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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나>가 사랑한 영웅들 PART 1

패션 디자이너 드리스 반 노튼

우주에서 가장 탐미적인 디자이너 드리스 반 노튼. 디자이너로서 정점에 선 그는 여전히 옷을 통해 낭만에 대해 말한다.

UpdatedOn March 09, 2021

나의 영웅은 누구인가. 창간 15주년 특집 기사 기획안을 받고 고민했다. 기획은 에디터들이 지대한 영향을 받은 인물을 인터뷰하는 것이다. 취향도 말투도 걸음걸이조차 서로 다른 에디터들은 스스럼없이 자신만의 영웅을 꼽았고, 각 영웅의 면면에서는 그 에디터의 화보와 문체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이번 기획은 현재 <아레나> 콘텐츠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추적하는 계기가 될 것이기에. 기사 진행이 쉽지 않았다. 에디터들은 자신들의 영웅을 영접하고자 메일과 왓츠앱, 전화와 줌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세계 각국에 퍼져 있는 영웅들과 접선했다. 영웅들은 단번에 인터뷰를 승낙하진 않았다. 바쁜 일정으로 인터뷰가 불가능하거나, 연락이 닿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가까스로 인터뷰에 응해 뒤늦게 답변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뒤에 이어지는 인터뷰이들의 이름을 보면 섭외에 난항을 겪은 이유가 이해될 것이다. 평소 우리가 갈망했지만 만나지 못한 인물들이다. 옷으로 낭만을 이야기하는 디자이너, 무뚝뚝한 에디터의 감정을 뒤흔든 사진가, 독일 현대 미술을 이끄는 작가, 방황하는 청춘을 그려내는 영화감독, 남극점과 북극점을 모두 정복한 최초의 인간 등 그들에겐 아직 묻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아 있다. 기사는 9명의 실존 인물과 6명의 가상 인물 인터뷰로 구성된다. PARTⅠ에는 실존 인물들과의 감도 높은 대화와 사진이 담겼다. PARTⅡ는 만날 수는 없지만 에디터들이 큰 영향을 받은, 롤모델로 삼기도 한 인물들과의 가상 인터뷰다. 자신이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자아 형성의 토대를 찾아 방황하는 이들에게 <아레나> 창간 15주년 특집 인터뷰가 나침반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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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을 좋아하기 시작했을 무렵 주변 친구들은 당시 디올 옴므를 이끌던 에디 슬리먼에 빠져 있었다. 나 역시 에디 슬리먼을 좋아했다. 에디 슬리먼이 생 로랑에 적을 둘 때도, 셀린느로 옮길 때도 발자취를 쫓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애정하는 이는 따로 있었다. 패션계에서 가장 낭만적인 디자이너 드리스 반 노튼이다. 앤트워프를 패션의 중심지로 만들고, 세상의 모든 직물에 통달한 예술가. 그의 옷에는 강렬한 색감과 휘몰아치는 패턴이 존재하지만 무엇보다 서사가 흐른다. 동화적인 이야기, 이국적인 신비로움, 자연(특히 꽃)에 대한 넘치는 사랑. 특히 그가 인도 문화에 심취해 제작했던 컬렉션은 내 마음속 깊숙이 내려앉았다. 그 후 그와 같은 옷을 만들기 위해 무대 의상과 패션 디자인도 공부했다. 그러니 <아레나> 창간 15주년 기념 인터뷰이로 그를 선택한 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다. 마르지 않는 재능과 30년 이상의 경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미적 감수성과 호기심을 채워가는 낭만주의자. “낭만주의를 말하는 이는 곧 근대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즉, 예술이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 무한에 대한 열망, 내면성, 가치, 색채 등을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보들레르가 말했다. 드리스 반 노튼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설명할 말이 어디 있을까.

얼마 전 LA에 문을 연 매장이 흥미롭다. 의상은 물론, 식기와 책, 컬렉션 아카이브와 오브제 그리고 정원도 선보였다. 이토록 LA 매장에 신경 쓴 이유가 있나?
매장은 물건만 구매하는 장소가 아닌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나는 전통적인 브릭&모르타르(Brick&Mortar) 매장의 역할을 실험해보고 싶었다. 모두들 미래는 온라인 세상이 될 것이라 말했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매장에 가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직접 물건을 보고 만지며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좋다. 새로 문을 연 로스앤젤레스 매장에서 쇼핑 이상의 독특한 경험을 상상했고 실현하기를 바랐다. 이곳에서는 예술부터 음악, 디자인, 실내 인테리어까지 다양하게 표현된 창의력이 넘쳐난다. 남녀 모두를 위해 큐레이션된 드리스 반 노튼의 과거 의상들도 구입 가능한 아카이브 룸을 제공한다. 거기다 내가 감명받은 예술가, 디자이너, 공예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도 포함하고 있다. 내게 로스앤젤레스는 여러 복합적인 문화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완벽한 도시다.

