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냈어요?
무탈하게 잘 지냈어요. 사실 몇 달 전 몸이 아팠어요. 뭘 잘못 먹은 건지 위경련으로 고생하느라 집에서 쉬었어요. 쉬면서 두 가지에 푹 빠졌죠.
뭔가요?
<스트릿 우먼 파이터>랑 <환승 연애>. 춤에 대한 로망이 있어요. 춤을 잘 추고 싶다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나 영감을 몸으로 표현하는 거요. <스트릿 우먼 파이터> 속 댄서들이 본인만의 색깔과 열정으로 춤을 표현하는 게 어찌나 멋있던지. 최애 한 명을 추리기가 어려워요. <환승 연애>는 커플이 겪는 고민이 공감되고 감정선이 세밀해 몰입됐고요.
연일 화제인 프로그램들을 섭렵했군요. 휴식기 동안 발견한 것도 있어요?
낯선 환경에 뛰어들고 싶어 하는 제 자신을 발견했죠. 휴식을 취하면서 에너지도 얻었고, 무언가 해보고 싶은 의욕이 생겼어요.
낯선 곳에 뛰어들 땐 큰 용기가 따르죠.
인간은 낯선 환경이나 불편한 상황, 껄끄럽거나 애매모호한 일은 피하고 싶어 해요. 그렇지만 주저 않고 뛰어들수록 더 깨우치게 되는 것 같아요. 물론 지금까지 많은 노력과 도전을 거듭했지만, 그것보다 더 열린 세상으로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천우희는 용감한 사람이네요.
사실 쑥스러움이 많아요. 소심하기도 하고. 그런 성격을 상대방에게 잘 들키진 않나 봐요. 알아차릴 수 없게 리액션도 잘하고 상대방을 배려하지만, 사실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랍니다.(웃음)
이상향 있어요?
이상향을 가지려 하죠. 반면 항상 고민이 동반돼요. 정말 좋은 배우는 어떤 배우일까 고민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는 좋은 사람이 좋은 배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생명력이 길고 그동안 사랑받는 게 좋은 배우라는 생각으로 바뀌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또 생각이 바뀌겠죠. 이상향은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진정성을 가지고 진심으로 대하는 게 좋은 배우의 자세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아요. 그 생각은 늘 품고 있죠.
어느 직업이든 평가 기준은 모호한 것 같아요.
맞아요. 그 해답을 찾으려 꽤 노력했어요. 좋은 사람, 좋은 배우에 대한 해석은 개인마다 달라요. 어떤 때는 쳇바퀴 같은 고민에 갇혀 정체성이 흐려지는 듯한 경험도 했어요.
정체성이 흐려진다는 건 정확히 어떤 의미일까요?
배우로서 모든 걸 수용하고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추려고 한다는 거죠. 연기가 그렇잖아요. 어떤 캐릭터를 연기할 때, 결국 저로부터 출발하는 거거든요. 물론 저를 지우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보는 순간이긴 하지만요. 나를 지우면서도 나로부터 새로운 사람을 조각하기도 하는 것이니 정체성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캐릭터가 천우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도 하나요?
캐릭터에 쉽게 동요하는 타입은 아니에요. 감상적인 연기를 좋아하진 않아요. 일상으로 끌어오면 내가 나인지, 그가 나인지 혼동되니까요. 제가 표현해야 되는 부분이 명확하게 있음에도 그저 내 감상에 취해 휩쓸려 다니게 될까봐. 하지만 연기를 3~6개월 하다 보면 일상에도 묻어나긴 해요. 말투라든지, 순간적인 반응이라든지. 그래도 최대한 멀리 두려 해요. 자신과 캐릭터를 분리하는 게 건강한 연기와 일상에 도움이 되더라고요.
이옥섭 감독의 <걸스온탑>을 보고 천우희의 음성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는 걸 느꼈어요. 스스로도 본인의 목소리가 가진 힘을 느껴요?
예전에는 제 목소리를 싫어했어요. 노래방에서 부른 걸 녹음해 들어보면 왠지 이질적이고 부끄럽잖아요. 그런데 연기를 할수록 이런 생각이 들어요. 배우는 각자 갖고 있는 고유의 존재감으로 연기하는 건데 제 고유의 존재감이 목소리인 것 같아요. 돌이켜보니 내레이션이나 음성으로만 전달하는 작품을 꽤 많이 맡았더라고요. 제 음성에 내면을 전달할 수 있는 울림이나 힘이 있다고 믿어요.
