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의 사연
아주 오랫동안, 아주 가끔 연락을 드리곤 했다.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수상이라는 쾌거를 올리고 귀국했을 때에는 시원한 맥주를 한잔 들이키기도 했고,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을 포함한 4관왕에 오른 이후에는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인터뷰 날짜를 정해두고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그때마다 “예전에 저와 했던 인터뷰 기억나시죠? 기사 제목이 ‘봉준호 감독, <괴물>에서 <설국열차>까지’였어요. 그런 인터뷰 자리를 한번 마련하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전혀 만들어지지 않은, 아니 거의 이야기 단계만 있었을 뿐인데 유독 그 인터뷰가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다시금 봉준호의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이런 사연으로 이번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체중 감량을 많이 하신 듯해요.
작년 가을에 한의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의 지도 편달을 받았어요. 좋았어요. 체중도 체중이지만 생활 습관이 건강해졌어요. 변변치 않지만 운동도 좀 하고, 걷는 양도 유지하고, 먹는 것도 조절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12kg을 감량했어요. 여전히 나는 ‘비만자’이긴 하지만. 현재는 그걸 유지하고 있어요. 정상 체중 범위로 진입하려면 12kg 정도를 더 빼야 하는데, 시나리오 다 쓰고 나서 올가을쯤에는 2차 시기를 한 번 더 들어가려고. 지금 시나리오를 쓰고 있으니까. 오늘도 그거 쓰다 나왔어요.
라이프스타일 패턴도 많이 바뀌었을 것 같아요.
몇 년 전부터는 무조건 새벽 5시에서 5시 30분 사이에 눈이 떠져요. 일어나서 냉장고 열며 부스럭거리고 바로 시나리오를 쓰기도 하고, 아침에 블루레이로 영화를 보기도 해요. 밤에 영화를 보면 피곤하고 중간에 꼭 조는데, 아침에 보면 좋아요. 사람들과 약속도 아침 9시나 10시에 만나자고 해요. <기생충> 때도 그랬어요. 한국 영화계에도 2015년경부터 표준근로협약이 잘 정착되었어요. 일찍 끝나고 너무 좋더라고.
다시 한번 봉준호 감독의 신작 프로젝트를 놓고 이야기하게 되었네요.
우리가 내 과거 프로젝트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게 2007년 봄이었나요?
2007년 4월, 지금은 사라진 영화 주간지에서 저와 인터뷰를 하셨죠.
<설국열차> 그래픽 노블을 들고 사진 촬영하고 그랬던 것 같아. 그 인터뷰 때 주영 씨에게 편안하게 상세한 이야기를 했죠. 하지만 막막했어요. <괴물>을 끝내놓고 <도쿄!> <마더> <설국열차>라는 스스로 정해둔, 차례대로 돌파해야 할 것들에 대한 이야기였잖아요. 일본에 촬영하러 갔다가, 김혜자 선생님을 모시고 시골로 갔다가, (‘대체 이걸 어떻게 만들 거냐?’는 소릴 듣던) <설국열차>를 들고 체코 세트장에도 있었으니까. 주영 씨와 했던 인터뷰가 그 시절 향후 6~7년의 내 삶에 대한 이야기였죠. 당시에는 말하면서도 얹히는 느낌이 있었어요. 내가 정말 이 3편을 다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날이 오긴 올까라는 막막함이 있었죠.
그런 체증과 부담감이 있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그런데 그게 다 과거형이 됐잖아요. 그 세 편을 하고도 <옥자> <기생충>까지 했으니까. 오늘 인터뷰하러 오면서 그때 생각도 나고. 아무튼 그 인터뷰 이후 <설국열차>를 완성하는 데까지 대략 7년이 걸렸잖아요. 오늘 이제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그 정도의 세월이 걸릴 거고.
그래서 이번에는 가제로 ‘봉준호의 60세까지 프로젝트’라는 제목을 붙여봤어요.
