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와는 2019년 4월에 만났죠. 그때보다 여유로워 보여요.
여유가 많이 생겼어요. 대체 복무 하기 전에는 뒤가 막혀 있는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일도 숨 가쁘게 했던 것 같고. 소집 해제 후에는 마음이 편해졌어요. 급하게 일할 필요 없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리셋한 느낌?
맞아요. 정말 그래요.
오늘 화보 촬영장에는 껍데기가 해체된 작품들이 있었어요. 그게 종석 씨의 현재 상태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를 포장한 이미지를 벗겨내고 날것의 나를 보여주는 점과 또 다른 껍데기를 찾고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요.
요즘 촬영하거나 다른 작품을 보면서 느끼는 게 있어요. <D.P.> 보셨나요? 정해인 배우와 친하기도 하지만 정말 좋은 배우라고 느꼈어요. 연기 톤이나 연출도 훌륭하고요. 또 배우들은 작품에 임할 때 포기할 수 없는 최소한의 어떤 것들이 있어요. 그런 걸 포기하고 연기하는 게 좋아 보였어요. 배우가 작품에 임하는 자세에서 이미 플러스 점수를 주고 시청하게 되더라고요. “와 정말 좋다” 하면서 보고 있죠. 저도 이번 새 드라마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모니터링을 많이 안 했어요. 전에는 항상 촬영하면 모니터를 계속 돌려봤거든요. 얼굴이나 연기나 문제점을 체크했는데, 이제는 거울을 본다거나 화면을 반복 재생하거나 그러지 않아요. 지금은 연기의 본질적인 것을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그런가, 날것의 연기를 하는 배우들의 작품을 더 찾아보게 돼요. 구교환 배우가 정말 매력적이에요. 그가 작업한 독립영화도 다 찾아봤죠. 저 호흡을 어떻게 쓰는 거지? 타고난 것인가? 훈련으로 만든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봤어요. 요즘은 연기 잘하는 배우들의 과거 작품을 찾아보면서 ‘필모깨기’를 하고 있어요.
좋은 배우들이 참 많아졌어요.
좋은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정말 많아요. 자책하면서 저도 뭔가 전형적인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0년을 활동하다 보니 굳어진 것들을 깨보고 싶어요.
지난 2년 동안 판이 바뀌었어요. TV 시대에는 시간대별 드라마 공식이 있었는데, OTT에선 드라마가 주제도 내용도 자유롭게 전개돼요. 작가들이 눈치 안 보고 쓰고 싶은 걸 쓰는 거죠. 배우들도 의욕이 생길 것 같아요.
급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구나 싶어요. 겨우 2년 지났을 뿐인데 많이 달라졌어요. 촬영 현장도 바뀌었고, 말씀하신 것처럼 작품의 결도 너무 달라졌어요. 이러다 어? 내가 도태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세상이 바뀌고 있네요.
사회의 낯섦은 군대 다녀오면 으레 겪는 일이죠.
저는 사회에 있었기 때문에 설마 적응 못 하겠어 싶었는데 지금 대중에게 보여주는 일을 하고 있고, 매체들은 변화하니까. “어? 좀 다른데? 호흡 쓰는 것도 다르네. 저게 더 좋아 보이는데?” 하면서 변화를 체감하고 있어요.
촬영 현장의 변화도 큰가요?
가장 큰 변화는 근로 시간이 생긴 거죠. 드라마를 찍으면 밤새는 일이 잦았어요. 하루 몇 시간 못 자는 건 부지기수였고. 그런데 이제는 근로 시간을 지켜서 찍어요. 다 못 찍으면 제작진들이 투표를 해서 더 찍거나 아니면 중단해요. 엄청난 변화죠. 드라마 촬영 기간이 늘어난 것도 변화예요. 이제 막 첫 촬영을 해서 아직 많은 걸 느끼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연기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있어요.
새로운 플랫폼들이 생겨나서 그런지 요즘 본질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디지털 아트와 같이 새로운 것들은 아직 제대로 된 평단도 없으니까요. 뭐 꼭 그게 필요한 건 아니겠지만. 다채로운 작품이 늘어났지만 판단 기준이 불명확하니 다시 본질로 회귀하는 걸 수도 있고요. 연기자들도 본질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것 같아요.
