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정가네 목장>에 출연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신인 감독들을 발굴하고 지원해온 제작사 용필름과 <표적>에서 인연을 맺었다. 용필름에서 <램스>라는 아이슬란드 영화를 우리식으로 리메이크한다며 관련 책을 보내주었는데, 내용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리메이크했을 때 정서적으로 재밌는 부분이 많을 것 같았다. 일상의 소중함에 대해, 형제에 대해 심도 있게 다뤘다는 점에 매료됐다.
형제는 가족이면서도 친밀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데면데면하기도 하고, 자주 소통하지 못하기도 하고.
서로 원해서 가족이 되는 관계는 부부다. 혈연 관계는 아니지만 사랑해서, 헤어지면 죽을 것 같아서 결혼한다. 하지만 사랑해서 서로를 선택하지만 때로는 시간이 지나 싸우고 헤어지기도 한다. 형제는 서로 선택한 관계가 아니다. 태어나 보니 저 사람이 형제인 거다. 아무리 혈연이라 할지라도 서로 선택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무조건 친하고, 사이좋기는 쉽지 않다. 서로 잘 맞는 형제도 있지만 너무 달라서 힘든 형제도 많다. <정가네 목장>은 후자의 이야기다. 형제가 서로 다를지언정 전 세계 인구 중 유일한 공통점을 가졌다. 같은 엄마, 같은 아빠다.
현실의 부모가 자식, 형제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가족과 함께 여행할 때는 여행지 조사, 숙박지 예약, 운전, 계산은 내가 한다. 아이들은 그냥 차 타고 가기만 하면 된다. 단, 출발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말한다. 준비는 내가 다 해놨다. 이 여행이 즐거우려면 단 한 가지만 지키면 된다. 무엇일 것 같나?
싸우지 마라?
맞다. 싸우지 마라다. 그런데 그게 안 된다니까. 부모가 돼서 알았다. 형제가 안 싸우고 우애 있게 지내는 모습은 부모에게 어마어마한 기쁨이고 바람임을. 아무리 돈 많이 벌고 유명해진다 하여도, 형제가 서로 원수처럼 지낸다면 과연 부모가 행복할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넉넉하지 않아도 서로 돌보며 지내는 것. 그게 부모가 원하는 거다.
많은 형제가 그렇듯 어릴 때는 서로 싸우며 자라지 않나? 형제가 사이좋게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싸우면서 면연력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회에 나가서도 싸우며 산다. 세상과 싸우고, 불합리와 싸우고, 부당함에 맞선다. 어려서 형제와 싸우면서 싸움에 내성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사회에서 어떻게 안 싸우고 살아갈 수 있겠나. 어려서 형제와 싸우면서 그 싸움의 정도나 지켜야 할 선을 배운다고 생각한다.
<정가네 목장>에서 목장 주인으로 나온다.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는 소젖을 짰다. 그러고 보면 소와 인연이 깊다.
도시인이 소를 만질 일이 얼마나 있겠나.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젖소의 특수 부위를 만져보기는 했지만, 한우를 만지거나 가까이 다가갈 기회는 없었다. 영화 촬영하며 소를 가까이서 보니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르더라. 소가 주인을 따를 거라 생각했는데, 옛날처럼 소와 함께 농사짓고, 노동하고 밥 먹이던 시절이면 몰라도 목장에서 키우는 소들은 주인을 못 알아보더라.
사료 줄 때도 못 알아보나?
밥 줄 때만 반응한다. 주인이 소 발길질에 맞아서 다치기도 하더라. 반려우가 아니라서 그렇다. 하지만 소가 다른 동물에 비해 우직하다는 것을 느꼈다. 아! 저래서 소구나. 소들은 축사 안에 묵묵하게 서서 눈을 끔뻑끔뻑하며 버티고 있다. 수의사에게 소의 생태나 성질, 소의 일생에 대해 교육받았고, 실제 여러 목장을 돌아다니며 촬영했다. 또 소의 직장에 손을 넣어 임신 여부를 진단하는 감정도 직접 해봤는데, 소 직장에 내 어깨까지 들어가더라. 손으로 직장의 변을 긁어 파내기도 했다. 실제 이런 것들을 해봤는데, 영화에서는 작은 송아지와 주로 연기했다. 촬영 중에 축복처럼 꽃사슴같이 예쁜 송아지가 태어났는데, 연기를 참 잘했다.
송아지가 연기를 잘한다는 건 무슨 뜻인가?