하하하하. 57세 프로젝트라고 해줘. UN이 새롭게 발표한 연령 구분 알아요? 거기선 18~65세를 청년이라 규정해요. 그러니까 ‘청년’ 봉준호 프로젝트인 거죠.
감독님과의 사적 인연은 <괴물> 프리 프리덕션 때부터니까 벌써 17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네요. 현재는 영화 전문 기자도 아닌데 이렇게 신작 이야기를 해주신다니 감사해요.
전문 기자였잖아요. 그런데 오늘도 오래 전 그 인터뷰처럼 딱히 특별한 정보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신작을 대하는 내 마음 같은 건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거니까.
감독님의 공식 인터뷰가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과 아카데미 작품상 등을 거머쥔 후 거의 처음 아닌가요?
사실상 첫 인터뷰네요. 또 다시 저의 앞으로의 6~7년간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이기도 하고.
애니메이션을 한국 영화 신작으로 할 거라는 소식이 이미 전해졌어요. 언제까지 하시려고요?
포스크리에이티브파티와 이야기하면서 늦어도 2025년~26년에는 완성해야 하지 않겠냐고 해요. 애니메이션이 보통 기획부터 완성까지 대략 6~7년은 걸리는 게 보통이니까. 픽사 스튜디오에는 이런 게 있대요. 처음 기획 때 태어난 아이들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갈 때쯤 개봉한다 해서 ‘프로덕션 베이비’라는 별칭을 붙이고, 그 아이들 이름을 엔드 크레딧에 올린다나 어쩐다나. 아무튼 뒤에 이어 이야기하겠지만 미국 영화와 애니메이션까지 하면 6~7년은 걸릴 것 같아요. 내가 해결해야 할 두 편, 이런 말하면 이상한데, 나는 영화 한 편 한 편 기획하고 준비할 때마다 스스로 짐을 짊어지는 것처럼 느껴요. 여전히 내게 영화는 부담스럽고 그래요. 일단 하겠다고 선언해놓고, 그날부터 마음이 불안해지는 거 있잖아요.
저와의 인터뷰가 그 불안감을 좀 해소해주면 좋을 텐데요.
아무튼 그걸 떨쳐내는 게 이 인터뷰의 핵심이에요. 과거에 우리가 했던 인터뷰도 부담스럽고 막막했던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결국은 했잖아요. 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3편을 완성하고, 이후 2편이나 더 했고. 오늘 이야기하고 나면 또 몇 년 후에는 그렇게 되겠거니 싶은 마음의 안정감을 좀 느끼려 해요. 참, 주영 씨 축구 좋아해요?
아니요. 국가 대항전만 보는 정도예요. 왜요?
유로 2020이 한 해 밀려서 얼마 전 개막했죠. 나 어릴 때부터 축구팬이잖아. <기생충> 오스카 레이스 인터뷰 중에 네티즌들과 즉석에서 문답 형식의 진행이 있었는데, 그때 질문이 “생사 여부에 관계없이 저녁 만찬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 5명을 말해 달라”는 거였거든. 알프레드 히치콕, 마틴 스코세이즈,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 김연아, 그리고 맨체스터 시티의 케빈 데 브라위너를 이야기했어요. 한국 팬들은 ‘덕배’라고 부르는 선수인데,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이죠. 내가 공격형 미드필드 플레이어들을 좋아해요. 고등학교 때는 최순호 선수를 좋아했고, 프랑스의 미셸 플라티니 같은 아름다운 선수들을 사랑했죠. 아무튼 거기서 케빈 데 브라위너의 이름이 절로 나왔지. 그 기사를 맨시티 구단에서 봤나 봐. 맨시티 홍보팀에서 홈경기 일정 3개를 주면서 하나를 고르면 자기네가 항공권과 숙박을 다 제공하겠다고 말이야. “와” 하고 환호성을 질렀지만 코로나19 사태가 터졌죠. 2020년 2월의 이야기예요.
