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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김영진과의 대화

김영진 작가는 자신의 삶을 스쳐 지나간 흔적들로부터 파도를 만들어낸다. 반려견 금자를 떠나보낸 후, 그리고 긁고 뜯어내고 다시 덮는 작업을 반복하는 ‘Dechire’ 연작을 그리며 기억을 통과하는 법을 익혔고, BLM 운동을 보며 ‘Yellow is Beautiful’을 떠올리기도 했다. 숭고함과 범속함을 뒤섞어 상위와 하위의 구분을 무화하는 그의 다양한 실험들. 개인전 <WAVELET>을 진행 중인 김영진 작가를 만나, 지금 그를 움직이는 파도에 대해 물었다.

UpdatedOn January 2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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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pe3 Dante and Virgil’ Acrylic, Pen and Conte on Canvas, 130.3×162.2cm, 2017

‘Type3 Dante and Virgil’ Acrylic, Pen and Conte on Canvas, 130.3×162.2cm, 2017

  • ‘Type3 Dante and Virgil’ Acrylic, Pen and Conte on Canvas, 130.3×162.2cm, 2017‘Type3 Dante and Virgil’ Acrylic, Pen and Conte on Canvas, 130.3×162.2cm, 2017
  • ‘Dechire 19-3’ Acrylic , Spray Paint, Oil Pastel and Conte on Canvas, 80×80cm, 2019‘Dechire 19-3’ Acrylic , Spray Paint, Oil Pastel and Conte on Canvas, 80×80cm, 2019
  • ‘Crach-1’ Acrylic on Canvas, 80×80cm, 2019‘Crach-1’ Acrylic on Canvas, 80×80cm, 2019

전시 제목이 <WAVELET>이다. 어떤 의미로 지었나?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겪은 일들은 내 작업에 전부 묻어난다. 작품 하나하나가 파도이자 변곡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전시 이름을 지었다.

‘TYPE’ 작업에선 고전주의 화풍으로 그려낸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그리고 단테의 <신곡> 속 인물들 위에 거침없는 드로잉이 충돌하고 뒤섞인다. 만화책을 뒤섞거나 도트 패턴, 여백으로 남겨두기도 했다. 고전 미술과 서브컬처, 숭고함과 범속함을 뒤섞은 까닭은 무엇인가?
파인 아트와 서브컬처 사이엔 우위가 없다고 생각한다. 서브컬처는 이미 하위문화가 아니며, 대등하게 존재한다. 어릴 때부터 만화가가 되고 싶을 정도로 만화를 굉장히 좋아했다. 대학에서는 디자인을 전공했고,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다양한 그림의 형태를 접하고 지나오며 그것들을 결합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사실적 이미지와 만화적 이미지, 도형적 이미지를 타입화해서 결합해 한 화면에서 형태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단테의 <신곡>을 좋아하나?
좋아한다. 재미있는 이야기잖아. 부게로는 <신곡> 중 지옥의 끔찍함을 아름답게 그려냈는데, 그런 역설이 회화의 흥미로운 점이다.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장면 역시 그렇다.

초기 드로잉을 보면 윌리엄 부게로처럼 인체 표현이 섬세하더라.
인체를 그리는 드로잉 작업은 계속해왔다. 원래 클림트 같은 아르누보 회화를 좋아했는데 에곤 실레부터 점점 표현주의 작업이 더 좋아지더라. 지금은 바스키아를 제일 좋아한다. 나이가 들면서 그런 표현 방식이 좀 더 자유롭게 느껴진다.

이전 작품 중 바스키아의 포트레이트 위에 헨리 겔트찰러와의 인터뷰 문답을 그려낸 연작이 흥미로웠다. 예술가와 비평가의 문답을 어떻게 작품으로 만들 생각을 했나?
바스키아는 이미 세상에 없는 아티스트다. 그렇기에 생전 인터뷰와 자료들을 자주 찾아보곤 했는데, 겔트찰러와의 대담이 흥미롭더라. 그림으로밖에 접하지 못한 작가의 살아 있는 모습들이 다가와서 그 인터뷰를 작품으로 구성해보고 싶었다.

