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밑동에 굴을 파다’라는 전시 제목이 인상적이다.
전시 작품을 만드는 방식에서 착안했다. 스티로폼이라 불리는 폴리스티렌에 굴을 파서 여러 색으로 조색된 에폭시를 비롯한 재료를 부어 넣고 녹인 후 폴리스티렌을 제거하는 네거티브 캐스팅 방식이다. 굴 안에 다양한 재료를 부어 넣는 작업이 무지개가 흘러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져 제목을 그렇게 지었다.
굴을 판다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비트코인에 채굴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미지 처리 장치를 통해 코인을 얻는다는 건, 이미지가 곧 자본이 되는 현대 사회를 그대로 말하는 것 같지 않나? 어두컴컴한 공장에서 과열되며 돌아가는 채굴기의 이미지가 매력적이었고, 그것을 내 작업으로 가져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채굴해서 나온 작품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수석에 취미가 있다고 들었다.
작은 돌을 통해 산과 물, 구름과 바다의 형태를 본다. 일부가 전체를 담는 ‘축경’이 내 작업의 바탕이다. 돌은 자연에 있는 자연물이라 바람과 물살에 깎이며 만들어지고, 구성 성분은 그것이 위치한 지형·환경·기후적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내 작업에서 축경은 어떻게 수행될 수 있을까? 세계의 풍경을 작은 사물로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자연으로만 환원되지 않기에 그 재료와 만드는 방식을 고민했다.
그래서 폴리스티렌, 에폭시, 시멘트 같은 인공적인 재료를 택했나?
맞다. 내가 사용하는 폴리스티렌이나 에폭시 같은 재료들은 건축 내외장재, 바닥재 등으로 쓰인다. 값싸고 인스턴트하고 편리하고 가볍고 잘 변형되며 도시를 조직하는 보편적 물질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떠받치고 있다. 만들어진 지 100년도 안 된 현대적 재료의 물성을 극대화해 나오는 형태엔 현재 세계의 풍경이 담겨 있으리라 생각했다. 또한 이 재료들을 과거에 있던 목재나 대리석 같은 재료들과 같은 방식으로 다루는 데는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들만이 가진 고유한 형태나 성질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조각을 하고 싶었다. 에폭시는 일정 이상 부으면 과열돼서 터지고 균열이 간다. 잘 휘발되고 연약하며 동시에 유해하기도 한 이 재료들은 자신과 닮은 풍경을 만들어내더라. 형형색색 산만하고 무너져가는 도시. 현재의 동시대 재료에서 가져왔는데 결과물이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연상케 한다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재료끼리의 예측할 수 없는 화학 반응에 일정 부분 맡기는 작업 방식을 취한다. 예측 불가능성과 작가로서의 의도 사이에 딜레마가 있진 않은가?
작업할 때 가능한 한 내 의도보다 재료가 지닌 물성에 맡기려 한다. 대략적 크기와 구조 정도가 내가 통제하는 부분이고, 파놓은 굴 안에 재료를 부어놓으면 재료들이 알아서 형태를 만들어야 해서 날씨와 온도 등 변수도 중요하다. 실패하는 경우도 있고, 원했던 것보다 잘 나온 경우도 있다. 결과물이 나오기 전까지 보지 못하니 다른 작업을 할 때보다 예민해지고 의심하게 되고 상상하게 된다. 작업할 때 작가의 감각 자체도 바꿔놓는다는 점에서 도전적이지.
막 뱉은 듯 축축하고, 갓 튀긴 듯 뜨거울 것 같다. 촉각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에폭시가 과열돼 폴리스티렌을 녹이며 나온 텍스처다. 표면을 다듬지 않고 올려놓는다.
예술도 가상현실로 가는 지금, 젊은 작가로서 물성에 집중하는 까닭이 있나?
재료들이 내가 가진 얄팍한 의도와 이미지를 뛰어넘으며 다른 차원을 보여줄 때 느껴지는 감각이 좋다. 조각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도 구체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손으로 물체를 주무르고, 캐스팅·모델링·카빙 등 물리적 공정을 거치고, 공간을 거추장스럽게 차지하며, 감상하려면 몸을 움직여야 한다. 조각은 공간을 360도 둘러보면서 경험할 때 알 수 있으니까. 점차 가상으로 나아가는 세계의 반대에 있는 구체적이고 낡고 번거로운 장르다. 그렇지만 조각만이 가진 매체성을 극단으로 추구해 심미화하려는 건 아니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건 복잡하고 난해하고 알 수 없는 이 세계를 조각을 통해 직관적으로 형태화하는 것이다.
번쩍이는 형광부터 암색까지 다양한 색채가 가로지른다. 당신에게 색은 어떤 의미인가?