新作 I. 소설 원작 영화
지금 포털 사이트 검색 창에 ‘봉준호 신작’이라는 검색어를 넣으면 다음과 같은 기사들이 나열된다. ‘봉준호 감독의 첫 번째 차기작은 2016년 런던 사건의 CNN 보도에서 모티브를 얻은 해외 영화가 될 것’이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맞았지만 지금은 틀리다. 지금 봉준호는 그 프로젝트를 작업용 태블릿 PC의 깊숙한 폴더 속에 파묻었다. 그리고 새롭게 출간될, 아직 미출간 상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미국 영화를 준비 중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봉준호 감독은 두 편의 신작을 준비 중이라고 했어요. 그중 첫 번째가 외국 영화이고, 2016년 런던에서 일어난 사건을 CNN이 보도한 걸 보고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어요.
바로 그걸 정리해야 해요. 칸과 오스카 시상식 사이에는 진짜 그렇게 말을 하고 다녔거든. 지금까지도 내 해외 영화가 그걸로 오해되고 있어요. 진짜 2016년 CNN 보도를 보고 2018년부터 꾸준히 준비하고 있었어요. 자료 조사도 열심히 하고, 스토리라인도 짜고. 그런데 2020년 초에 마침 영국에 갈 일이 생겼어요. 영국영화협회(BFI)에서 틸다 스윈튼이 어떤 행사를 하는 자리였거든. 그녀도 내 <기생충> 상영 때 와주고 했으니까. 거기에는 <루카>의 엔리코 카라로사 감독도 왔고, 틸다와 작업했던 웨스 앤더슨 감독도 오고 그랬어요. 그녀를 축하하러 간 런던행에서 일정을 내어, CNN 보도 사건의 관련자를 만났어요. 엄밀히 말하면 그 사건의 당사자 가족을 만난 거죠.
전 사전 정보도 없이 해외 영화 관련 뉴스를 보고 <살인의 추억>을 떠올렸어요.
<살인의 추억>! 이춘재 사건.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다행히 범인은 체포됐지만, 실제 사건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 때 창작자가 겪는 여러 가지 압박감과 고민이 있어요. <살인의 추억> 직후, 다시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지 말아야지 했어요. 마음고생이 많았거든. 실제 사건이기에 관련된 분들이 있고, 칼날과 같은 균형감에서 1mm만 삐끗해도 상처받는 이가 생기고, 감독인 내게는 도덕적, 미학적, 윤리적 책임도 있고. 너무 힘들더라고. 개봉 후 좋은 평가도 받고 상도 받으며 흥행에도 성공했지만 어디서든 항상 조신하게 있어야 했어요. 다행히 관련된 분들이 영화를 좋게 봐주시고, 해결하지 못한 원통한 사건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나누는 진심이 통해서 탈은 없었어요. 그래도 부담스럽고 힘들었고 두 번 다시 실제 사건 영화를 안 하리라 마음먹었죠.
어떤 내용인지 전혀 모르지만 대략 제 짐작이 맞았나 보네요. 다시 하지 않으려 했던 작업을 결국 하기로 하신 건가요?
세월이 흘러서일까?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거리감이 있어서 그랬을까? CNN 보도를 보고 마음을 뺏겼어. 그런데 실제 가족을 만나 긴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런던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마음이 정리가 되더라고. ‘아, 이거 하지 말아야겠다’고. 나에게나 그 가족에게나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 시점에서 1년 반 넘게 준비해 오던 프로젝트였는데 스스로 접어버렸어요. 이 얘기는 처음 하는 거예요. 많은 이들이 내 다음 실사 영화를 이걸로 오해하고 있어. 범죄 사건은 아니고 휴먼 스토리이긴 했는데.
아, 그러면 그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작품은 사라진 거네요.