작년 5월 패션 업계의 시스템을 지적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드리스 반 노튼이 변화의 솔선수범이 되기 위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나?
‘위기를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변화를 위해 긍정적인 기회와 순간을 포착하고, 패션 산업이 국제 사회와 지구의 더 나은 단계를 위해 어떻게 진화할 수 있을지 탐구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당신을 패션계에서 가장 탐미적인 사람이라 한다. 그런 수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겸허히 받아들인다. 나는 심미적 감수성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한다. 상반된 것들과 마주하고 섞이면서 올바른 균형을 찾아가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여러 장면이 겹쳐지고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당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인가?
기준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패션은 기준과 경계를 허물기 위해 존재한다. 나는 특정한 정체성과 아름다움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양하게 옷을 입는 방법을 제안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싫어하는 것들에서 영감을 찾기도 한다는 점이 놀라웠다.
디자이너는 문화와 영화 등 오래도록 존재하는 것들에 영감을 얻기도 하지만 제한받을 때도 있다. 이런 제약들을 극복하는 게 도전이고, 발전의 밑거름이 되며, 더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색상과 프린트 외에 종종 전혀 관련 없는 아이디어를 차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처음에는 전혀 관심 없고 좋아하지 않았던 객체의 아름다움을 탐구하고 디자인을 해내는 데 새로운 재미를 느낀다.

사물의 이면을 발견하는 걸 즐기는 편인가?
물론이다. 아름다운 것도 좋지만 내 작품을 통해 현실도 보여주고 싶다. 예를 들어보자. 2019 F/W 여성복 컬렉션은 꽃이 활짝 핀 정원 이면에 있는 현실을 탐험했다. 장미의 달콤함뿐만 아니라 가시, 질병, 잎에 생기는 검은 점같이 불완전함을 가진 장미를 원했다. 꽃은 낭만적인 존재지만 이 생각을 바꾸고 싶었다. 우리 시대는 과거보다 더 힘들고 덜 완벽하거나 또는 더 이상적이다. 꽃을 묘사하며 흔한 완벽함과 함께 이런 관념들을 만나는 것이 흥미로웠다.

드리스 반 노튼의 쇼를 보면 프랜시스 베이컨, 아뇰로 브론치노, 데이비드 보위 등 명확한 대상이 보인다.
그들은 모두 내 인생의 기쁨과 영감의 원천으로 큰 부분을 차지했다. 내게 영감을 주는 문화, 예술, 음악 중 어느 것 하나를 고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영감이다. 영감은 결코 홀로 불꽃을 일으키지 않고 순간적인 섬광으로 나타난다. 항상 내가 묘사하려는 생각과 환경, 감정의 집합체로서 다가온다. 나는 지적이라기보다 시적, 즉흥적인 방법으로 영감을 목격하거나 이해하는 편이다. 그렇기에 영감은 작품 전체라기보다는 오히려 단순한 아이디어 또는 개념, 때때로 단지 색깔이나 작품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남성복과 여성복을 동시에 만드는 건 어떤 느낌인가?
첫 번째 프로젝트부터 항상 두 개의 컬렉션을 혼합한 요소들에 매료되어왔다. 같은 시선으로 남성복과 여성복에 대해 대화하는 것은 꽤 멋있는 일이다. 같은 옷은 아니지만 둘 다 내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공유하는 점은 같다.

그럼 차이점도 명확한가?
굳이 명확하게 나누지는 않는다. 두 컬렉션 모두 디자인하는 것을 좋아한다. 한쪽을 위해 디자인된 옷이 우연히 다른 쪽에 어울릴 때면 정말 새롭다. 어느 쪽이든 내 창의력을 표현하려는 욕구는 강력하다. 일찍부터 여성보다 남성을 위한 디자인을 먼저 시작했지만 한쪽만을 위해 디자인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서로를 향한 완벽한 찬사를 보낸다.

팬데믹 이후 진행한 2021 S/S와 F/W 남성복 컬렉션은 어떻게 진행됐나?
팬데믹은 새로운 방법과 성찰의 시간을 규정했다. 우리는 미래에 무엇이 중요할까 상상하도록 요구됐다. 미래에도 여전히 패션이 있을까? 우리의 크리에이티브 팀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새로운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 필요하고 우리가 그 속에서 삶에 미치는 영향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컬렉션은 다소 단순하고 솔직하고, 신선하고 낙천적이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일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한계 속에서 기회를 찾기를 원했다. 통일성을 피하면서 개성과 열린 마음을 포용하려 했다. 그리고 과거의 것이 아닌 현재의 활동적인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것에 대해 토론했다. 웅장한 몸짓보다는 작고 더 친밀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 했다.

드리스 반 노튼의 옷은 어떤 남자들이 입으면 좋겠나?
한 가지 유형의 남자를 특정하고 싶지 않다. 옷이 주는 메시지에 강요받지 않고 다양한 가능성으로 입을 수 있는 사람. 우리의 옷을 입는 사람은 자신의 개성을 발휘해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길 바란다. 누구나 자신만의 독특한 이미지와 스타일을 만들 수 있다.