자극받는 캐릭터가 있나요?
초반에 강렬한 연기들을 선보여서 눈도장 찍을 수 있는 작품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실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건 아니에요. 제게 연기란 인간에 대한 탐구예요. 인간에 대한 호기심. 내면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거나 표현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게 만드는 캐릭터에 눈길이 가요. 탐구해보고 싶은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죠.
본인을 탐구하기도 하나요?
그렇죠. 새로운 인물을 마주하면 자신에 대해서도 알게 되거든요. 그리고 깨달은 게 하나 있어요. 내가 정말 알고 싶은 건 사람이구나. 인간이 궁금하고 인간에 대해 알고 싶은 거구나.
왜 인간이 궁금해요?
과학이든 인문학이든 정치든 모든 게 결국 인간이 행하고 만들어놓은 거잖아요. 모든 궁금증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엔 인간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고 싶어요. 물론 자연도 있지만요.
인간 탐구는 연기에 도움이 됐나요?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연기에 응용하진 않아요. 연기를 잘하기 위해선 어떤 분은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했고, 어떤 분은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말했어요. 저는 두 가지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경험을 연기로 발현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반면, 내가 가진 창의력과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는 부분이 있죠.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체득하는 것도 있지만 그걸 작품에 녹여내려고 하진 않아요. 소설이나 책, 또는 다른 영감으로 충분히 얻을 수 있으니까요.
영감을 자주 받는 편이에요?
아주 사소한 것들에도 영감을 받아요. 그걸 놓치지 않고 메모하는 습성이 있어요. 하물며 집 정리를 하다가도 떠오르는 게 있으면 써요.
메모는 무슨 내용이에요?
늘 달라요. 뉴스나 사건 사고를 봐도, 책을 봐도. 앞서 말한 <스트릿 우먼 파이터> 볼 때 머릿속에 스치는 것도 적어요.
일기도 써요?
일기를 꽤 오래 썼거든요. 매일 쓰려 하는데 그건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고등학교 때부터 수기로 꾸준히 써왔어요.
일기에는 감정이 담겨요. 시간이 지나 다시 꺼내보면 민망한 적이 많죠.
3년, 5년, 10년을 한 권에 담아놓은 일기장을 팔아요. 이를테면 1월 1일의 3년, 5년, 10년치를 한 장에 모아놓은 거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눈에 보여요. 부족한 점을 발견하면 반성하고, 잘 지내고 있었다면 칭찬해주죠. 그 과정이 거듭되면 정말 성장해요. 그저 내가 좋아서 일기 쓰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권유하고 추천해왔어요. 아쉽게도 끝까지 쓴 사람은 한 명도 못 봤어요.
일기를 멈춘 적도 있나요?
한동안 쓰지 않은 적도 있어요. 스스로를 다스리고 되새김질하는 것들이 어느 순간 무의미하게 다가오더라고요. 변화 없이 안주하는 내 모습을 글로 마주하는 게 고통스러웠어요. 무기력해지고. 외면하고 싶어 손 놓은 적도 있지만, 당시에도 제가 몰랐던 저의 좋은 점이 있었겠죠.
캐릭터 연구가 어려울 땐 어떻게 극복해요?
자신과의 대화를 제일 많이 해요.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체득하고 체화시켜야 하니까요. 자신과 대화하다 보면 고민이 생길 때도 있어요. 그럴 땐 꼭 메모해요. 그럼 정리가 좀 되죠. 고민을 견뎌낼 수 있는 건 꺾이지 않는 흥미와 호기심 같아요. 연기는 가장 재미있는 놀이이자 여행이에요. 삶을 배워가는 여행 같아 흥미가 떨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저를 많이 들여다보려고 해요. 그 소중한 여행을 놓치지 않으려고요.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건 정말 행운이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물론 좋아하는 일을 하면 괴로움이 더 크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어버리면 더 고통스럽잖아요. 잘 해내고 싶은 강박에 휘둘려 즐기기 힘드니까. 하지만 좋아하는 걸 계속 해나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행운이죠.
외로움을 마주할 때도 있죠?
느끼죠.
무언가에 아낌없이 애정을 쏟고, 치열하게 임하다 보면 공허함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외롭고.