맞아요. 내 신작 이야기를 어느 시점에 정리했어야 하는데, 그럴 기회가 없었어요. 딱히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니고. 하하. 이렇게라도 오늘 처음 정리하는 거죠.
그럼 봉준호 감독의 8번째 장편 신작은 대체 무슨 영화예요?
아무튼 꽤 오래 준비한 프로젝트를 접었으니 마음 한편이 텅 비었을 거 아냐. 진짜 이미지도 여럿 모으고, 이야기도 썼지만, 내 태블릿 속의 ‘2016년 런던 사건 CNN 보도’ 관련 폴더는 아이 클라우드의 깊숙한 곳에 묻혀버렸어요. 물론 다시 꺼낼 일도 없을 테고. <괴물> 작업을 할 즈음부터 내겐 미국 에이전트가 있었고, 그쪽을 통해서 작품 제안이 꾸준히 들어왔어요. 내 영화의 스타일을 알겠지만 대부분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만들었던 만큼 숱한 제안을 대부분 넘겨버렸죠. 2020년 6월쯤이었나? 미국 제작사와 미국 기존 영화 스튜디오에서 소설 한 편을 영화화하자는 제안이 왔어요. 스토리에 금세 매혹됐어요. 아직 출간되지 않은 소설인데, 그걸 지금 각색하고 있어요.
놀라운 소식이네요. 많은 이들이 아직도 봉 감독의 해외 영화는 런던 사건이라 생각하고 있을 텐데요. 아무튼 이 신작은 대체 어떤 이야기인가요?
곤경에 처한 인간 이야기죠. 그 인간이 좀 지질하기도 하고, 연민이 가기도 해요. 그런데 유니크한 상황에 처해요. <기생충>과는 표면적으로 분명 다른데, 나중에 보고 생각해보면 묘한 연결 고리가 있을 거예요. 물론 <기생충>과 유사한 점이 있어서 이 소설을 택한 건 아니에요. 아이디어도 좋고, 캐릭터가 재미있어서 하게 된 건데,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그런 연결 지점이 있더라고.
영화보다 책이 먼저 출간되나요?
계약할 때 그래도 좋겠다고 이야기는 했어요. 원작과 많이 다르니까. <설국열차> 원작 만화 봤죠? 영화랑 전혀 다르잖아요. 달리는 기차 안에 생존자가 있고, 밖은 빙하기다. 이거 외에는 원작과 완전히 다르거든. 신작도 핵심 콘셉트는 원작에서 따오지만, <설국열차>만큼 달라질 것 같아요. 크게 봐선 원작과 유사한 장르가 될 텐데, 내가 약간씩 흙탕물을 끼얹겠죠? 지금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예요.
촬영은 그럼 미국에서 진행되겠죠?
로케이션보다는 세트 분량이 더 많으리라 추측하는데. 어쨌든 완전한 미국 영화예요. 영어권 배우들이 출연하고, 미국 제작사 작품이니까. <설국열차>는 한국 투자, 여러 나라 배우, 체코 세트장 등이었고, <옥자>는 자본 측면에서는 완전 미국 영화지만, 미국과 한국 프로덕션과 로케이션이 섞여 있었으니까.
크랭크인은 언제쯤 될까요?
올해 안에 시나리오를 마무리하고, 모든 일이 잘 진행되면 내년엔 찍어야겠죠.
<마더>는 김혜자, <기생충>은 송강호, 최우식 배우를 미리 염두에 두고 쓴 시나리오라고 들었어요. 그럼 이 미국 영화의 캐스팅에 관한 소식은 없나요?
주인공에 대해서는 프로듀서들과 얼마 전에도 의논했어요. 현재 2~3명 정도 염두에 둔 배우들이 있긴 해요. 그러나 글을 쓰다 보면 마음이 약간씩 바뀌기도 할 거고, 확정된 캐스팅으로 쓰고 있는 상태는 아니에요.
