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웅은 누구인가. 창간 15주년 특집 기사 기획안을 받고 고민했다. 기획은 에디터들이 지대한 영향을 받은 인물을 인터뷰하는 것이다. 취향도 말투도 걸음걸이조차 서로 다른 에디터들은 스스럼없이 자신만의 영웅을 꼽았고, 각 영웅의 면면에서는 그 에디터의 화보와 문체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이번 기획은 현재 <아레나> 콘텐츠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추적하는 계기가 될 것이기에. 기사 진행이 쉽지 않았다. 에디터들은 자신들의 영웅을 영접하고자 메일과 왓츠앱, 전화와 줌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세계 각국에 퍼져 있는 영웅들과 접선했다. 영웅들은 단번에 인터뷰를 승낙하진 않았다. 바쁜 일정으로 인터뷰가 불가능하거나, 연락이 닿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가까스로 인터뷰에 응해 뒤늦게 답변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뒤에 이어지는 인터뷰이들의 이름을 보면 섭외에 난항을 겪은 이유가 이해될 것이다. 평소 우리가 갈망했지만 만나지 못한 인물들이다. 옷으로 낭만을 이야기하는 디자이너, 무뚝뚝한 에디터의 감정을 뒤흔든 사진가, 독일 현대 미술을 이끄는 작가, 방황하는 청춘을 그려내는 영화감독, 남극점과 북극점을 모두 정복한 최초의 인간 등 그들에겐 아직 묻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아 있다. 기사는 9명의 실존 인물과 6명의 가상 인물 인터뷰로 구성된다. PARTⅠ에는 실존 인물들과의 감도 높은 대화와 사진이 담겼다. PARTⅡ는 만날 수는 없지만 에디터들이 큰 영향을 받은, 롤모델로 삼기도 한 인물들과의 가상 인터뷰다. 자신이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자아 형성의 토대를 찾아 방황하는 이들에게 <아레나> 창간 15주년 특집 인터뷰가 나침반이 되길 기대한다.
당신을 정말 만나고 싶었네.
사설탐정을 만나고 싶은 이유야 뻔하군. 뭘 의뢰할 건가?
셜록 홈스, 오귀스트 뒤팽, 에르퀼 푸아로도 아닌, 필립 말로를 찾아온 이유가 뭐겠나?
머리를 굴리기보단 진창에 몸을 던지는 남자가 필요한가 보군. 혹은 당신이 아직까지도 하드보일드라는 감상주의에 젖어 있는 게으른 족속이거나. 누군가가 총을 쥐고 있더라도 초연하게 커피를 내리는 탐정이 필요한지도 모르겠군. 자, 말해보게. 애인이 홀연히 사라졌나? 비밀리에 간직하던 유산을 잃었나? 착수금은 1백 달러, 하루에 25달러를 받고 경비는 따로 청구하지.
의뢰인을 압도하는 당신의 비아냥과 냉소를 배우고 싶어서, 라고 하면 어떤가?
적절하게 찾아온 것 같으니 말상대는 해주지. 아무 쓸모없는 일이지만 말이야. 당신이 탐문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김렛에 들어가는 라임 주스만큼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그 정도면 충분하네. <호수의 여인>에서 무척 좋아하는 당신의 대사가 있어. 당신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뢰인에게 “상관없습니다. 태도를 파는 건 아니니까”라고 답한 것 말이야. 난 사건을 해결해줄 뿐이야.
의뢰인에게 친절이나 웃음, 굴종 따위를 팔려고 이 직업을 택한 건 아니니까. 그게 가능했다면 지방 검사의 수사관을 관둘 일도 없었겠지.
그래서 자꾸 의뢰인과 싸우는 건가? 당신의 사건은 대개 팽팽한 탐문으로 이루어지지. 퍽 재미있네.
내가 일부러 속을 긁어놓으려고 이런 말투를 쓴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난 사건을 파악하려는 것뿐이네. 치장 없는 말만이 진짜를 보여주지. 물론 그냥 남의 속을 긁고 싶을 때도 있지만 말이야. 당신도 누군가에게서 뭔가를 알아내고 싶거든 거추장스러운 관용 어구는 생략하게. 그래서 상대가 화가 났다면, 별수 없지. 바라던 답을 들을 수 없을진 몰라도, 그게 진짜 그의 모습일걸세. 아첨을 듣고 싶으면 달콤한 말을 속삭여줄 여자를 찾게나.
