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벚꽃
벚꽃은 밤에 더 반짝인다. 어두운 밤에는 밝은색의 벚꽃나무를 프레임 두르듯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밤의 액자 안에 있는 벚나무의 모습은 마치 추상적이고 초현실적인 그림처럼 보인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벚꽃을 보고 있자면 다른 세상에 잠시 서 있는 듯하다. 가장 좋아하는 밤 벚꽃을 보는 장소는 산책로 정상 부근, 남산 성곽길이다. 버스정류장 근처 성곽길엔 커다랗고 아름다운 벚나무들이 서 있다. 서울의 야경도 한눈에 볼 수 있어 더욱 사랑하는 곳이다.
WORDS & PHOTOGRAPHY 채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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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천, 소래풀
안양천은 오랜 시간 이 동네에 살면서 발견한 장소 중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봄에는 벚꽃이 만개하고 여름엔 장미가 와르르 핀다. 나는 보통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생각이 많아 머릿속을 비우고 싶을 때 들른다. 유유히 흐르는 물결을 따라 걷다 보면 복잡했던 감정이 점차 해소된다. 큰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가져온 샌드위치를 먹거나 음료를 마시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하늘에서 나무로, 나무에서 천으로, 천에서 내 발 바로 아래까지, 둥글게 자연을 살핀다. 시선 속에는 벚꽃과 개나리가 완연히 피어 있다. 눈에 띄지 않는 곳까지 구석구석 살피자, 천의 가장자리에 관심을 주어 살피지 않으면 쉽게 지나쳐버릴 작은 보라색 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다. 누군가에게는 소래풀, 또 누군가에게는 보라유채라고 불린다. 4월과 5월, 점점 더 무성해질 계절 속에서 마주친 이 작은 아름다움을 기록해둔다.
WORDS & PHOTOGRAPHY 박현성 -
창덕궁, 산수유
봄이 오면 창덕궁 매표소는 아침부터 붐빈다. 특별히 꽃과 나무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감탄할 만큼 크고 탐스러운 홍매화를 찍기 위해 스마트폰부터 커다란 줌렌즈를 장착한 카메라까지 모두가 자신만의 장비를 동원한다. 나무를 둘러싼 사람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 장면을 멀리서 보고 있으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레드 카펫으로 내려서는 스타를 마주하는 기분이 든다. 올해는 좀 더 가까이 가서 볼까 싶다가도, 너무 인기가 많으면 어쩐지 한 걸음 물러서게 되는 성향과 이유 없이 노란 꽃에 끌리는 취향이 더해져 결국 산수유나무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창덕궁 후원의 애련정 근처를 좋아한다. 호숫가에서 보는 산수유나무는 각별히 아름답다. 그 어떤 꽃보다 빨리 피어 봄을 알리기 때문에 타이밍을 놓치면 만발한 꽃나무를 보기 어려우나, 아주 작은 폭죽같이 생긴 꽃들이 듬성듬성 가지에 붙어 있는 모습은 내가 늘 기억하는 봄의 시작이다.
WORDS & PHOTOGRAPHY 정멜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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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복사꽃
경주역에 도착하기 전 기차 창밖으로 듬성듬성 짙은 분홍꽃을 피운 낮은 나무들을 보았으나 잠시 잊었다. 관광지에 도착해서는 벚나무에 압도됐기 때문이다. 왕의 무덤 옆 아름드리 벚나무 앞에 서면 경주의 봄이 한눈에 보인다. 흩날리며 떨어지는 꽃잎과 유적지 곳곳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사이 봄은 만개해 있었다. 그런데 동궁과 월지로 향하는 길목 저 멀리, 기차에서 본 복사꽃들이 보였다. 화창하던 날씨는 어느덧 비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았고, 날씨 탓인지 복사꽃은 스산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어릴 적 복숭아나무는 귀신을 쫓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기묘한 아름다움에 홀려 오래도록 눈높이만큼 자란 복숭아나무 앞에 머물렀다. 벚꽃보다 짙고 선명한 꽃을 피워내는 복숭아나무들은 동궁과 월지에서 국립경주박물관으로 향하는 네거리 길목에 서서 둘러보면 그 자리에 있다.
WORDS & PHOTOGRAPHY 하혜리 -
성북천, 라일락
자전거의 계절이 왔다. 봄이 오면 나만의 라이딩 곡들을 들으며 성북천 주변을 달린다. 자전거 도로와 보행자 도로 사이 얕은 천이 흐르는 이곳에선 매일같이 운동하러 오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봄 냄새를 맡으며 달리다 보면 저 멀리 옅은 보라색 라일락이 송이송이 맺힌 광경이 보이며, 특유의 강한 향기가 코를 가득 메운다. 안암교 맞은편 산책로 위엔 라일락의 무대가 길게 펼쳐진다. 다른 꽃들은 곳곳에서 만날 수 있지만 라일락은 이 구간뿐이다. 잠시 자전거를 세워두고 가까이 가서 감상한다. 라일락 향기를 맡으면, 충만한 봄을 느낌과 동시에 머지않아 찾아올 초여름에 대한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라일락 향수들 중에서도 생화의 향기를 제대로 구현한 것은 찾기 어렵다. 길을 가다가도 라일락만 보이면 나의 후각은 더 바빠진다. 분홍색과 보라색 사이, 이 봄이 지나도 언제든 회상할 수 있도록.
WORDS & PHOTOGRAPHY 이우정
효자동, 장미
여름이 코앞으로 다가온 듯한 날씨와 담벼락마다 얼굴을 내민 꽃에 들떴던, 봄이 저무는 날이었다. 경복궁 옆 효자동은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네다. 번잡한 광화문을 지나 효자동으로 들어오면 차량 통행량이 적고 조용하며 온갖 꽃들이 피어 있는 골목이 나타난다. 낮은 건물과 한옥 사이를 걷다 보면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효자동의 좁은 골목골목을 걷고 또 걸었다. 애정하는 책방 이라선에 들러 토비아스 칠로니의 장미빛 커버로 된 (Jenny Jenny)사진집을 샀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탐스러운 장미꽃이 넝쿨째 핀 어느 울타리에서 잠시 멈췄다. 프레임 가득 장미 송이들을 꽉 채워 한 컷 찍었다. 새빨간 장미꽃의 황홀함이 압도적이었다.
WORDS & PHOTOGRAPHY 곽기곤
백운산, 진달래
영종도 백운산 자락, 겨울 동안 흑백으로 잠들었던 산은 봄이 되면 드문드문 꽃들이 피어오르며 컬러로 물든다. 해가 있을 때는 등산객과 절에 가는 사람들이 보이지만 밤이 되면 인적이 사라지며 그 자리를 야생동물들이 대신한다. 밤마다 종을 알 수 없는 울음소리가 멀리 혹은 가까이에서 메아리친다. 산속의 밤은 어떨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궁금증에 두려움을 뒤로하고 산에 올랐다. 아직 완전히 푸르지 않은 나무와 가지들이 어둠 속에 엉켜 있는 산중, 오를수록 캄캄해지고 소리들이 커진다. 뒤에서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솜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다. 드문드문 피어난 진달래가 어둠 속에서 신화 속 생명체들처럼 희미하게 빛을 낸다. 옛사람들이 신령을 목격하고 믿는 이유를 인적 없는 밤의 산에 올라 짐작해보았다.
WORDS & PHOTOGRAPHY 이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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