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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音爛)서생, 이병우

기타리스트, 영화 음악 감독, 그리고 음반 레이블의 대표까지,이병우는 음(音)을 조율하여 아름다운 음악으로 빛나게 하는(爛) 우리 시대의 예술가다. 선비처럼 넉넉한 미소, 한결같이 음악을 향해있는 청년처럼 성실한 태도.

UpdatedOn February 20, 2006

 

 오후만 있던 일요일은 아니었다. 이병우와의 약속은, 오후뿐 아니라 오전에도 일정이 빼곡한 금요일에 잡혀 있었다. 우산을 펼치기가 멋쩍을 정도로 가늘게 내리는 비에 외투를 적시며 삼성동에 위치한 무직도르프(Musikdorf) 사무실을 찾았다. 보기 좋게 나이를 먹어가는 실내를 배경으로 넉넉한 인상의 기타리스트가 사람 좋은 미소를 걸친 채 앉아 있었다. 사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그가 편안한 표정 뒤로 무시무시한 완벽주의자의 모습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석 졸업과 장학금으로 반짝거리는 길고 모범적인 유학 생활을 마친 전력이 있는 데다, 기타리스트 겸 영화 음악 감독으로 인정받는 동시에, 자신의 음반 레이블까지 성공적으로 꾸리고 있으니 말이다. 운이 좋으면 그의 가방에서 초 단위로 하루를 계획해둔 시간표를 훔쳐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결론을 말한다면, 이병우로부터 엄격하고 냉정한 모습을 읽는 일은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느릿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할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게으르고 약삭빠르지 못한 스스로에 대해 투덜대는 모습이 얼마나 솔직해 보이는지 그만 그 말을 믿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음악을 하고, 매일을 살고, 사람을 만나는 태도는 놀라울 만치 소박하고 정직했다. 생각해보면 그의 음악도 항상 기본적으로 선량하게 들렸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과 보기 좋게 닮아 있었다.

이병우가 에스프레소 잔을 받쳐 들었다. 나는 큼직한 커피잔에 설탕과 크림을 둘씩 넣었다.  금요일 오후는 문득 일요일처럼 여유롭게 느껴졌다. 창밖으로는 그의 옛 노래 가사에서처럼 예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뻔한 질문부터 시작하자. 기타리스트 이병우가 영화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그냥 주위에서 영화 음악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해서, 그러마고 승낙한 거다. 첫 작업은 임순례 감독의 <세친구>였는데, 개인적인 친분을 통해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자신의 음악을 입힌 영상을 봤을 때 특별한 느낌이 들었을 것 같다. 기타리스트로서의 기존 음악 작업과 다른 경험이었을 텐데.

후반 작업도 제대로 마치지 않은 상태를 접했을 때는 그냥 이상했다. (잠시 생각하다)그런데 언제나 내 기본적인 자세는 기타를 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항상 출발은 기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화 음악을 시작하면서도 개인적으로 기대가 크지는 않았다.

통 시나리오를 보고 작품을 고르게 되나? (그렇다) 그렇다면 특별히 마음이 가는 종류의 이야기가 있나? 당신이 음악을 맡은 영화는 설명하기 힘들 만큼 미묘한 감정을 건드리는 작품이 많았다. 아니, 그런 것은 없다. 선호하는 이야기도 많지 않다. 어떤 장르건 감동을 줄 수 있다면 좋은 이야기라 생각한다.

당신의 작업 중 <연애의 목적>을 좋아한다. 침침한 로맨스에 음악이 교묘하게 어울린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들어주는 분의 몫인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음악을 만드는 과정이 논리적이지는 않다. 계산을 하지도 못하고. 그래도 작업을 많이 하면서 생각이 느는 것 같기는 하다. 작업 중에 그 안에서 나름 논리가 생기니까.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은 작업 중에서,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실험 같은 것이 있나.

글쎄. 특별한 것은 없다. 나는 수동적인 사람이어서, 욕심 있게 계획을 세워 일을 추진하지는 못한다. 조용한 것 좋아하고, 혼자 노는 것 좋아하고, 방에서 꼬물거리면서, 하루 종일 있어도 심심한 걸 모르는 스타일이다. 한편으로는 그런 이유 때문에, (스스로를 다그치기 위해서라도) 시간만 있으면 어떤 일이든 하고 싶다. 안 좋은 일이라도 그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게 많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건 내가 그나마 호기심이 많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나는 멍하니 있는 걸 너무 오랫동안 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스스로가 이렇다 보니 학생들에게도(그는 서울대학교 음대에 출강 중이다) 어떤 꿈을 불어넣는 말을 잘 못한다. 그게 항상 마음이 아프다. 그냥 ‘재미있게 해라’ ‘더 어려운 상황을 생각하며 열심히 해라’. 이 정도만 이야기할 뿐이다. 대뜸 ‘여자친구는 많이 사귀어봤니?’ 이런 거나 물어보고(웃음).

당신의 음악은 그림이 뚜렷하게 그려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편으로는 음악이 주는 시각적 이미지가 선명해서 영화를 보조하기보다는 그 자체의 존재감이 뚜렷해지는 순간도 있다.

그럴 때가 있다. 튈 때도 있고. 그건 별로 안 좋은 영화 음악이겠지.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영화 음악이란 어떤 것인가.