맞아요. 전에는 드라마 하면 강박이 있었어요. 바스트 연기라고 하잖아요. 표정으로 표현을 하고 정박자로 호흡을 끊어주고, 딕션과 딜리버리를 신경 써서 정확히 들릴 수 있도록 노력을 했다면 요즘은 그거에서 변화를 주는 게 좋아요. 변화하려고 노력하는데 이미 습득된 것들이라 벗어나기 쉽지는 않네요. 평소 말할 때는 흘려 말하는 스타일이에요. 근데 작품을 할 때는 또박또박 말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요. 친한 연출가님이나 작가님들이 “왜 작품할 때는 그렇게 말 안 하면서 평소에는 대충 말해요?”라고 했거든요.(웃음)
종석 씨는 TV로 볼 때는 세 보이는데, 실제로는 대화하기 편한 사람이에요.
원래 말이 좀 느린 편이에요. 사람을 자주 안 만나다 보니까 말할 일이 별로 없거든요. 그래서 이종석으로서 대본이 없는 대화를 하는 게, 서른이 넘었지만 아직도 익숙하지 않아요. 근데 요즘은 연기에서 본래 나처럼 말해도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요. 방법을 몰랐다면 몰랐던 건데 조금 찾은 거 같아요.
대체복무 기간은 종석 씨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나요?
특별히 의미 부여하면서 생각의 방향이 변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다만 퇴근하고 나서 시간이 되게 많이 남는데, 그게 나쁘지 않았어요. 여유로움과 아무 일 없음, 내일도 스케줄 없음. 이게 너무 좋았어요. 일할 때는 촬영 끝나면 무엇을 해야 할지 계획이 있었어요. 놓치기 아까운 작업이 있다면 숨 가빠도 붙잡았는데, 이제는 나부터 생각하게 돼요. 좋은 작품이 제안 오면 하는 거고, 좋은 제안이라 할지라도 쉬고 싶으면 고사하는 거죠. 이거 촬영하면 내가 힘들까? 나 잘할 수 있나? 이제는 이렇게 생각해요.
연기자로 살다가 다른 종류의 일을 하면 재밌지 않아요?
맞아요. 출퇴근 패턴에 금방 적응되더라고요. 처음에는 9시에 어떻게 출근하나, 6시에 어떻게 퇴근하나, 그랬는데 해보니까 일상이더라고요. 6시에 퇴근해 집 가면 7시. 밥 먹으면 8시. 그럼 8시부터 뭐해요. TV 좀 보다가 자고. 이 생활이 정말 안정적이고, 대체복무요원이라 잘릴 걱정도 없고, 그러니 새롭고 재밌었죠. 근데 조직에 속해보니까 직장인의 고충을 알 것 같아요. 저는 프리랜서니까 한 번도 느껴본 적 없거든요. 예를 들면 2, 3분 지각할 때가 있잖아요. 눈치 보면서 슬그머니 자리에 앉으면 “종석 씨! 늦으면 어떡합니까?” 혼나고, 죄송합니다 하면서 눈치 보고. 사람들 보면서 사회생활이 뭔지도 느껴봤죠. 지금도 복지사 선생님들과 가끔 밥 먹어요.
그래도 야근 없는 게 얼마나 좋아요.
네, 직장인들은 퇴근하고 여가 시간이 없다는 걸 체감했어요. 회사원들이 호프집에서 치킨 먹는 게 정말 ‘소확행’이구나, 피곤하지만 그 두세 시간 동안 맥주 한잔 마시는 게 행복이구나, 깨달았죠.
영화 이야기도 해보죠. <마녀2>와 <데시벨> 두 편의 영화 촬영을 마쳤어요. 두 작품 각각 선택한 이유가 다를 것 같아요.
<마녀2>는 앞서 박훈정 감독님과 <VIP>를 했었어요. 감독님이 “많이 안 나오는데 역할이 ‘까리’하거든” 그러시길래 “할게요” 하고 대본을 받았죠. 특별한 계기라기보다는 감독님이 “이 역할 좋아” 하셔서 결정했어요. 악역 아닌 악역 같은 캐릭터라 재미있는 역할이에요. <데시벨>은 바로 해야겠다는 생각보다, 쉴 생각이었어요. 쉬면서 들어온 시나리오들을 봤는데 술술 읽히더라고요. 이 역할 되게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겠다 싶어서 출연하게 됐죠.