모든 게 그런 것 같아요. 애정이 많으면 그만큼 반대되는 감정도 크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누군가를 인간으로서 정말 좋아하고 아끼면 그 사람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잖아요. 일도 마찬가지더라고요. 내가 이 일을 하면서 정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감정을 쏟는데, 그래서 그만큼 또 많이 지치기도 하고 외로워지고. 공허할 때도 많고.
우희 씨는 모험 좋아해요?
좋아하는 것 같아요. 해보지 못한 것들을 많이 해보고 싶어요. 앞서 말했듯 최근에 자신감이 생겼거든요. 낯선 환경에 나를 던져보자는 마음.
지금 하고 싶은 모험은요?
여행을 정말 떠나고 싶어요. 그런데 양가감정 때문에 선뜻 하지 못했어요. 낯선 환경을 너무 너무 무서워하면서도 동시에 선망해요. 낯선 곳에서의 경험이 주는 짜릿함이 궁금해요. 모험을 늘 동경하며 살아왔는데, 매번 눈앞에 닥치면 주저했죠. 여행은 정말 마음만 먹으면 되는데 그게 어려워 이런저런 핑계를 대왔어요. 두려움을 극복할 용기가 없었던 것 같아요.
궁금해요. 천우희의 20대. 어떤 사람이었어요?
별 생각 없이 살았던 것 같아요. 20대 때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가 있었다면 누구보다 노력을 했다거나 혹은 큰 절망감을 느꼈다거나 했을 텐데 그러지 못했어요. 그냥 망설이기 바빴고, 두려움 때문에 숨어 있기 바빴어요. 기로에 서 있는 느낌이었죠. 생각만 많고 행동하지 못했어요. 그런 시간들이 돌이켜보면 아쉽긴 하죠. 나이를 더 먹고 경험하는 게 많아질수록 두려움도 자라나잖아요. 왜 젊음이 전부일 때 세상에 뛰어들지 못했지? 그런 아쉬움? 이제는 그래, 지금이라도 하자고 마음먹었죠.
여행할 수 있다면 떠나고 싶은 곳은 어디예요?
어디든 좋죠. 사실 굉장히 억울하기도 해요. 늘 다음을 기약하며 미뤄왔던 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해졌으니까요. 처음엔 절망감을 느꼈는데 전환점이기도 하더라고요. 지금까지는 많은 것들을 나중을 기약하고 살아왔는데, 사실 내일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현재겠구나.
첼로는 어떻게 됐나요? 여전히 푹 빠져 있나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보자는 마음으로 아직 하고 있습니다! 꽤 오래 하고 있어요. 불씨를 최대한 안 꺼트리려고 노력 중이죠.
왜 첼로를 택했어요?
한스 짐머의 내한 공연을 갔었어요. OST를 많이 들었더니 그 감동이 두 배 세 배더라고요. 그리고 오케스트라에 동양인 한 분이 첼리스트인데 정말 매력적이고 섹시했어요. 그분 덕에 첼로라는 악기의 매력에 빠지게 됐어요. 배우고 싶던 차에 바로 집 앞에 학원이 있더라고요. 운명인가 싶어 곧장 배우러 갔어요. 첼로의 중후한 소리는 안정감을 주고 음색이 저랑 잘 맞더라고요. 여러 악기를 배웠는데 첼로만큼 끈질기게 배운 적은 없어요. 지루함을 느끼는 순간 손 놓아버리죠.
첼로도, 일기도 강한 집념으로 오래 이어오고 있네요. 집념이 강한 타입인가요?
어떤 부분에선 굉장히 끈기가 강한데, 취미나 다른 부분에선 금방 흥미를 잃곤 해요. 케이스 바이 케이스죠.
마지막으로, 우희 씨는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하하. 물론 성찰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긴 해요. 하지만 나를 너무 잘 알다 보니, 많은 부분에 의미 부여를 하거나 정의 내리려 하더라고요.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해요. 누구나 남들이 모르는 자신만의 모습을 갖고 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나도 모르는 내가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니까요. 특정한 프레임에 나를 가둬놓지 않기로 했어요. 그 무엇도 나일 수 있고, 그 어느 것도 내가 아닐 수 있고, 그냥 나는 나인 걸로. 이런 모습도 나고, 저런 모습도 나니까, 그 모든 것들을 포용하고 바라봐줘야겠다는 생각이 커요. 그래서 그냥 나는 나로 두려고요.
그게 해답인 것 같네요.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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