여자, 당신이 맡은 사건에서 진짜 악당은 늘 여자야. 항상 그랬지. 새틴처럼 매끄럽고 리큐어처럼 욕망하며 깃털처럼 가벼운 여자. <빅 슬립>의 카멘도, <안녕 내 사랑>의 벨마도, <기나긴 이별>의 아일린도 그랬지. 그러나 한번도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어.
내 수도승 같은 면모에 대해선 이미 잘 알고 있으니 부연할 건 없겠군. 맞아, 내가 맡은 사건은 대체로 잔혹하고 가여운 여자들이 벌인 짓이었지. 너무 많이 가져서 갖지 못하는 걸 이해할 수 없거나, 까마득한 과거는 도마뱀 꼬리처럼 잘라내고 싶어 하는 여자들. 그들의 욕망과 허영, 결핍이 낳은 비극. 꼭 그녀들의 잘못이라고만은 생각하진 않네. 20세기 초 미국 서부에 급격히 쌓인 부와 화려한 생활, 무법 지대의 뒷골목, 그 빛과 그림자를 쉽게 뒤집거나 미끄러져 내리곤 하는 건 대체로 여자들이니까. 하지만 난 그런 여자들에겐 도통 끌리지 않더군. 아무리 수레국화 같은 눈동자와 대리석 같은 맨살을 지닌 여자라도 말이야.
늘 그랬지. 당신을 진정으로 매혹하는 건 늘 남자 아니던가? 다소 촌스럽거나 어수룩하더라도 보기 드문 순정을 품은, 혹은 선량한 기품을 지닌 남자?
불쾌한 질문이군. 내가 그런 이들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건 인정하네. 나는 순박한 품위를 갖춘 호인들을 좋아하지. 머저리 같은 순정에 기꺼이 심장이 뚫리거나, 가난과 욕망의 틈바구니에서도 고고함을 잃지 않는 남자들. 미끈한 놈팽이며 그럴듯한 사기꾼, 실크 스카프나 보타이 따위를 맨 제비, 볼이 붉고 배가 부푼 졸부는 흔하고 흔해도, 그런 남자는 영 드무니까 말이야. 그런 게 진짜 남자다운 거라고. 알겠나?
당신은 남자다운 것, 신사다운 것에 이상스러울 정도로 집착이 있네. 1940년대에 쓰인 작품이니 감안하지. 그렇다면 국경을 넘어 멕시코까지 가서 조우했던 남자, 테리 레녹스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나? 마지막 순간 테리가 돌아왔다면 결말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에 대해선 답하지 않겠네. 단지 그 책의 제목이 <기나긴 이별>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주게. 이별 이야기지. 그것도 아주 길고 긴.
당신처럼 고독과 친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김렛을 추천하네. 진 반, 로즈사의 라임 주스 반을 넣고 그 외엔 아무것도 섞지 말게.
수많은 사건을 겪으며 볼 꼴 못 볼 꼴을 다 봤네. 당신의 영혼은 손상되지 않았나?
“당신네들이 스스로의 영혼을 가지기 전까지는 내 영혼도 가질 수 없을 거요.” <하이 윈도> 대사로 답을 대신하지.
“당신이 죽어 깊은 잠에 들게 됐을 때, 기름이나 물은 바람이나 공기와 같다. 죽어버린 방식이나 쓰러진 곳의 비천함과 상관없이 깊은 잠에 들게 되는 것뿐.” <빅 슬립> 마지막 대목이네. 순수했던 남자, 리건이 웅덩이 속에 죽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당신은 이렇게 말했지. 죄를 밝히고,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것…, 모든 게 무상하지 않나?
설마 죽으면 천국에라도 갈 거라고 생각했나? 거기엔 천국도 지옥도 번쩍이는 할리우드의 불빛과 코를 찌르는 시궁창 냄새도 없네. 내가 리건의 결백을 증명했고 기억한다는 것, 그게 전부지. 회한과 정념은 살아 있는 인간의 몫이니까. 죽음은 고요해. 깊은 밤만큼의 기척도 없지.
“안녕이라고 말하는 것은 잠시 동안 죽는 것”이라고 말했었지. 마지막 인사를 할 시간이야.
허튼소리를 하는군. 책을 펼치면 나는 여전히 사건을 해결하느라 흠씬 얻어맞고 의뢰인이며 목격자들과 말다툼을 하고 있을 거네. 삶 앞에 비굴하게 조아리는 당신 대신 내가 구르고 싸운 덕에 그나마 조금은 살 만하지 않았던가? 챈들러가 주로 끝맺곤 하는 “다신 그를 볼 수 없었다”로 이 문답을 끝내지는 말도록 하지. 지나치게 감상적인 데다, 당신은 여전히 내가 주인공인 책을 펼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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