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웅은 누구인가. 창간 15주년 특집 기사 기획안을 받고 고민했다. 기획은 에디터들이 지대한 영향을 받은 인물을 인터뷰하는 것이다. 취향도 말투도 걸음걸이조차 서로 다른 에디터들은 스스럼없이 자신만의 영웅을 꼽았고, 각 영웅의 면면에서는 그 에디터의 화보와 문체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이번 기획은 현재 <아레나> 콘텐츠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추적하는 계기가 될 것이기에. 기사 진행이 쉽지 않았다. 에디터들은 자신들의 영웅을 영접하고자 메일과 왓츠앱, 전화와 줌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세계 각국에 퍼져 있는 영웅들과 접선했다. 영웅들은 단번에 인터뷰를 승낙하진 않았다. 바쁜 일정으로 인터뷰가 불가능하거나, 연락이 닿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가까스로 인터뷰에 응해 뒤늦게 답변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뒤에 이어지는 인터뷰이들의 이름을 보면 섭외에 난항을 겪은 이유가 이해될 것이다. 평소 우리가 갈망했지만 만나지 못한 인물들이다. 옷으로 낭만을 이야기하는 디자이너, 무뚝뚝한 에디터의 감정을 뒤흔든 사진가, 독일 현대 미술을 이끄는 작가, 방황하는 청춘을 그려내는 영화감독, 남극점과 북극점을 모두 정복한 최초의 인간 등 그들에겐 아직 묻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아 있다. 기사는 9명의 실존 인물과 6명의 가상 인물 인터뷰로 구성된다. PARTⅠ에는 실존 인물들과의 감도 높은 대화와 사진이 담겼다. PARTⅡ는 만날 수는 없지만 에디터들이 큰 영향을 받은, 롤모델로 삼기도 한 인물들과의 가상 인터뷰다. 자신이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자아 형성의 토대를 찾아 방황하는 이들에게 <아레나> 창간 15주년 특집 인터뷰가 나침반이 되길 기대한다.
처음 접한 작품은 <아이 킬드 마이 마더>였다. 엄마를 죽도록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후베르트’의 모순적인 사랑과 아들을 한없이 품어주는 엄마의 헌신적인 사랑이 서로 충돌하고 뒤섞이는 과정은 충격적이었다. ‘오늘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래?’라는 심장을 관통하는 아들의 물음에 엄마는 ‘그럼 난 내일 죽을 거야’라며 덤덤히 대답한다. <아이 킬드 마이 마더>는 자비에 돌란의 데뷔작이다. 그가 궁금해졌고 <마미>와 <단지 세상의 끝>을 연이어 보고 난 후 비로소 자비에 돌란이 갈망하는 것과 영화를 통해 이끌어내고자 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영화에서 표현되는 감정의 파도는 아주 크고, 인물들의 요동치는 감정은 적나라하게 표현되고 급변한다. 이러한 분노의 감정은 내 안의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부조리함에 대한 반발심을 자극했고 공감을, 파문을 일으켰다. 한 섞인 울부짖음과 서로를 나무라는 호통으로 가득한 그의 영화를 볼 때면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오열로 시작해 오열로 끝냈다. 그는 관객을 다루는 법을 안다. 당장 세상이 끝날 것처럼 슬프게 만들었다 숨 막힌 듯 답답하게 만들고 또 행복하게 만든다. 관객의 감정을 후벼 파는 자비에 돌란을 속 깊이 알고 싶었다. 극한에 내몰린 상황 속에서 인물이 좌절감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그려내는 의도가 뭘까. 그의 가슴속엔 뭐가 있길래 그리도 타인의 감정을 잘 다루는 걸까. 그가 고민하는 건 뭘까.
국내 팬들과 평론가들은 당신을 ‘감정을 그리는 감독’이라고 부르더라. 동의하나?