말썽을 안 피운다는 거다. 온순하다. 치열하게 일하는 현장은 힘들고 지칠 만도 한데 송아지가 활력소 역할을 제대로 해줬다. 모두들 소와 스킨십도 하고, 뽀뽀도 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송아지에 정이 깊이 들었다. 지금도 보고 싶다.
류승룡의 얼굴은 영화마다 뚜렷이 다르다. 매번 완벽히 다른 인물을 보여왔다.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캐릭터는 누구였나?
사람마다 여러 감정과 인격이 내재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교육이나 사회화를 통해 발견하거나 숨긴다. 연기는 그 안에서 가장 큰 것들을 끄집어내는 작업이다. <7번방의 선물>의 용구나 <시크릿>의 재칼 같은 인물을 연기할 때는 탐구하지만, 그 외 다른 캐릭터들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내 안에 있는 것 중 배역과 가장 맞는 부분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게 순진함일 수도 있고, 무뚝뚝함, 유머러스함 등일 수도 있다. 그것을 꺼내 극대화한다. 장르 연기를 해야 하는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 내가 맡았던 역할들은 대부분 내 안에 조금씩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굳이 가장 나와 가까웠던 캐릭터를 꼽자면 <정가네 목장>의 모습이나, <인생은 아름다워>의 강진봉, <입술은 안돼요>의 작가도 있는 것 같다.
작품이 꾸준히 발표된다. 쉬지 않고 연기만 하는 사람처럼.
지난해 1년 쉬었다. 코로나 때문에 촬영이 여의치 않았다. 많은 분들에게 사랑받고 오래 상영됐던 <극한직업>이 벌써 2년 전 작품이다. 드라마를 많이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출연한 영화들이 명절에 방영되기도 했고, <킹덤>이 빈 시간을 메워주기도 해서 그렇게 봐주시는 것 같다.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면 직무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연기 활동은 당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연기를 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하루하루 세월을 겪어내고 있다. 젊은 스태프들과 일하면서 그 세대의 생각을 읽고, 또 새로운 것을 많이 배운다. 또 동시대나 세상을 그려내는 작품을 만나서 삶을 배우기도 한다. 극장 산업이 위축되고, 영화 산업의 전반적인 흐름에도 관심을 갖다 보니까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알게 된다. 변화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연기를 하면서, 영화라는 산업에 종사하며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되나 배우고 있다. 깊이 공부하고 체감하고 있다. 배우 생활을 하면서 영화나 드라마나 전체적인 툴이 바뀐다는 생각이 든다. 넷플릭스와 같은 OTT 산업이 유입되고, 극장에서 팝콘을 못 먹고. 현재는 다면적인 변화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다.
OTT가 극장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까? 영화라는 오래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급변하는 와중에 배우들의 입장은 어떨까?
OTT와 극장은 공존하지 않을까. 변화는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된다. 극장의 경험은 3S라고 한다. 큰 스크린, 입체적인 사운드, 편안한 시트. 요즘에는 홈시어터의 규모와 품질이 향상되면서 스크린, 시트, 사운드를 충족하고 있다. 그럼에도 극장에서 보는 영화에 대한 향수가 있고, 캄캄한 암막에 나를 가두고 영화에 빠져들 수도 있고. 극장이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빨리 예전처럼 마스크 벗고 편안하게 호흡하고, 객석이 꽉 찬 객석을 바라보며 무대 인사를 하고 싶다. 영화는 사람들을 울고, 분노하고, 웃고, 몰랐던 사실을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그 시절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50대에 접어들었다. 변화를 체감하고 있나?
누웠다 일어날 때 몇 단계를 거쳐야 한다. 예전에는 밤새면 저녁때까지 버텨도 괜찮았는데, 요즘은 밤새 촬영하면 회복이 어렵더라. 건강 관리에 신경 쓰고, 식단 조절하고, 운동하고 그런다. 체력적으로 힘든 게 가장 큰 변화다. 그리고 어느덧 현장에서 나이가 많은 1%에 들다 보니까. 안 듣고 싶어도 들리는 건 많고, 안 보고 싶어도 보이는 게 많다. 말하고 싶어도 말하면 안 된다. 그래서 정말 많이 들려도 못 들은 척, 많이 보여도 못 본 척하며 말을 아낀다. 야마다 레이지가 쓴 <어른의 의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서 어른의 의무는 첫째 불평불만을 하지 않는다. 둘째, 자랑하지 않는다. 세 번째는 항상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한다. 이런 내용인데 따르려고 해도 잘 안 된다. 50대가 되어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노력하는 모습 자체가 큰 변화인 것 같다. 과거에는 불평도 하고, 자랑도 하고, 기분 안 좋으면 표현도 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사명 같은 게 생겼다.
