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웅은 누구인가. 창간 15주년 특집 기사 기획안을 받고 고민했다. 기획은 에디터들이 지대한 영향을 받은 인물을 인터뷰하는 것이다. 취향도 말투도 걸음걸이조차 서로 다른 에디터들은 스스럼없이 자신만의 영웅을 꼽았고, 각 영웅의 면면에서는 그 에디터의 화보와 문체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이번 기획은 현재 <아레나> 콘텐츠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추적하는 계기가 될 것이기에. 기사 진행이 쉽지 않았다. 에디터들은 자신들의 영웅을 영접하고자 메일과 왓츠앱, 전화와 줌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세계 각국에 퍼져 있는 영웅들과 접선했다. 영웅들은 단번에 인터뷰를 승낙하진 않았다. 바쁜 일정으로 인터뷰가 불가능하거나, 연락이 닿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가까스로 인터뷰에 응해 뒤늦게 답변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뒤에 이어지는 인터뷰이들의 이름을 보면 섭외에 난항을 겪은 이유가 이해될 것이다. 평소 우리가 갈망했지만 만나지 못한 인물들이다. 옷으로 낭만을 이야기하는 디자이너, 무뚝뚝한 에디터의 감정을 뒤흔든 사진가, 독일 현대 미술을 이끄는 작가, 방황하는 청춘을 그려내는 영화감독, 남극점과 북극점을 모두 정복한 최초의 인간 등 그들에겐 아직 묻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아 있다. 기사는 9명의 실존 인물과 6명의 가상 인물 인터뷰로 구성된다. PARTⅠ에는 실존 인물들과의 감도 높은 대화와 사진이 담겼다. PARTⅡ는 만날 수는 없지만 에디터들이 큰 영향을 받은, 롤모델로 삼기도 한 인물들과의 가상 인터뷰다. 자신이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자아 형성의 토대를 찾아 방황하는 이들에게 <아레나> 창간 15주년 특집 인터뷰가 나침반이 되길 기대한다.
탈모가 진행 중인 것 같은데, 샴푸 추천해줄까?
하버드 의학과 탈모 전문 교수에게 선물받은 것을 사용 중인데, 그나저나 첫 질문부터 무례하기 짝이 없군. 게임을 시작하고 싶나?
게임은 나중에 하고, 쉴 때는 뭐 하나?
어떻게 하면 잔인하고 복잡한 게임을 개발할 수 있을까 늘 구상하지. 내 꼭두각시 빌리의 의상 박음질도 잊지 않고.
삶의 가치를 모르는 자, 이를테면 범죄자를 납치한 후 잔인한 게임을 벌이잖아. 그들이 당신의 트랩에 갇히면 기분이 어떤가?
짜릿해. 그들이 고문 기계와 싸우려 들 때면 즐거움은 배가되지. 삶이 얼마나 고귀한지 모르는 자들은 맞아야 한다네. 다만, 난 정당한 게임을 원할 뿐 직접 때리거나 죽이지 않아. 게임의 의도를 간파하고 탈출하는 건 본인들 몫이라네.
정당한 게임을 원한다고 했는데, 당신의 게임에서 이기려면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거나, 타인의 목숨을 파괴해야 하잖아.
내 손으로 직접 죽이지 않는다고 했지 타인의 손으로 훼손하면 안 된다고 한 적은 없지 않은가. 그들은 함정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삶의 가치를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고. 그게 목적이지.
희생자의 인권은? 그들 삶의 가치는?
본인의 선택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게임이잖나. 그들을 결정권자로서 존중해준 거지. 내 작은 배려라고 할 수 있네.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비하면 그 정도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지. 벌 주는 거라고.
납득하기 어렵군. 계획적인 살인을 일삼는 연쇄살인범에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데?
살인을 위해 온갖 고문 장치를 설계하고 지금껏 벌어놓은 돈으로 트랩 현장까지 사들이지. 거기에다 내 먹잇감이 될 범죄자들은 얼마나 약삭빠른지, 그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선 체계적인 계획이 필요해. 연쇄살인범으로 치부하다니 오만하군. 광기로 똘똘 뭉친 살인마들과 나는 다르다고.