동의한다. 감정이 중심이다. 어떤 이들은 감정을 두드러지게 그려내는 내 영화를 싫어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감정을 되도록 최소화하고 금욕적인 걸 좋아한다. 하지만 난 다르다. 넘쳐흐를 만큼 가득 찬 감정 상태를 사랑한다. 물론 인간의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고 감정에도 정량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도 나름의 기준과 요구 사항이 있으며, 일정량의 감정도 필요하다. 다만 내 작품에서 드러나는 감정은 좀 과다할 뿐이지.
감정을 그려내는 이유가 뭔가?
사람들이 영화를 본 뒤 기억을 간직하고, 집으로 가져가도록 만들고 싶다. 테네시 윌리엄스가 이런 말을 했지.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작품과 행위, 타인들과의 연결을 통해 도달하는 고귀하고 매혹적인 경험이다. 이것이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오는 것.’ 그게 내게 가장 중요하다. 사람들이 내 영화를 간직하고, 영화로 소통하고, 영화 속 감정에 공감하는 것. 손을 뻗어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오는 것. 그리고 집은 수많은 감정들로 풍부해지는 거지. 그건 내게 재능, 성공, 또는 인상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중시되는 점이다. 감정적이 되고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느끼게 만들고 싶다.
여러 감정 중에 특히 ‘화’가 도드라진다.
화는 곧 내 열정을 내포한다. 열정적으로 행동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니까. 일반적으로 나는 열정 없이 무언가에 참여하거나 헌신하기 힘들다. 일이든, 관계든, 열정이 없다면 큰 상실감과 무력감을 느낀다. 그래서 열정을 ‘화’라는 감정으로 승화시킨다.
당신의 영화를 보면 벼랑 끝에 내몰린 듯한 좌절감이 느껴진다. 왜 그럴까?
극한의 감정과 감정의 변화는 내게 평범함으로 치부된다. 아침에 일어나 기분이 좋을 수도 있지만, 좋은 기분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잖아. 우린 역경, 승리, 투쟁, 매일 예측 불가능한 계획에 대응하느라 끊임없이 감정 변화를 겪는다. 그렇기에 삶이 아주 복잡한 것 아닐까?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는 삶이 그렇듯, 감정적인 영역에서 변화가 필수적이다. 감정적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은 우리가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이고, 감정의 대비는 깊이와 힘을 가진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캐릭터에 대해 알려줄까? 이를테면 누군가에게 강하게 소리 지르고 몇 분 뒤 어린 시절 사진을 바라보며 크게 울부짖는 역할,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길 원해 시끄럽게 짖어대는 개. 내 취향이 느껴지지 않나? 물론 모든 게 고르고 올바르게 흘러가거나, 누구도 소리치지 않고, 모든 색채가 깔끔하게 정돈되며 균형을 이루는 영화도 충분히 만들 수 있다. 그런 영화를 보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다만, 그런 정제된 영화를 만드는 건 나와 맞지 않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그건 내가 믿는 것도, 믿는 걸 창조하는 방법도 아니다.
당신 영화는 대부분 ‘이해’에 초점을 둔 것 같다. 맞나?
정확하다. ‘오해’라고 표현해도 되겠다.
<마미>에선 엄마와 아들이 서로 이해하지 못해 갈등이 생기고, <단지 세상의 끝>에선 가족 간에 오해가 증폭하고 이해가 결핍돼 진정 세상의 끝에 내몰린 듯한 충격과 공포를 선사한다. ‘이해’에 대한 갈망이 큰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비극은 오해에서 비롯된다. 언어, 운, 사랑의 결핍으로 인해, 대화가 불가능하고 자신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영화는 가장 몰입된 경험을 만들어낸다. 인물이 절대적으로 해야 하는 말을 못하고 있을 때, 관객은 스크린으로 뛰어들어 그들에게 직접 말해주고 싶어 한다. 그리고 관객은 자신을 인물에 대입해 함께 좌절감과 열망을 느끼지. 대개 인간은 영화 속 부조리한 상황에 정의감을 느끼며, 현실에서 접하는 불공평을 영화를 통해 보상받길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관객의 몰입과 갈망을 사랑하고 즐긴다. 그러한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해’로 빚어진 갈등을 주로 다룬다.