제목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몰라 답답해 죽겠네요. 아무튼 미국에서 만들, 그러니까 <기생충>의 후속작은 언제쯤 극장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2023년? 내년에 찍고, 빨리 개봉해야지. 그래야 애니메이션에 몰두하지. 애니메이션에 관해서 할 이야기가 많아요.
新作 II. 심해 생물 애니메이션
함께 식사하던 사석에서 봉준호는 애니메이션을 준비 중에 있다고 말했다. 이건 <기생충>의 지하실에 몇 년째 기거 중이던 배우 박명훈의 존재만큼이나 소름 끼치는 소식이었다. 며칠 후 그 애니메이션에 대한 짧은 뉴스들이 보도되었다. 감독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업계의 소식을 종합한 뉴스였다. 곧장 제작사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그렇게 봉준호의 한국 영화 차기작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심해 생물과 뭍 위의 인간에 대해 다루는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그래요. 그럼 감독님의 9번째 신작에 대해 얘기 나눠 보아요. 사실 다음 한국 영화는 서울을 소재로 한 공포 영화라고 알려져 있었거든요.
이것도 이 인터뷰를 통해 정리되어야 할 부분이에요. 서울을 무대로 한 공포 영화는 언젠가 도전할 거예요. 2001년부터 구상해온 내 꿈의 프로젝트이기도 하고. 유혈이 낭자한 피바다 영화일 거예요. 그런데 지금 내게는 그걸 만들어 낼 용기가 없어요. 마음의 맷집이 형성되지 않았다고 할까?
CNN 런던 사건 보도 모티브의 영화는 접은 프로젝트가 되었고, 서울 공포 영화는 미뤄진 거네요. 그럼 이미 보도가 나간 심해 생물 애니메이션이 감독님의 두 번째 신작이네요.
그렇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2019년에서 2020년 초반 사이에 내가 이야기했던 두 편의 영화가 다음 신작이 아닌 게 된 거지. 애니메이션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2017년 말에서 2018년 초 사이였어요. 꼭 만들고 싶지만, 내 작업 리스트의 후순위에 있는 게 애니메이션이었어요. 조금씩 준비해서 먼 미래에 하려고 했던 거지. 그게 좀 당겨진 거죠. 실제 사건 영화화를 접고, 한국 공포 영화도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심해에 사는 생물을 그리는 애니메이션은 어떻게 시작된 프로젝트인가요?
아내 덕분에 이걸 하게 됐어요. 2017년 언제쯤인가, 아마 내가 <기생충> 준비하고 있을 때였던 것 같아요. 그즈음에 아내가 서점에서 보고 반해서 구입했다며 책 한 권을 가져왔어요. 프랑스 자연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저널리스트인 클레르 누비앙의 <심해 abysses>였어요. 아주 아름다운 책이에요. 무슨 스토리가 있거나 한 건 아니고 과학 서적인데 컬러도, 사진도 너무 아름다워. 갑자기 책 장사가 된 것 같네. 하하. 표지 사진도 그렇지만 그 자체가 CG 같은 거야. ‘이게 실제 잠수정에서 찍은 거라고?’ 생물체의 형태도 신비롭고.
클레르 누비앙의 <심해>가 원작인 거예요?
과학 서적이니까 원작은 아니지만 추후 크레딧에 경의를 표해야겠지. 아무튼 제작사 포스크리에이티브파티 이전형 대표를 위시한 핵심 아티스트들에게 이 책을 한 권씩 나눠주며 ‘우리 작품의 출발점이며 바이블’이라고 했어요. 작품을 최초 구상할 때 이 책이 우리의 캐스팅 북이 되었어요. 배우들 자료집을 보며 캐스팅하듯, 이 책을 보며 ‘이 녀석은 이런 사연이 있을 것 같은데? ‘얘는 인간으로 치면 악동 같은 캐릭터인데?’ ‘얘는 40대 여인일까?’ ‘얘는 무조건 나와야겠어’ 등을 논했죠. 심해 생물이 흥미진진하더라고.