<마녀2> 시나리오를 받아보니 어떻던가요? 기대 이상이었던 점이 있나요?
시나리오 보고 “아 이거는 내가 너무 잘하는 거지” 했어요.(웃음) 감독님이 왜 내 생각을 했는지 알겠더라고요. 저와 작업하셨으니 제 억양까지 다 파악해서 대사를 쓰신 것 같았어요. 대사를 읽었을 때 이건 잘할 수 있겠다 싶었죠. 자주 등장하진 않는데 나올 때마다 대사가 너무 많아서 힘들었어요.
액션도 했어요?
살짝 스포해드리면 상황이 종료되면 뒤에서 폼 잡고 서 있어요.
그럼 <데시벨>에서는 액션을 기대해도 될까요?
아 네. 이거는 할 말이 있죠. 처음 시나리오에는 액션이 없었거든요. 근데 출연 결정하고 도장 찍고 보니 액션 신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힘들었어요.
액션이야말로 영화의 힘 아닌가요. 합 위주의 예전 액션 영화에 비해 요즘은 액션들이 너무 멋있어요. 비주얼이 진짜….
액션 신은 힘들어하는 편인데 재미있었어요. 액션을 하다 보면 서로 다칠 수 있잖아요. 때리는 거든 맞는 거든 마음이 너무 불편해요. 맞는 쪽이 차라리 마음 편하고, 합 맞추고 하더라도 마음이 불편해서 액션은 피하고 싶은 성향이 좀 있어요.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선 종석 씨가 가장 드라마 애청자예요. 최근 인상적인 드라마가 있나요?
이제는 드라마 보면서 “아 저 배우 정말 연기 잘한다. 어떻게 저렇게 하지? 대본을 어떻게 읽었을까?” 이걸 생각해요. 예전에는 드라마 보면서 나의 생각의 가지가 다른 방향으로 뻗어가고, 나도 저런 연기를 해보고 싶었다면, 요즘은 단순해요. 직관적으로 보고 “아 저 배우 정말 훌륭한 배우다. 이거 연출 누구야?” 이 정도예요.
드라마 보는 방식이 달라졌네요.
네, 많이 달라졌어요. 아, 이것도 영향이 있다면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전에는 대본 안에 저를 이입시켜서 캐릭터의 입장에서 봤다면, 대체복무를 하면서는 일을 쉬고 있으니까 정말 시청자 모드로 편하게 봤어요. 지금도 드라마 첫 방 하면 다 찾아봐요. 정말 어지간한 것들은 다 봐요. 첫 방 보고 이거는 내 취향이다 아니다 판단하죠.
OTT는 사용자의 알고리즘에 따라서 추천해주잖아요. ‘너는 이걸 좋아해’라고. 종석 씨는 무엇을 좋아한대요?
한국 영화 중에 누아르 같은 것들이 많이 떠요.
요즘은 한 편으로 완결되는 영화보다는 시리즈가 더 각광받는 것 같아요. 플랫폼은 사용자를 묶어둘 수 있어서 좋고, 창작자는 긴 호흡으로 일할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아요. 배우들은 어떨까요?
시리즈가 늘어난다면 배우에게는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죠. 캐릭터를 구축하는 단계가 가장 힘든데요. 좋은 캐릭터를 하나 생성하고, 그게 시리즈화되면 배우는 좋죠.
<빅마우스>를 드라마 복귀작으로 선택한 이유는 뭔가요?
안 해봤던 캐릭터와 장르예요. 극적인 요소가 많아요. 감독님이 작품 준비하실 때 연락을 드렸어요. 요즘 뭐 준비하시냐고. 준비 중인 내용을 슬쩍 봤는데, 재밌는 거예요. 그래서 감독님께 “그럼 저랑 같이 하실?”(웃음) 하고 물었죠. 나이대가 조금 있는 역할이에요. 결혼했다는 설정이기도 하고요. 제가 맡으면 도전하는 모양새라 스트레스받고 잘해야겠다는 강박에 시달릴 것 같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재밌을 것 같았고, 새롭겠다 싶었죠.
