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사자가 인간의 말을 해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사자와 인간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기 때문에 언어 체계를 공유한들 서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100분 토론>에서 여야 국회의원들의 토론을 보라. 분명히 한국어로 대화하는데 도통 말이 통하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 문제는 한국 축구가 지금까지 유럽파 수비수를 배출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지적되었다. 축구에서 수비는 조직의 기술이다. 상황에 따라 어디에서 누가 어떻게 해야 할지가 정해져 있고, 경기 중 수비수들은 계속 소통한다. 조직의 일부가 되지 못하는 수비수는 아무리 개인기가 뛰어나도 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유럽에서 적응하려면 다른 스타일의 수비 습득과 자기 관리, 언어까지 마스터해야 한다. 2013년 홍정호(당시 제주)는 독일 분데스리가의 FC아우크스부르크로 이적하며 유럽 빅리그 한국인 센터백 1호 역사를 썼지만, 희미한 족적만 남긴 채 아시아로 복귀해 아쉬움을 남겼다.
2021년 여름 대한민국 김민재가 유럽 축구의 단단한 문을 뚫고 들어갔다. 터키 슈퍼리그의 페네르바체였다. 유럽에 처음 도전하는 김민재로서는 나쁘지 않은 클럽이다. 터키 현지에서 페네르바체는 거대한 팬 베이스를 보유한 인기 팀이다. 갈라타사라이, 베식타슈와 함께 이스탄불 3대장 중 한 곳이기도 하다. 리그 규모와 상관없이 클럽의 우승 경쟁력은 선수의 경력 개발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본인만 잘하면 평가 프리미엄을 누리기 때문이다. 반대로 못하면 훨씬 매몰찬 비난을 받는다. 압박감도 대단하다. 현지 빅클럽은 신입생이 자신을 입증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지 않는다. 말도 통하지 않는, 소위 축구 변방 한국에서 온 수비수라면 더 그렇다.
그런데 김민재의 능력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대단했다. 8월 22일 유럽 데뷔전에서 김민재는 만점 활약을 펼쳤다. 자리를 지켜야 할 때와 대인마크를 가할 때를 정확히 구분하는 판단이 일품이었다. 압박 범위 안에 들어온 상대를 강한 몸싸움과 빠른 발로 제압하면서 홈 팬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금상첨화로 팀도 2-0으로 완승했다. 한 경기만으로 김민재는 주전 자리를 꿰찼다. 알리 코치 회장(터키 최대 재벌 3세)은 벌써 “김민재는 슈퍼스타”라며 입이 귀에 걸렸다. 페네르바체도, 우리도 무척 놀랐다. 솔직히 김민재 본인도 놀랐을 것이다. 그만큼 강렬한 데뷔전이었다.
김민재의 유럽 연착륙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우선 입단 타이밍이다. 현재 페네르바체는 명가 재건 중이다. 2010년대 중반부터 페네르바체는 승부 조작 연루 징계, 리그 중위권 추락 등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감독도 계속 바뀌었다. 로빈 판페르시, 나니, 안드레 아에유, 이슬람 슬리마니, 마르틴 스크르텔 등 빅리그 스타들을 데려오고도 합당한 결과를 만들지 못해 팬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2018년 6월 코치 당시 이사가 37대 회장으로 당선되면서 클럽은 간신히 수습 국면에 접어들었다. 2020/21시즌 리그 3위로 UEFA유로파리그 출전권을 획득했고, 지난여름 오프시즌에 2013/14시즌 1부 우승을 이끌었던 비토르 페헤이라 감독을 재영입했다. 새로운 체제는 기존 시스템의 부정 출발을 끊기 마련이고, 이러한 분위기는 신입생 김민재에게 공평한 출발선을 제공하는 호재로 작용한다.
실제로 페헤이라 감독은 지난 시즌까지 팀의 수비 전술이었던 백4를 백3로 바꿨다. 센터백 출전자 수가 2명에서 3명으로 늘어난 것이다. 페헤이라 감독은 김민재, 마르셀 티세랑, 아틸라 살라이를 선택했고, 전술한 대로 김민재는 보스의 기대에 200% 부응했다. 백4에서 센터백 플레이는 지역방어(Zonal Defense)에 초점을 둔다. 센터백을 3명 세우는 백3 전술에서는 센터백의 개인 역량이 필요하다. 백3의 센터백은 수적 우위를 활용해 적극적으로 상대 공격수에게 대인마크를 가한다. 공격 시에도 센터백 1명은 과감하게 전진해서 공격 빌드업에 관여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두 가지 모두 김민재가 특화된 부분인 동시에 센터백이 돋보일 수 있는 플레이다. 터키 현지 언론은 이적해온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은 김민재를 리버풀의 버질 판다이크와 비교할 정도로 높게 평가한다. 페헤이라 감독, 김민재, 백3 전술의 궁합은 8라운드 현재 리그 최소 실점으로 단독 선두라는 결과를 내고 있다.
올 시즌 유로파리그 출전도 김민재에게 호재다. 유럽 시장에서 터키 슈퍼리그는 톱클래스로 보기 어렵다. 빅리그의 관심을 받으려면 아무래도 국제무대에서 검증을 받아야 한다. 올 시즌 페네르바체는 지난 시즌 리그 3위 자격으로 UEFA유로파리그에 출전 중이다. 챔피언스리그보다 규모와 관심도가 덜해도 유로파리그 역시 유럽 신입생 김민재에게는 큰 보너스라고 할 수 있다. 국제무대 활약상은 곧 다양한 리그 환경에 대한 적응력을 의미해 선수 영입을 판단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기본적으로 페네르바체는 거대한 유럽 시장에서 셀링 클럽으로 분류된다. 새로운 선수를 발굴해 빅리그에 비싸게 팔아 돈을 벌고, 신인을 키우거나 전성기가 지난 스타 출신을 저렴하게 영입해 전력을 유지한다. 아무리 팀 내 전력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에이스라도 가격만 맞으면 주저 없이 보낸다. 비싼 값에 팔릴 만한 선수를 빅리그 고객에게 선보이는 기회가 바로 챔피언스리그와 유로파리그다.
현실적으로 유럽 대회는 페네르바체에게 우승 도전 대상이 아니라 보유 선수(팔릴 만한)를 선보이는 쇼케이스에 가깝다. 빅리그로부터 넉넉한 제안을 받으면 페네르바체는 굳이 김민재의 앞길을 막지 않는다.
유럽 빅리그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아시아 수비수는 일본 국가대표팀 주장 요시다 마야다. 1988년생인 요시다는 일본 J리그에서 데뷔해 21세에 네덜란드 VVV펜로, 24세에 프리미어리그 사우샘프턴으로 각각 이적했다. 사우샘프턴에서 7시즌 반을 뛰었으니 요시다는 자신의 전성기를 온전히 프리미어리그에서 보낸 셈이다. 올 시즌 30대 중반인 요시다는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 주전으로 뛴다. 올 11월 김민재는 만 25세가 된다. 본인 가슴에 빅리그 야망이 들어 있다면 터키에서 오랫동안 머물 시간이 없다는 뜻이다. 연령에 따른 시세 형성을 생각하면 아무리 길어도 두 시즌 내에 점프해야 한다. 그래야 나이도 맞고, 지금 넘쳐흐르는 체력적 자신감을 빅리그에서도 완전연소시킬 수 있다. 이렇게 잘하는 줄 새삼 깨닫고 보니 중국에서 허비한(물론 큰돈을 벌었다) 2년 반이 더 원망스러워진다. 지금 김민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한국 축구 후배들은 그 점을 참조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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