2018 S/S 남성복 컬렉션
© Portia Hunt

2018 S/S 남성복 컬렉션 © Portia Hunt

2018 S/S 남성복 컬렉션 © Portia Hunt

2017 S/S 남성복 컬렉션
© Mathieu Ridelle

2017 S/S 남성복 컬렉션 © Mathieu Ridelle

2017 S/S 남성복 컬렉션 © Mathieu Ridelle

모든 소재의 패브릭에 통달한 대가로서 특별히 애착 가는 소재가 있나?
특별한 직물을 선호하지는 않고 우리의 디자인과 기능적 요구에 완벽하게 대응하는 소재가 좋다.

한국에는 자동차 에어백을 사용해 옷을 만드는 강혁이라는 브랜드가 있다. 낭만적인 드리스 반 노튼이 거친 에어백을 다룬다면 어떤 옷이 탄생할까?
강혁은 그들이 다루는 소재 자체로 충분히 훌륭한 디자인을 해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의 아이디어인 에어백을 사용하지 않을 거다.

2018년까지 브랜드를 독립적으로 운영해왔다. 어떻게 유지해왔나?
나는 항상 우리 회사 생활의 모든 면들을 사랑해왔다. 회사와 나의 삶이 곧 하나였다. 재능이 넘치고 창의적인 팀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혼자서는 결코 해낼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한 개인이 아무리 뛰어나고 창의적인 사람일지라도, 그의 생각을 지지하고, 자극할 수 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어야 성장할 수 있다. 하나의 뜻을 위해 협력하는 사람들이라면 도전을 즐길 줄 알아야 하고, 반대 의견도 낼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이 바뀌면서 여러 브랜드가 가상세계, 3D 아트, 영화를 통한 컬렉션 등 디지털을 강화한 런웨이를 선보인다. 드리스 반 노튼은 어떤 장르가 가장 잘 맞을까?
직접 패브릭을 만지거나, 실제로 보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겠지. 하지만 지금의 팬데믹 상황에선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옷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최근 S/S 컬렉션에서 새로운 접근 방법을 모색했다. 패션의 힘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자, 내가 오랫동안 존경해온 포토그래퍼 비비안 사센과 함께 화보를 촬영했다. 또한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탐구하는 단편 영화도 찍었다. 이러한 결과물은 뉴질랜드 예술가이자 영화 제작자인 렌 라이의 실험적인 작업 특징을 보여준다. 컬렉션 의상을 입은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사용해 투사된 이미지 안에 형상을 만들었고 강렬한 융합을 이뤘다.

요즘 흥미로운 관심사가 있나?
모두가 그리워하는 예전의 삶과 앞으로 우리의 새로운 삶이 가져다줄 긍정적인 변화가 아닐까?

눈여겨보는 디자이너가 있나?
오늘날 우리가 사는 창의적인 세계에는 많은 재능과 비전 있는 디자이너들이 가득하다. 단 몇 명을 특정 지어 뽑고 싶지 않다. 이보다 중요한 건 패션계가 전통적인 패션 중심지에 덜 집중되고 훨씬 더 글로벌해졌다는 거다.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드리스 반 노튼이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
칭찬 감사하다. 내가 객관적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항상 도전할 뿐이다. 그 결과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줄 수 있어 행복하다. 나머지는 더 나은 위치에서 분석할 자격이 있는 이들에게 맡기겠다.

몇 해 전 30주년이 지났다. 다가올 50주년은 어떨까?
다행히 그날이 밝기까지 시간이 좀 남았다. 2017년 1백 번째 컬렉션을 기념해 과거 컬렉션에 출연했던 많은 스타 모델들과 재회했다. 진정한 축하와 꿈의 무대였다. 50주년도 그렇지 않을까?

50주년 전시회를 연다면 당신의 상징인 정원이 무대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 삶에 정원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우울한 정원사> 책도 놓여 있겠지?
아직 없지만 종종 쓰려고 나 자신을 협박하고 있다!

패션이라는 단어를 대체할 새로운 단어를 찾았나?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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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F/W 남성복 컬렉션 © Ann Vallé

2016 F/W 남성복 컬렉션 © Ann Vallé

2005 F/W 남성복 컬렉션
© Andrew Thomas

2005 F/W 남성복 컬렉션 © Andrew Thomas

2005 F/W 남성복 컬렉션 © Andrew Thomas

2009 S/S 남성복 컬렉션
© Xavier Linnenbrink

2009 S/S 남성복 컬렉션 © Xavier Linnenbrink

2009 S/S 남성복 컬렉션 © Xavier Linnenbr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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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GUEST EDITOR 김성지
PHOTOGRAPHY Pamela Berkovic

2021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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