취미가 목공예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직접 만든 공예품들을 보니까 굉장히 정밀하더라.
그 정도는 아니다. 자연을 좋아한다. 차를 좋아해서 찻상을 만들고, 차 도구를 만들게 됐다. 또 항상 선물을 준비하는데, 선물을 고르는 게 어렵다. 내가 나무를 좋아해서 플레이트 같은 것을 선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물용으로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스피커도 만들고, 좌탁도 만들고, 오브제도 만들게 됐다. 내가 골프도 안 치고, 낚시도 안 하고, 술도 안 마신다. 작년에 촬영을 못 할 때 무언가에 몰두하고 싶었다. 시간이 없어서 못했던 목공이나 카빙, 가죽 공예를 시작했다. 흙도 좀 만졌고. 연기로 못 푸는 내 생각을 다른 피사체를 통해 간직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 공예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손으로 하는 작업은 마음을 비우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목공예의 매력은 뭘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수중에는 내가 만든 게 별로 없다. 거의 다 선물했다. 주는 기쁨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가죽도 아내 것, 어머니 것, 여동생 것이다. 한 땀 한 땀 꿰매 만들어 주는 기쁨이 크다. 그들의 소중함에 대해 더 생각하고, 그들에 대해 한 번 더 기도하며 만든다.
가정의 달이라 하는 질문은 아니지만, 좋은 가족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려운 질문이다. 우리는 매일 저녁 성경을 함께 읽는다. 중고등학생 남자애들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촬영 때에는 화상으로 하고, 아니면 다음 날 어제 못 읽은 것까지 읽는다. 고맙게도 아이들이 잘 따라주고 있다. 물론 투덜거리기는 하는데 1년 넘게 해오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생겼다. 요즘처럼 바쁘다면 아이들과 마주 앉아서 이야기할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좋은 가족이 되려면 대화와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서로 싫어하는 거 하지 않기.
무엇을 싫어하나?
유치한 얘기지만 동생은 장난일지라도 형이 싫어하면 하지 말아야 한다. 항상 그 문제로 싸우거든. 자신의 짜증을, 힘든 것을 가족에게 가져오지 말기. 가족에게 풀지 않기. 나도, 아내도, 형도, 막내도. 그리고 아무리 충언일지라도 데시벨이 높거나 단어 선택을 잘못하거나 인상을 찌푸린 채로 하면 의미가 없다. 반발심만 생기지. 그래서 온유하고 선명하게 말하려고 노력한다. 사실 어렵다. 우리 때는 맞으면서 컸으니까. 지금은 아이들을 이해하고, 대화로 풀어내야 한다. 그게 중요하다. 아내에게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10대와 문화가 다를 텐데, 대화 주제는 어떻게 찾나?
아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나도 게임에 대해 알려고 노력한다. 어려서 나는 테트리스 같은 게임을 했는데, 요즘 게임은 계정이 있는 관계 형식이라 공부가 필요하다. 아이들이 게임할 때는 열렬히 응원해준다. 아이들이 보는 웹툰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눈다. 또 내가 유튜브 프리미엄을 사용하는데, 아이들과 계정을 공유한다. 그래서 얘들이 뭘 보는지 다 안다. 알고리즘 때문에 계속 추천 영상에 먹방이 뜨거든. 아이들이 뭘 보는지 아니까 대화할 때도 도움이 된다. 유튜브 뮤직으로는 애들이 어떤 음악을 듣는지도 알고. 마지막으로 아내에 대해 이야기하면, 나는 아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진짜 제일 무섭다. 아내가 무섭지 않나?
글쎄 아직 무섭지는 않은데.
나는 아내가 없다고 생각하면 너무 무섭다. 그래서 문득 이 사람이 없는 세상을 떠올리면 잘하게 된다. 잔소리하고, 나한테 뭐 하라고 하고, 애들 등짝 때리고 그럴 때에도 아내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 다리가 풀린다. 무서워서. 우리 아이들에 대한 마음도 그렇다. 공부 좀 못하고, 말썽 피우고 그래도 이렇게 함께 지내는 게 고맙다.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만족하고 감사한 존재가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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