파인 아트와 그라피티에 대해 바스키아가 “Same old shit”이라고 답한 것에도 분명 공감했겠다.
그렇다. 난 어떤 문화에도 상위, 하위 개념은 없다고 생각하니까. 서브컬처가 오히려 대중성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캐릭터와 만화가 가진 힘을 내 작업에 재료로서 쓰기도 한다. 이 시대는 통신의 발달로 세계가 너무 가깝고 빨라진 상태이기에 오히려 평면적이라고 생각한다. 무라카미 다카시의 ‘슈퍼플랫’ 개념처럼 말이다. 다카시는 레이어를 겹쳐 평면적 작업을 반복하는데, 그 방식 자체가 이 시대와 닮았다. 문화는 평평하고 상하가 없으며, 나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이 그것들을 한 화면에 녹여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굳이 갤러리까지 가지 않아도 구글로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시대니까.
심지어 가상현실로도 접할 수 있는 형태가 됐지. 최근 전시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공간에서 예술을 인터랙티브하게 체험할 수 있게끔 한다. 사람들은 평면의 회화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접하는 것 이상을 원하고 있다. 내 작업도 그런 식으로 발전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CRASH TEST’는 시선을 사로잡는 만화적 구성 요소처럼 보이기도 하고, 캔버스라는 프레임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 ‘충돌’에 매혹됐나?
충돌은 부정적인 단어처럼 들리지만, 자동차의 충돌 테스트는 차체의 개선점을 찾는 실험이잖아. 작업에 있어서도 전혀 다른 이미지들의 충돌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실험을 해보고 싶었다. 만화적 요소를 쓴 것은 속도라는 보이지 않는 것을 시각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화 기법엔 속도감이나 음향 효과를 표현하는 기법이 많다. 말풍선도 있고. 그런 것들을 활용했을 때 더 표현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작업한 ‘Dechire’ 연작은 떠나보낸 반려견 금자의 흔적에서 출발했다고. 무채색의 패턴화 위를 긁은 자국이 발톱이 할퀴고 간 자리 같기도 하고, 스키드 마크 같기도 하다.
‘Dechire’는 프랑스어로 ‘찢어지고 파열되고 긁힌’이라는 뜻이다. 하나의 뜻으로만 정의할 수 없는, 여러 의미를 포괄하는 단어를 찾다가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10년간 함께 지낸 반려견을 떠나보내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우울증이 왔다. 더는 예전 같은 작업을 못하겠더라. 그렇다면 형태 이전에 내가 가진 게 뭘까. 어릴 때 나는 어떤 것을 생각했었나. 색이나 선 등 더 단순한 것에 집중해보고 싶었다. 어느 날 금자가 쓰던 침대를 지인에게 주려고 봤는데, 놀다가 발톱으로 긁은 흔적들이 있더라. 지금은 없는 존재를 그런 흔적들로서 느낄 수 있다는 게 마음에 와닿았다. 그렇게 흔적을 남기는 행위를 하고 싶었다. ‘Dechire’ 작업은 금자가 남긴 흔적처럼, 그리고, 긁고, 뜯어내고, 다시 덮는 작업의 반복이었다. 커다란 존재가 사라지고 난 후의 상실감, 갈 곳 없는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이 작업은 그 감정들이 갈 길을 내어 만들어준다는 의식 같은 의미였다.

기억을 떠올리고 묻고 다시 떠올리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작품 속 질서 정연한 패턴들이 갇힌 기억이라면, 긁음은 그것을 다시 파헤치는 행위.
기억은 꺼내서 괴로울 때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좋아지기도 한다. 뭔가를 계속 반복하면서 떠올리고 싶은 거지. 어떤 사람은 그런 과정을 거칠고 폭력적인 형태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치유 과정이 온전히 평화로울 수만은 없다. 치유는 고통을 수반한다고 생각하거든. 그러면서 마음이 나아졌다.

