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원작 뛰어넘는 영화 찾기 힘들다
굳이 원작 소설이나 히치콕의 1940년작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레베카>(2020)는 방향성이 모호한 리메이크다. (여러 해외 매체에서는 이 영화가 존재의 이유를 입증하지 못한다며 혹평하기도 했다.) 잘나가는 듯 보이던 서스펜스는 맨덜리 저택에 들어선 이후 주인공 ‘나(릴리 제임스)’의 탐정 수사극처럼 변모하는가 싶더니 이내 로맨스로 향하고, 이 변화를 호의적으로 보기에는 초반 ‘나’와 ‘맥심(아미 해머)’의 관계 진전이 다소 급진적이다. 설득력이 없는 게 아니라 감정을 쌓아갈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는 뜻이다.
한편 뮤지컬 관객들 사이에서 ‘진짜 주인공’으로 손꼽히는 ‘댄버스(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역시 좋은 연기에도 불구하고 카리스마를 발하지 못한다. 가면무도회처럼 현대적으로 신경 쓴 몇몇 좋은 장면들도 눈에 들어오지만 부분적으로만 시선을 잡아끌 뿐, 밋밋함의 원인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극을 이끌어가는 ‘나’와 ‘맥심’의 캐릭터에서 문제가 느껴진다. 우선 아미 해머의 연기는 어딘가 경직된 인상을 주는데, ‘나’를 향한 ‘맥심’의 태도는 ‘레베카’의 영향을 고려하더라도 중반까지 불분명하다. 감정을 전달하기보다 그 의중을 암시만 하는 듯 보인다. 맨덜리 저택의 모든 것에 짓눌려 있는 ‘나’ 역시 종종 그 태도를 짐작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이는데, 릴리 제임스의 연기 문제가 아니라 각본 자체의 난점에 가깝다.
가령 ‘잭 파벨’과 말을 타는 장면은 불필요하게 길고, 보트하우스에 사는 ‘벨’ 역시 실질적으로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데도 카메라가 그를 공들여 포착한다. (여담으로, 이 저택의 개는 왜 두 마리일까? 한 마리는 전혀 비중이 없다.)
각색의 방향은 전반적으로 주인공으로서 ‘나’의 역할을 부각하는 쪽으로 맞춰져 있는데, 이것 역시 결과적으로 영화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레베카’의 존재감을 상대적으로 퇴색시킨다. 서사를 이끌고 감정을 주도하는 주인공의 역할이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기존 <레베카>(1940)의 장점을 퇴색시키는 쪽으로 귀결된다. 그 결과 맨덜리 저택 내부는 충실하게 구현되어 있음에도 화려한 미술과 분장, 의상 등이 그 진가를 발하지 못하고, 오히려 본격적인 무대가 펼쳐지기 전인 프랑스 남부의 오프닝이 더 기억에 남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 중에는 좋은 안목과 뛰어난 협업으로 탄생한 멋진 결과물이 많다. 그중에는 고전이나 유명 프랜차이즈를 활용한 경우도 있다. 우리는 <스타 이즈 본>(2018)이나 <작은 아씨들>(2019)처럼 근사한 리메이크 사례를 알고 있으므로, 리메이크 영화의 목적이 모두 상업성이나 추억팔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쉽게도, <레베카>는 이쪽에 포함시키긴 어려울 것 같다.
WORDS 김동진(영화 칼럼니스트)
<보건교사 안은영>
개성과 역량이 정비례하지는 않지
비록 넷플릭스와 처음 작업했던 단편 영화 <러브 세트>가 끔찍하긴 했지만, 평상시 이경미 감독이 보여준 독특한 유머와 캐릭터에 호감이 있었다.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특이한 인물들을 밉지 않게 그려내고 이들이 연대하는 이야기에 꾸준한 관심을 보내온 연출자였다. 그 작품 세계와 비슷한 기질이 보이는 소설의 드라마 버전을 연출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울리는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다. 오컬트 히어로적 요소가 있는 <보건교사 안은영>이 그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최종 결과물은 일반적인 시즌제 드라마와 거리가 먼 형태였다. 딜레마가 생기는 순간이다. 이번에도 감독의 매력으로 이해해줘야 하는가?