연기, 제작, 편집, 감독, 의상까지. 자비에 돌란의 손길이 묻지 않은 것이 없다. 완벽주의자인가?
나는 완전한 완벽주의자다. (사실 내가 존경하는 어느 감독도 완벽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없다.) 누구든 자신의 만족도에 이르기 위해선 일에 완벽히 임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의상에도 직접 개입한다. 훌륭한 의상 디자이너 ‘피에르 이브 가이로(Pierre-Yves Gayraud)’와 함께한다. 직접 개입하는 이유는 옷을 디자인하고, 옷감을 고르고, 실루엣을 연구하면서 큰 즐거움과 고양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늘 느꼈던 갈망이기도 하다.
영화 의상에 대한 갈망이 크다고 했는데, 평소에도 패션에 대한 열정이 돋보이더라.
패션을 하나의 산업보다는 예술로서 사랑한다. 디자이너에 대한 존경심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쌓이는 패션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내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건 인간에게 옷을 입히는 것보다 캐릭터에 옷을 입히는 것이다.
왜?
캐릭터도 인간이지 물론, 그렇지만 영화 속 상황으로 본다면, 의상이란 다양한 요소들과 뒤섞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의상과 스토리를 구상하는 건 진정한 희열감을 준다. 의상은 배우의 첫 대사라고 생각한다. 캐릭터가 입을 떼기 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그들이 입고 있는 의상이다. 그건 모든 걸 설명해준다, 그렇지 않나? 그들이 누구인지 말해주지. 그들이 부유한지 아닌지, 교육을 받았는지 아닌지. 상위층인지 아닌지. 모든 걸 말이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고 하지만, 겉모습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들이 무궁무진하다.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은 무엇인가?
모든 스타일을 막론하고 자신에게 잘 어울리면 된 거다. 그들이 누군지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주니까.
영감은 어디서 얻나?
영감이란 내가 변화하고 나이 들고, 성장함에 따라 변한다고 생각한다. 몇 가지 영감은 여전히 내게 소중한 것으로 남아 있지만, 이젠 그걸 다른 시각으로 탐구하려 노력하고 있다. 30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주제와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하고 탐구할 생각이다. 새로운 영감을 찾아나서는 건 언제나 날 흥분시키는 일이니까.
<마미>의 주인공 아들 ‘스티브’와 엄마 ‘디안’의 키스 장면.
<마미>의 주인공 아들 ‘스티브’와 엄마 ‘디안’의 키스 장면.
촬영을 하기 전 영화에 대해 토론 중인 배우와 자비에 돌란.
촬영을 하기 전 영화에 대해 토론 중인 배우와 자비에 돌란.
스태프에게 팔을 뻗어가며 열정적으로 디렉션을 하는 중이다.
한국 팬들은 ‘자비에 돌란의 플레이리스트를 훔치고 싶다’고 할 정도로 당신의 영화에 담긴 음악들을 사랑한다. 음악을 선정하는 기준이 있나?
첫 번째는 캐릭터가 들었을 때 사실적인 음악을 선택한다. 역할이 겪고 있는 상황에 음악이 어울리기 위해선 역할을 맡은 배우에게 몰입감을 주는 음악을 택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음악을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방식으로 그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노래들로.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 음악이나 그들의 삶에서 특정한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들 말이다.
영화 제작 시 작업 방식이 궁금하다.