가만, 갑자기 생각난 건데, ‘자, 이제 게임을 시작하지’라는 대사는 직접 생각한 건가?
내가 한 말인데 그럼 누가 생각했겠나?
여러 밈을 만든 명대사이긴 하지만 너무 평범한 것 같아서.
밈이 무엇인가? 아무튼 난 복잡한 수식이 필요한 고난도 게임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이 시대의 천재인데, 그런 말을 들으니 고깝군. 내 대사에 대해 토를 다는 이는 처음 봤네.
직쏘 하면 대표적으로 생각나는 장치가 있잖아. 머리에 씌우면 위턱과 아래턱을 완전히 벌려 박살내버리는 ‘리버스 베어 트랩,’ 만들기 어려워 보이던데 어떻게 개발했나?
내가 대기업 엔지니어이자 건축가였잖나. 장치 구조를 설계하는 건 식은 죽 먹기일세. 솔직히 말하면 심리학에도 도가 트여 상대방을 꿰뚫어보는 능력까지 갖췄지. 그러니 희생자들이 제 발로 트랩에 기어 들어오도록 만들 수 있던 게지. 한니발 렉터 따위와 비교하지 말길 바라네.
가학적 변태 같기도 한데…. 게임에 실패한 사람은 직접 죽이잖아. 어떻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수 있지?
가학적인 행위를 즐기는 변태라기보단 내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라네. 어떻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대답하고 싶지 않군. 누구나 잔인하고 자극적인 걸 좋아하는 성질은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네.
건강은 괜찮나?
더 이상 함정을 설계하기 힘들 정도로 병세가 악화하고 있다네. 머리가 빠진 것도 항암 치료 때문이지.
몸에 암 세포가 자라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자살 시도했다며.
절벽으로 떨어져 죽으려 했지. 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았어. 신이 다시 한번 기회를 준 거지. 떨어지려는 순간 느꼈다네. ‘삶은 소중하고, 삶을 업신여기고 하찮게 생각하는 자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겠다’는 걸 말이야. 첫 살인이 떠오르네. 세실이라는 여자였어. 그녀는 임신한 내 아내를 유산시켰다네. 마약에 미친 여자였지. 그녀에게 보복하기 위해 첫 번째 게임을 시작했네. 첫 시도라 게임은 실패했지만(그녀를 앉혀놓은 의자가 부실했는지 부서져버렸어) 죽이는 데는 성공했어.
말기 암 환자로서 본인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저 기다리는 중일세. 하지만 대를 이을 후계자가 나, 존 크레이머 없이도 훌륭하게 살인하도록 하기 위해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계획해놓고 떠날 생각이네. 내 설계에 따라 살인할 후계자에 대한 많은 관심도 부탁하네.
후계자가 갖춰야 할 점이 있을까?
치밀한 사람을 원하네. 내가 만든 게임으로 고통을 직접 느껴본 자라면 더욱 적합하겠지. 얼마나 치밀하고 세밀하게 만들어야 성공적으로 살인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앞서 말한 장기적인 프로젝트에 대한 힌트를 줄 수 있나?
10년에 걸쳐 이어질 살인을 계획 중이라는 것 외엔 힌트는 줄 수 없어. 어쨌든 아주 잔인할 거야.
희생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하잖아. 테이프를 틀면 당신의 꼭두각시 인형 빌리가 나와 게임에 대해 설명하지. 이런 참신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영감 받았나? 인형 빌리의 디자인은?
딱히 영감이랄 건 없고…. 우선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선 나에 대한 정보가 새어나가선 안 된지 않나. 존 크레이머의 존재를 확실히 숨기기 위해 우리 빌리를 이용했지. 빌리 디자인은 직접 했다네. 굉장한 공포감을 주지 않나?
이 인터뷰를 볼 독자에게 한마디 부탁하네.
난 이만 게임 하러 떠나겠네. 다들 본인들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길 바라네. 그렇다고 나처럼 극단적인 시도를 하란 말이 아니야.
마지막으로 희생자가 될 사람들에게 한마디 해주겠나?
자, 이제부터 게임을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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