이미 심해의 생명체들을 다룬 영화는 꽤 있잖아요. 제임스 캐머런의 <어비스>도 있고. 심해라는 공간은 아름다울 수도 있겠지만, 제일 먼저 공포스러운 생각이 떠올라요.
칙칙하고 무섭기도 하지. 얘네들이 스스로 빛을 내요. 그런 생물이 많이 있어요. 주인공은 의외로 귀여울 수도 있어요. 그러나 흉측하고 괴팍한 애들만 나오는 영화가 아니에요. 심해지만 나름 아기자기하게 살아보려는 애들도 나오고. 바다 위 육지도 나와요. 인간들은 거기 있는 거지. 남태평양의 햇살이 쏟아지는 윗동네와 심해라는 아랫동네가 번갈아 가면서 나오고, 이상하게 드라마가 엮여 있어요. 첫 보도자료에 ‘심해 생물과 인간들이 교차하는 드라마’라고 소개했는데 그게 사실이에요.
작업은 어느 정도 진척이 되어 있어요?
2021년 1월 말에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1차 본을 마무리하고, 포스크리에이티브파티 아티스트들이 조금씩 작업을 하고 있어요. 마라톤에 비유하면 42.195km의 구간 중 초반 4km쯤 왔다고 할까요. 이건 아티스트들이 작업을 하고 있고, 나는 미국 영화 소설 각색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시나리오가 완성되기 전인 2020년 하반기부터 애니메이션을 위한 줄기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었어요.
<심해>의 사진들을 보며 심해 생물이 아름답다고 했는데, 그걸 그대로 내버려둘 감독님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미리 그러지 마요. 난 아름답게 만들 거야. 클레르 누비앙의 책을 보며 비주얼에 매혹되고, 심해 생물의 아름다움과 그들 간의 이런저런 사연들이 생각나는 거야. 물고기와 해파리를 비롯해 희한하게 생긴 애들이 많아요. 너무 영화적이지. 그래서 시작하게 된 거예요.
심해 생물 애니메이션 소식이 조금 놀랍긴 했어요. 봉준호가 만화영화라니!
왜?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애니메이션을 연출해보겠어요. 개인적으로 <매드맥스> 등을 만든 조지 밀러 감독을 좋아하고 존경하는데, 그가 애니메이션 <해피 피트>를 만들었잖아요. 그분을 칸, 시드니 영화제에서 몇 차례 만났어요. 조지 밀러 감독도 내 영화를 좋아해줘서 서로 팬으로 여러 이야기를 나눴지. <해피 피트> 때 이야기도 많이 여쭤봤어요. 실사 영화만 하다가 애니메이션을 하니 어쨌는지에 대해. 그분 성격이 낙천적인데, 정말 자기는 즐겁게 일했다고 하시더라고요. 날씨 걱정 안 해도 되고, 로케이션도 없고, 수정도 쉽다고. 좋은 이야기만 하시더라고. 하하. 한국 감독, 한국 CG 아티스트들이 한국의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은 목표가 있어요.
조지 밀러의 <해피 피트>는 해피한 영화죠. 봉준호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어둡잖아요.
시나리오를 썼고, 내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중학생 관객이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마음의 상처를 받지는 않을 거에요. 찝찝한 기분으로 극장 문을 나오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지.
대체 어떤 내용일까요?
자연이나 동물에 대해 우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마음이 있겠죠? 그런 것들이 애니메이션 속에 담길 것 같아요. 영화를 보고 나면 자연에 대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할 수도 있을 거라는 말이죠. 심해는 그 자연 중에서도 제일 이상한 자연이잖아요. 만나기도 힘들고, 어떻게 보면 인연을 맺기 힘든 생물체들이 존재하니까. 그럼에도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어쩔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런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감독님의 영화 속에는 지하실, 터널, 꼬리칸 등이 매번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내려갈 수 있는 가장 극단적 공간이네요.