첫 번째 시즌을 시작하는 드라마가 화두로 삼아야 하는 일은 공들여 만든 세계관에 시청자가 지속적으로 흥미를 갖게 만드는 것이다. <보건교사 안은영>에는 학교가 곧 세계관이다. 놀라움을 인위적으로 종용하는 연출이 몇 개 있지만 1화는 흥미를 돋우며 무난하게 바람잡이를 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2화로 돌입하면서 서사의 큰 흐름이자 근원인 학교 이야기를 벗어나 학생들 개개인의 사연을 다루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 과정에서 동성애, 따돌림, 계급차별, 학교폭력 등 한국 사회 속 다양한 문제들이 중요한 이야기의 구성 요소로 부상한다. 특이하다 못해 그로테스크한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감독의 장기, 기본 설정과 별개로 여러 서사가 산만하다 싶을 정도로 파생되어 뻗어나가는 방식은 두 번째 장편 연출작인 <비밀은 없다>와 유사하다. 그러나 <보건교사 안은영>은 한 편으로 끝나는 영화가 아니라 ‘다음’을 고려해야 하는 드라마다. 작품은 옴니버스물 같은 전개 방식으로 다른 이야기에 힘쓰면서 세계관이자 중심 서사라고 할 수 있는 학교와 관련된 비밀이나 사건을 소홀하게 다룬다. 안 그래도 독립적 성향이 강한 에피소드들이 이로 인해 유기성을 잃는다. 마지막에 이르러 본론으로 들어가 다음 시즌을 염두하고 급하게 복선을 쏟아내지만, 연속된 이야기로서 지녀야 할 리듬감은 깨진 지 오래다. 다음 시즌이 전혀 궁금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이경미 감독의 기질은 확고하게 드러났지만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는 못했다. 감독은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작품 속의 세계관에 대한 궁금증을 지속해 사람 멱살을 잡아 이끄는 추진력을 보여줬어야 했다. 그러나 특이하게 보이려고 특이하게 구는 힙스터적 인정 투쟁 같은 연출로 흥미를 유지하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서 생성되는 자극적이고 불온한 분위기에 이끌리긴 하지만 후반까지 반복되다 보니 감상하기 피곤해진다. 상영 시간 내내 지속되는 이 투쟁을 두고 예술가의 소중한 개성으로 여기고 지지해야 하는지 고민해봤다. 하지만 작품을 운용하는 역량이 필요한 대목에서조차 개성을 앞세우는 행위는 창작자가 밑천을 드러낸 것과 같다. 평단은 어떻게든 올해의 작품으로 대접하려고 시도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들 애쓴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이경미 감독의 새로운 성취가 아니라 <러브 세트> 뒤를 잇는 또 다른 한계점인데 말이다.
WORDS 홍준호(영화 리뷰어)
<에밀리 파리에 가다>
아무 생각 없고 싶다면
<섹스 앤 더 시티>(1998)의 제작을 맡았던 ‘대런 스타’가 감을 잃고 돌아왔다. 그는 작품 속 배경 도시를 매력적으로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하다(로맨스를 더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이번 넷플릭스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2020)의 제작을 맡으며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낭만적인 프랑스 풍광에 주인공 에밀리(릴리 콜린스)의 화려한 패션이 더해져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에밀리 파리에 가다>가 공개되고 이 드라마의 작품성에 대해 논하는 건 시간 아까운 짓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속 빈 강정인 것이다.
대략적인 내용이랄 것도 없다. 시카고의 한 회사를 다니는 주인공 에밀리는 임신한 상사를 대신해 1년간 프랑스 파리의 마케팅 회사로 발령받는다. 이후 에밀리의 화려한 파리 생활이 시작된다. 그 삶은 터무니없어 현실성 제로다. 회사에서 마련해준 원룸에서 사는 에밀리는 그마저도 하녀 방이라며 툴툴댄다. 하지만 그 집은 한국으로 치면 월세 1백만원이 넘는 고급 원룸에 속한다. 진짜 하녀 방 같은 곳에서 생활하는 가난한 유학생이 보면 노할 장면이다(에밀리 집에 수도가 끊긴 것만 현실적이다). 또한 에밀리는 말단 사원임에도 처음 일하게 된 곳에서 척척박사 같은 능력을 발휘한다. 무슨 일이든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심지어 파리에서 인스타그램 스타로 거듭난다. 에밀리가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는 족족 ‘좋아요’가 급속도로 불어나고 팔로워 수도 순식간에 오른다. 명랑 쾌활한 주인공의 성격을 돋보이기 위해 ‘척척박사’와 ‘인스타그램 스타’라는 장치를 부여했다고 치자. 하지만 극 중 초반에는 에밀리가 프랑스어를 배우는 모습이 연출되지만 갈수록 그녀의 프랑스어 실력은 도태되며 끝 무렵에는 완벽하게 ‘영어’만 사용한다. 심지어 조연으로 등장하는 유럽인들마저 영어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개연성 부족한 스토리 구성은 ‘대충 눈만 즐거우면 된다’는 제작자의 수작이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클리셰 범벅’이라는 것이다. 도도하고 불친절한 프랑스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대놓고 비판한다. 고지식하고 게으르며 성차별 의식이 강한 프랑스인의 모습을 부각한다. 낭창하고 소위 나대는 미국인의 모습도 보여줌으로써 미국인과 프랑스인을 동시에 까버린다. 하지만 그들의 인간성과 문화를 보여주는 몇몇 장면들은 프랑스와 미국이 갖고 있는 편견과 클리셰로 떡칠했다. 연출은 디테일이 부족하고 시대에 뒤떨어진다. 다른 문화권이 가진 편견을 강조하는 것에만 집중해 스토리에 깊이가 부족하고 전개는 가볍고 빠르다. 한 회당 러닝타임이 30분이 채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는 된다. 배경이 낭만의 도시 파리이고 도시를 아름답게 보여주기에 사람들의 눈에 즐거움을 선사할 수는 있다. 어찌 됐든 결국 에밀리는 프랑스어를 마스터하지 못했다. 예정된 시즌2에서는 꼭 마스터하길.
