 태도로. 아낌없이,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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