어제 첫 촬영 하셨는데, 긴장 좀 되었겠어요?
되게 떨렸죠. 이전과는 다르게 연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데, 사실 그게 잘 안 돼요. 긴장이 됐지만 오랜만에 촬영하니까 재밌던데요? 예전에는 잘해야겠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잠도 설쳤는데, 어제는 발걸음도 가벼웠고 잠도 잘 잤어요. 전에는 땀이 흐르면 NG라고 생각해서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는데요, 이제는 뭐 땀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아휴 더워” 하면서 내버려둬요. 땀 좀 흐르면 어떠냐, 피부가 좀 벌겋게 나오면 어떠냐, 마음가짐이 달라졌죠. 그래서 새롭다고 느꼈고, 재밌었어요. 다음 촬영 날이 기다려지고. 그리고 어제 부천의 한 아파트에서 촬영했는데, 아파트에서 찍으면 사람들이 나와서 보잖아요. 뭐하는지 궁금해하기도 하고. 그래서 첫 촬영인데 주민분들이 다 나와 구경하셔서 더 긴장되기도 했어요. 긴장돼 땀 흘리는데, 날씨도 덥고 옷도 두꺼웠고요.
무대에 오른 것 같았겠네요?
네, 정말 재밌었어요. 어느 주민분이 지나가시면서 “와! 되게 동안이다!”(웃음) 하셨는데, 그 어머님 이해합니다. 얼굴은 알겠는데 이름은 모르겠고, 근데 칭찬은 해야겠고. 그러다 보니 난생처음 들어본 칭찬을 받았어요.
관심 갖는 주제가 있나요?
태닝이요. 건강한 까무잡잡한 피부가 예뻐 보여요. 저는 원래 하얘서 평생을 하얗게 살았잖아요. 구릿빛 피부가 건강해 보여요. 그래서 태닝을 조금 해봤어요.
피부가 흰 사람들은 빨개지지 않나요?
네, 맞아요. 태닝에 관심이 생긴 게 작품 때문이에요. 육상하는 장면이 있는데, 육상 하는분을 보면 탄탄한 근육과 까무잡잡한 피부잖아요. 제가 짧은 반바지에 민소매인 유니폼을 입어보니까 허벅지나 팔이 너무 하얀 거예요. 아, 이거는 너무 거짓말 같다. 그래서 시도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태닝에 관심 갖고 있어요.
코미디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저는 정말 코미디 좋아하는데, 코미디의 호흡은 그게 뭔지 아는 사람들이 잘하는 것 같아요. 각자 자기 호흡으로 연기하더라도 템포감 있게 말하는 사람들이요. 그런 사람들이 코미디에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저도 존경하고, 코미디는 해보고 싶어요. 하지만 저한테 코미디 DNA가 없을지도 몰라요.(웃음)
본인의 연기가 프레임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무래도 해석하면서 연기하는 게 훈련되고 몸에 체화된 게 있으니까요. 근데 모르겠어요. 저도 계속 작품을 해야 제 상태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은 어디쯤에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마지막 질문인데요.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고민이 있나요?
아직 모르겠어요. 내가 무언가를 어떻게 하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뚜렷한 방향감 없는 상태예요. 그거 하나인 것 같아요. 방향성을 갖고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고. 연기하는 게 정말 재밌다. 이 과정 자체가 재밌어요. 팬들이 기다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작품을 잘 해내는 것. 그것 말고는 인생의 방향성은 아직 갈피를 못 잡고 있어요.
자신이 재밌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그걸 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게 좋은 거겠죠.
제일 좋아하는 건 작품 보기. TV 보고 영화 보는 걸 좋아해요. 사실 제 작품 보는 게 제일 재밌어요. 그동안 연기해오며 겪었던 강박을 보는 걸로 보상받았거든요. 스스로를 푸시하며 스트레스받았던 건 자책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너무 좋았어요. 근데 지금은 찍는 것도 재밌어요. 결과물은 아직 못 봤지만 어쨌든 행복해요.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