GUEST EDITOR 정소진
<이제 그만 끝낼까 해>
더 이상, 당신의 뇌는 궁금하지 않아
거장의 몰락.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었다. 찰리 카우프먼은 40대에 할리우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존 말코비치 되기>(1999), <어댑테이션>(2002), <이터널 선샤인>(2004)을 연이어 내놓았고 아카데미 시상식은 기꺼이 그에게 영예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문제는 감독이 된 50대의 카우프먼이었다. 할리우드의 상상력을 상징하던 이 뉴요커는 감독 데뷔작 (2008)이 예견하듯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사유의 세계에 사로잡혔다. <아노말리사>(2015) 이후 <이제 그만 끝낼까 해>(2020)로 돌아왔지만 모든 것이 고갈된 카우프먼은 넷플릭스에 결코 마법을 선사하지 못했다. 그저 이빨 빠진 오즈의 마법사였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훗날 ‘괴작’이라는 꼬리표가 붙을 수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어떤 악평도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잠시 기대작이었으나 이미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영화가 되었으니까.
영화 초반부 루시(제시 버클리)는 애인 제이크(제시 플레먼스)와 함께 그의 부모가 사는 농장으로 향한다. 약 19분 동안 펼쳐지는 자동차 여행에서 뮤지컬, 시, 영화 등을 이야기하며 연인은 설왕설래를 즐긴다. 대부부은 이 길고 긴 장면에 지쳐 보는 것을 포기하겠지만, 이 시퀀스는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고 의미 있는 장면이다(그러니 이 장면까지만 본 관객이 진정 승자다). 그 후 전개되는 어떤 장면도 약속이나 한 듯 자동차 여행보다 흥미롭지 않으며 긴장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심지어 루시의 입버릇처럼 ‘이젠 그만 끝낼까 해’를 중얼거리는 영화지만 이렇다 할 통찰력을 뽐내지 못한 채 러닝타임은 2시간을 훌쩍 넘어버린다.
후반부에 루시가 제이크를 찾기 위해 학교로 들어가는 순간, <샤이닝>처럼 선혈이 낭자하진 않지만 폐소공포증을 느슨하게 일으키는 단절된 세계에 도착한다. 사실 두 연인을 엿보는 남자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으로 이 이야기는 충분했다. 하지만 결코 절제를 모르는 영화는 마치 유령의 세계처럼 시공간을 초월해 한 남자의 권태로운 삶을 반전처럼 제시한다. 적어도 엔딩 15분, 뮤지컬 장면(<오클라호마>)과 늙은 관리인의 추락은 불필요했다. 그전에 영화를 끝내는 것이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지키는 일이었다. 하지만 카우프먼은 누군가의 영혼을 파괴할 때까지 멈추는 법이 없다(애초에 이것이 목적이었다). 카우프먼식 자의식의 향연과 자학적인 분열에 대해 동의해줄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영화의 실체적 진실은 다시 초반부 자동차 장면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물론 느리고 지루한 미로 찾기로 맥이 빠진 후에도 영화를 리플레이할 만큼 인내심이 강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혹자는 <이터널 선샤인>의 한 장면처럼 이 영화의 기억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꽤 좋은 선택이다. 모든 것이 한 늙은이가 창조해낸 세계,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 허망함과 무의미가 잔인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오직 뇌리에 남기고 싶은 것은 <와일드 로즈>에 이어 매력적인 연기를 펼친 제시 버클리의 수줍은 미소뿐이다.
그러니 카우프먼, 당신에 대한 기대를, 이제 그만 끝낼까 해!
WORDS 전종혁(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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