색은 인공적인 재료들의 물성을 반영하는 동시에 내가 소비하는 인스턴트 문화에서 가져온다. 애니메이션, 게임, 라이브 스트리밍 등 자극적이고 유치하고 유해하며 너무 많이 쏟아져서 모든 시간을 잡아먹고 마는 것들. 색을 다양하게 쓰는 이유도 있다. 재료를 부을 때 단계별로 다른 색을 조색해서 층층이 붓고, 최종적으로 색이 달라진 부분을 사후 관찰하게 된다. 지질학자처럼 생성된 과정을 가늠해보는 것이 흥미로워 두 가지 이상의 색을 쓰기 시작했다. 폴리스티렌 덩어리에 갇혀 있던 걸 긁어내고 녹여 발견할 때면 광석을 캐내는 느낌이다.
‘아토그’ 시리즈는 말레비치의 ‘아키텍톤 고타’(1923)의 영문 제목을 뒤집어 작명했다. 추상을 추구했던 말레비치의 작품과 물성을 강조한 당신의 작품은 닮은 듯 정반대에 있는 듯하다.
말레비치의 아키텍톤 시리즈에 관심을 갖게 된 출발점은 ‘조각에서 풍경을 다룬 선례가 있을까?’ 하는 물음이었다. 조각은 인물상을 중심으로 전개됐기에 풍경을 부조로 새기는 건 많았지만 프리스탠딩 조각을 풍경으로 제시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미술사 중 말레비치의 이 작업이 선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추구하던 절대주의 회화의 조형 요소를 하나의 건축물, 나아가 도시로 만드는 작업이었으니까. 말레비치는 석고 입방체를 쌓아올렸지만, 나는 폴리스티렌을 파내 빈 공간을 떠내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위아래로 형태가 뒤집힌다는 점에서도 반대이기에 알파벳을 뒤집어 ‘아토그’라 이름을 붙였다.
당신의 작품엔 동시대적 시각과 고전적 태도가 함께 있다.
나는 수석 문화를 아버지나 할아버지에게서 접하지 않았다. 인스타그램 추천 포스트가 떠서 들어가 봤는데 미국인이 수석 사진을 올리는 계정이었다. 전통과 아무런 상관없이, 근본 없이 좋아하게 된 거다. 휴대폰으로 자극적인 콘텐츠를 보다 수석 사진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고 잠이 잘 와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웃음) 최근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젊은 회화 작가, 조각가들이 많이 등장한다. 내 생각엔 199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우리 세대는 퍼포먼스, 미디어 아트 등 다원예술의 흐름 하에 있었고 학교 커리큘럼도 그러했다. 나뿐 아니라 동시대 동료 작가들도 전통적인 걸 경험할 기회가 드물었기에 역으로 더 새로웠던 것 같다.
이번 전시에 기지국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 많다. 19세기 노동자들이 기계를 파괴한 러다이트 운동을 떠올리게 하는 ‘러다이트 방화’는 불타는 기지국 같은데?
기지국에 관심을 가진 건 영국 SNS를 통해 터진 가짜뉴스 ‘5G 기지국의 전자파가 코로나를 퍼트린다’ 에서부터였다. 작업의 소재로 삼은 기지국, 해저 케이블, 데이터센터 등은 현재를 잘 나타내는 사물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조직하고 생산해내는 것들이니까.
사회에 대한 비판적 관심이 높아 보인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이란 세계의 본질을 압축해 표현하는 것이고,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비판을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상 이면엔 늘 무언가 있기에 그것을 걷어내 보는 과정 자체가 비판이다. 인터넷과 가짜 뉴스가 만연하고 실물경제와 멀어진 오늘날 우리는 가상에 가까운 삶을 산다. 뭘 하나를 사먹는 데도 수많은 사회적 인과관계가 있고, 고도로 추상화되어 일일이 헤아리기란 어렵기에 늘 음모론적 상태에 처한다. 뉴스를 봐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상태. 그런 감각이 현실을 살아가는 데 늘 작동하고 있다.
젊은 작가로서 당신의 야심은 뭔가?
동시대의 많은 작업들을 볼 때 느끼는 게 있다. 현재적 문제를 다룰 때 작품과 사회의 관계를 1차원적으로 생각하는 작품들이 있다. 한편 회화나 조각 같은 전통적 매체들이 현재적인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인테리어나 장식적인 관심사로 소비된다. 양쪽 다 아쉽다. 그렇다면 나는 형식과 사회적 문제라는 양자를 어떻게 하면 흥미롭게 관계 맺을까? 이것은 오래된 미술의 문제이기도 하다. 예술과 사회는 분리되지 않는다. 설득력 있는 위대한 예술에선 늘 그 둘이 유기적으로 관계 맺는다. 내가 생각하는 훌륭한 예술이라는 게 그런 거고, 나 역시 그런 작업을 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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