그 감정을 추스르고 나니 어떻던가?
‘Dechire’ 작업 초반엔 컬러에 대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선과 형태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좀 더 컬러와 다양한 형태가 떠오르기 시작하더라. 내가 이젠 심적으로 많이 안정됐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의 감정을 담아내서 하는 작업이 이런 경험이구나, 느꼈다.

작품마다 놓인 돌에 작품 제목이 캡션으로 새겨져 있다. 이런 아이디어는 어떻게 떠올렸나?
관객에게 작품은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다. 부연 설명 없는 평면적 이미지. 캡션 제목은 대부분 한 단어로 정의되지만 원뜻은 무수한,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관객에게는 그저 텍스트로만 읽히기에 좀 더 많은 뜻을 담고 싶었다. 언어가 지닌 무게를 형태로서 표현하고 싶었다. 돌 같은 자연물에 대해 사람들이 궁금증이 있잖아. ‘이 돌은 어디서 왔을까?’ ‘이 돌은 어떻게 생겨나게 됐을까?’ 그런 궁금증 자체가 ‘이 작품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하는 궁금증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돌을 더 좋아해주시는 분들도 있다.(웃음) 이 자체로 하나의 개념 미술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보고 싶다. 작품을 만들면서 겪었던 일이나 그 날 일어난 시간, 먹은 음식, 날씨 같은 것들을 그래픽화해서 옆에 함께 배치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

태민 솔로 2집 <MOVE> 커버에 캘리그래피 작업도 했다. 당신에게 글자 또한 회화적 표현 수단인 것 같은데.
평범하게 지나칠 수 있는 단어도 그 단어의 의미들을 나열하는 게 일종의 개념 미술이라 생각한다. 숫자와 날짜만으로 작업하는 작가도 있으니. 받아들이기에 따라 글자도 회화의 형태, 그림의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최근 꽂힌 문장이 있나?
이번 전시 작품이기도 한 ‘Yellow is Beautiful.’ 흑인이 인권운동을 할 때 ‘Black is Beautiful’이라고 외쳤고 얼마 전엔 BLM 운동을 한창 전개했지. 물론 흑인 투쟁의 역사가 더 유구하지만 여전히 유색 인종 차별 문제에 있어 아시아가 배제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조심스럽지만 누군가는 표현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함께 배치한 ‘A Choice of Weapons’ 문구는 1960년대 인종 차별에 저항한 흑인 사진가 고든 파크스의 자서전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 무기의 선택이란 뭘까. 그것은 회화다. 그래서 작품으로 만들게 됐다. 흑인 사회에선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겪은 것을 우리도 겪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좋겠다.

농구공이라는 오브제로 작업한 것도 흥미롭다.
사실 정치적으로 가장 이용되기 쉬운 게 스포츠라고 생각한다. 올림픽도 나라 간 경쟁이고. 그렇기에 스포츠 역시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정치적, 국제적 이슈들을 스포츠는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만든 작품이다.

브랜드 반스와도 수차례 협업을 했다. 브랜드와 아트의 협업은 어떤 의미인가?
나는 언제나 상업적인 작업도 함께 병행해왔다.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시각으로 작업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캔버스가 아닌 의류나 신발에 그림을 그리는 것도 전혀 다른 표현 방식이라 흥미롭다.

새로운 분야와 협업한다면 뭘 해보고 싶나?
식물을 다루는 분들과 작업해보고 싶다. 살아 있지만 사라질 수 있는 식물이라는 존재로, 미술 특정 사조를 표현해보면 재미있겠다. 식물을 피카소처럼 입체파 형태로 배치한다든지, 넝쿨식물을 잭슨 폴록처럼 배치한다든지. 미술은 사진, 음식,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예술이기에 늘 다른 분야에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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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이예지
PHOTOGRAPHY 김형상

2021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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