맞네. 진짜 바다의 지하실이네요. 어두운데 귀여운 아이들은 어둠 속에서 빛을 내니 그게 돋보이잖아. 눈부신 직사광선이 쏟아지는 세계가 있고, 또 바닷속에 다양한 층위가 있고 전혀 빛이 없는 세계가 있고.
바다와 심해에 대해 공부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많이 했죠. 자료들이 엄청 쌓여 있고, 정기적으로 연락을 취하는 해외 심해 전문가 팀도 있고요.
지금 현재 진행 단계 속에서 일부 캐릭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나요?
맞아요. 움직이는 거 보면 신나지. 드로잉, 콘셉추얼 아트 등에서 시작해서 CG팀으로 넘어가 많은 수정을 거치고 일부는 움직이기도 하고. 계속 다듬어 나가는 중이에요.
심해 생물이 주인공이에요?
양쪽 다 있어요. 인간도 있고, 생물도 있고. 또 그들의 묘한 인연도 있고.
2026년이면 봉준호의 9번째 장편이자 첫 애니메이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일단 2025년에 깃발을 꽂으려 하는데, 그 전에 실사 영화 스케줄의 변수도 있으니. 목표가 그렇다는 거지. 그래서 제일 처음에 이야기했듯, 아주 오래 전 인터뷰처럼 이 모든 게 끝나면 주영 씨와 이 시간을 과거형으로 다시 이야기할 수 있겠죠. 요 두 편으로 2026년 정도까지의 내 삶의 트랙이 규정된 거니까.
新作 III. 서울, 유혈 낭자 공포물
애초 알려졌던 봉준호 감독의 신작 2편은 하나가 CNN 보도 모티브 외국 영화였고, 둘째가 서울을 공간으로 한 공포 영화로 알려져 있었다. 봉 감독이 대놓고 공포 영화를 만든 적은 없었기에 적잖이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이 공포 영화는 심해 생물 애니메이션에 ‘차차기작’의 순번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봉준호는 이 작품을 2001년부터 구상해왔고, 꿈의 프로젝트라고 말했다. 서울 공포 영화는 그의 ‘차차차기작’이 될지, 더 밀릴 수도 있는 기약 없는 작품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련히 기다릴 수밖에 없는, 관객 입장에서 꿈의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이제 굳은 마음을 가지지 못해 뒤로 미뤄둔 서울 공포 영화 이야기 좀 해요.
<기생충>이 7번째 영화였고, 지금 시나리오 쓰고 있는 미국 영화가 8번째, 애니메이션이 9번째 작품이 될 거고. 그 공포 영화가 10번째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그건 할 때 단단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니까요.
시나리오도 써놨나요?
여러 버전의 스토리라인이 있어요. 나라는 사람도 나이 들어가고, 세상의 모습도 이렇게 저렇게 변하면서 꿈틀거리는 아메바처럼 이야기가 이렇게도 됐다, 저렇게도 됐다 하고 있죠. 핵심은 계속 유지하고 있지만 계속 변하고 있는 중이에요. 2001년부터 구상했고, 2006년 버전이 있고, 2012년의 수정 버전이 있고 그래요. 언젠가 하긴 해야 하는데, 모질게 찍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에요.
한 줄 스토리는 이야기해줘도 되지 않나요?
타인에 대한 공포, 두려움? 이건 무슨 초자연적 존재나 귀신이 나오는 공포 영화가 아니에요. 사회적 공포 영화이고, 우리가 경험했던, 앞으로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경험해서는 안 될 그런 것들에 관한 이야기여서 지극히 현실적 공포감이 클 거예요. 시대 배경도 현재의 동시대이고, 그 공기가 아주 강할 텐데 그래서 더 공포스럽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몇 번이나 강조하는 이유죠.