나는 무엇보다 창의적인 배우들과 함께 일하는 걸 좋아한다. 캐릭터에 완전히 헌신할 수 있는 배우들. 하지만 무엇보다 연기를 좋아하고 본인만의 아이디어를 가진 배우여야 한다. 그들에게 디렉팅을 주지만, 내 생각을 공유하려 노력한다. 짜여진 구조에 멈추기보다는, 촬영 도중에도 끊임없이 창작의 흐름을 유지하면서 새롭게 떠오르는 것들을 메모한다. 어떤 배우들은 내 즉흥적인 작업 스타일을 싫어하더라. 나도 안다. 하하.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즉흥성은 계산되고 정해지지 않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자발적이고 실제적인 장면을 끌어내지. 어떤 사람들은 헛소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배우 ‘자비에 돌란’은 어떤 사람인가?
내 안의 배우 자비에 돌란은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나를 증명하기 위한 기회를 끊임없이 갈망한다. 대중은 날 배우로 생각하지 않더라. 그들은 나를 재능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걸 수도 있겠지. 나도 한계가 있고, 꼭 훌륭한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탐구하고, 개선하고, 좋은 경험을 얻을 수 있는 도구가 주어진다면, 훌륭해지기 위해 최대한 분투할 수 있다.
어린 나이에 칸 영화제에서 수상했음에도 균형을 유지한 채 꾸준히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원동력이 있나?
아이디어. 모든 아이디어는 훌륭하고 영감이 되며 그 자체로 이 일을 계속 이어가기에 충분하다. 상은 내 노력에 대한 보상이고, 큰 행복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내 안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로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게 제일 큰 행복이다.
요즘 고민은 무엇인가?
인간의 생존 능력에 대해 고민한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세상은 무자비하게 파괴되고 있으며 혼란을 겪고 있다. 끊임없이 커지는 균열과 정치적 분열, 그리고 심지어 내전까지도 야기될까 걱정이다.
<더 데스 앤 라이프 오브 존 F. 도노반> 속 장면을 위해 디렉팅을 주고 있는 자비에 돌란의 모습.
<더 데스 앤 라이프 오브 존 F. 도노반> 속 장면을 위해 디렉팅을 주고 있는 자비에 돌란의 모습.
촬영 도중 자비에 돌란이 사다리를 오르고 있다. 장난스러운 그의 표정이 사뭇 귀엽다.
촬영 도중 자비에 돌란이 사다리를 오르고 있다. 장난스러운 그의 표정이 사뭇 귀엽다.
국내 팬들은 자비에 돌란을 기다리고 있다. <마티아스와 막심>에서 작품 활동을 멈췄기 때문이다. 차기작 준비 중인가?
미니시리즈 제작 중이다. 이토록 열정을 강하게 느낀 게 오랜만인 것 같다. 방영일만 손꼽아 기다릴 정도니까. 2018년 <마티아스와 막심> 제작과 동시에 서른 살이 되었다. 서른 살이 되니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잠시 멈추고, 모든 걸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러던 중 팬데믹이 터졌고 결국 내 생각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엔 한 단계 도약을 위해 나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한국에 대한 애정을 자주 표하던데, 한국의 어떤 점에 매료됐나?
한국인의 취향이 좋다. 특히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서울이라는 도시도 정말 매력적이다.
한국 아티스트 중 본인 영화에 캐스팅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
<기생충>의 최우식. 그를 정말 애정한다. 최우식이라고 부르는 게 공손한 것인가? 내가 알기론 한국에선 성씨만 부르는 건 무례한 표현이라던데, 맞나? 나중에 개인적으로 알려줘라. BTS의 뷔도 아주 매력적이다. 언젠가 함께 작업하고 싶다. 듣기론 둘이 절친이라던데!
마지막으로 한국 팬들에게 한마디 하자면?
모두 그립고 얼른 찾아뵐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한다. 한국 팬들은 유독 나와 내 영화에 큰 존경을 드러내고 친근하게 대해주더라. 그런 표현에 나는 지지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사랑받는 기분이 강하게 느껴진다. 한국 팬들과 소통했던 때가 내게는 여전히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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