정리해보죠. 미국 영화 제목은? 애니메이션 제목은? 서울 공포 영화 제목은?
미국 영화는 원작 제목은 있지만 출간되지 않은 소설이니 아직 밝히지 못하고. 애니메이션은 심해 애니메이션이라고 부르는 정도. 서울 소재 공포 영화는 공포 영화.
사연을 정리하며
인터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봉준호 감독은 “이 인터뷰를 하고 나면 6~7년 후에나 다시 보겠네요”라고 했다. 물론 차기작이 개봉하면 다시 그 작품을 두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장황한 인터뷰는 그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는 의미다. 에디터의 입장에서 <도쿄!> <마더> <설국열차>에 이르는 대장정의 시작을 함께할 수 있었고, 다시 한번 세계적 감독으로 거듭난 봉준호의 신작 프로젝트를 간략하게나마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봉준호와 인터뷰하게 된 사연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럼 제목은 전부 ‘무제’이거나 ‘?’로 표기할 수밖에 없겠네요. 이렇게 신작 준비에 여념이 없는데, 또 <설국열차> 시리즈의 시즌 3랑 <기생충>의 스핀오프 시리즈까지 제작한다고 하는데, 너무 바쁜 거 아니에요?
<설국열차> 시리즈는 현재 시즌 2까지 공개되었고, 시즌 3도 만든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여기에서 내 역할은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라서 원작자로 이름만 올린 정도예요. 시즌 1 초기에는 함께 논의를 했죠. 내가 별 신경을 못 쓰긴 했어요. 개인적 일로 캐나다 밴쿠버에 갔을 때 마침 거기에 세트장이 있어서 격려 방문을 한 정도예요.
<기생충> 시리즈는요?
HBO 제작으로, 에피소드 8~9개짜리 리미티드 시리즈가 될 거예요. 이건 프로듀서 중 한 명이라 제법 관여하고 있어요. 아담 맥케이 감독이 파일럿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전체 스토리라인, 구조, 콘셉트를 다 짰어요. <기생충>의 주제 의식을 이어나가기는 하는데, 완전 미국적 이야기로 변형 될 거예요. 영화보다 더 확대되어 있어 재미있을 거예요. 영화와 시리즈는 일대일로 대응할 게재가 아니에요. 콘셉트 자체가 상승되고 확대되어 있기 때문이죠.
아니 그러면 영화 <기생충>에서 지하실에 거주하던 아저씨가 던져준 쇼크는 어떻게 해요?
아우! 이제는 말할 수 있네. 하하. 당시에는 두 가족인 척 홍보하며 실상 세 가족이었던 핵심을 숨기느라 고생했는데.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견주고 비교할 게재가 아니라는 말이에요. 영화 속 상황을 시리즈로 대체할 수가 없으니까요.
마치 마라톤 같은 인터뷰가 이제 마무리되어 가네요. 다시 한번 봉준호 감독의 새로운 작품 이야기를 <아레나>가 함께 할 수 있어 흥미로웠어요. <기생충>의 아카데미 작품상을 포함한 여러 부문 수상은 전 세계를 뒤흔든 사건이었죠. 사실 그 이후 감독님은 잠적하다시피 했던 것 같아요.
사실 너무 많은 요청이 있었는데, 이 자리를 빌려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요. 사실, 인터뷰 요청을 일관되게 거절하고 사양했어요. 거기에도 많은 시간과 노동이 필요하거든요. 기분 나빠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국내외의 평소 알던 분, 뭔가 도움을 받았던 분들의 요청도 있었으니까요. 그 요청에 일일이 응대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 전해요. 제가 어디 놀러 다니고, 파티하느라 그런 게 아니니까요. 그 시간에 지금까지 말한 일들을 열심히 하고 있었어요. 꾸준하게 일만 하고 있었던 거니까 모두 이해해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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