결국 영화와 잘 맞는 음악이다. (잠시 생각하다) 한 예로, 영화 음악 작업에서는 비싼 연주회용 기타보다, 굉장히 허름하고 소리가 뻑뻑한 기타에서 더 큰 감흥을 느끼곤 한다. 그러니까 <연애의 목적> 테마를 예로 들면, 허름한 기타의 가난한 소리가 비싼 악기에서 울리는 기름진 소리보다 훨씬 영화에 맞는 질감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링 녹음도 소리를 많이 바꿔서 모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낡은 느낌이 들기를 바랐다. 의도가 전달이 안 됐다면 그건 내 책임이겠고.

직접 말했듯이 이병우 음악의 시작은 기타다. 11세에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평생 기타를 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언제였나?

중학교 2학년 무렵, 제프 벡의 앨범 <Blow by blow> 중 ‘Diamond dust’라는 곡을 들었을 때 기타리스트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에 결심한 거다.

본격적인 음악 활동의 시작은 ‘어떤 날’부터였다. 단 두 장의 앨범만 내고 당신이 유학을 떠나면서 그룹도 자연스럽게 해체됐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어떤 날’을 기억한다. ‘어떤 날’의 특별함은 무엇이었나?

전혀 모르겠다. 음악 만들 때마다 ‘사람들이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겠구나’ 하는 예상은 못한다.     ‘아, 이제 (이 음악을) 만들었구나’까지인 것 같다. ‘어떻게 되면 좋겠다’싶은 바람까지도 거의 없다. 음반을 만들기까지만 해도 너무 힘들어서 말이다.

기대를 한 앨범이 있기는 하다.

<흡수>라는 기타 연주 음반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발표한 것이라 내심 기대를 했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앨범이지, 크게 대중화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나는 다른 사람도 많이 좋아하리라고 ‘오해’를 한 거다(웃음).

<흡수>의 경우, 최초의 결과물이 흡족하지 않자 전곡을 재작업해서 만든 음반이라고 들었다. 당신은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인가?

그저 나만의 색깔이 무엇일까 많은 고민을 한 것뿐이다. 이것이 이병우의 색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앨범이었다. 곡을 만들면서도 다른 사람과 비슷하다는 부분은 피해가며 만든 앨범이 <흡수>였기 때문에 결과물에 기대를 걸었다. 시기상으로도 30대의 마지막 즈음에 만든 음악이었다. 나의 색이 뭔지를 찾고, 40대를 맞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현재 음반 레이블 무직도르프 대표다. 처리할 일이 자꾸 늘어날 텐데 부담감은 없나?

너무 많다. 그런데 무직도르프가 좀 소극적이어서 홍보에 열을 올리지는 않는다. 그런데 나는 기본적으로 무홍보가 홍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사람들이 우리 음악이 좋으면 자연히 얘기를 할 것이고, 만약 그렇게 안 된다면 그건 우리의 자질 문제지 홍보가 약해서는 아닐 거라고 본다,

그래도 멍하니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치고는 꾸준히 스스로를 위해 일을 만들고 자신을 놀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 같다.

음, 그렇게 됐다. 내가 항상 많이 바쁘긴 하다. 그런데 왜 바쁜가 하면 일처리가 너무 늦어서 그런 면도 있다. 뭘 하든지 생각이 많아진다. 그렇다고 돌다리를 두드리고 건너는 식으로 신중한 것도 아니고 그냥 결정이 늦는 거다. 그래서 내 별명이 ‘나중에’다.(웃음) 뭐든 ‘나중에 하자’ ‘이거 언제 할 거냐, 나중에’. 이런 식이라서.

음악이나 비즈니스를 제외한 이병우의 생활은 어떤가. 특별히 관심이 있는 일이 있나.

수영을 좋아한다. 그 외에는 얼마 전까지 강아지를 키웠다. 지금은 생활이 바빠서 부모님께 맡겼지만.

글을 쓰는 것은 어떤가. 예전 작업을 봐도 앨범의 타이틀이나 속지의 글이 인상적이다.

글 쓰는 것은 아마 내가 굉장히 즐길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지금은 음악 관련 일이 있으니 집중하는 게 어렵기는 한데, 머릿속에서 한참 상상한 것을 표현하는 일에는 관심이 있다.

넓은 우주에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은 절대적인 인연이라고 생각한다는 글을 <흡수> 앨범에 곁들이기도 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엄청나게 넓은 공간인 우주 안에서, 두 사람이 만나고 사랑한다는 게 보통 인연이 아닐 것 같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처럼 절대적인 사랑도,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은 이유로 힘없이 무너질 수 있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그냥 이런 일이 안타깝고 내가 사랑한 것에 대해서는 기억을 쉽게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물건이나 사람에 대한 애착이 많은 편인가.

그보다는 내 것을 좋아한다. 별것 아닌 것을 참 좋아할 때가 많다. 물건도 좋아한다. 기타도,싼 기타도. 물건에 대해서 하나하나 생명력이 있다고 본다.

현재 <괴물>(감독 봉준호)의 영화 음악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병우가 들려줄 블록버스터의 스코어가 궁금해진다. 어떤 방향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일상 가족의 이야기기 때문에, 서민적인 느낌에 초점을 둔 음악을 하고 싶다. 굉장히 한국적으로 만들고 싶은데, 그렇다고 국악은 아닌 그런 느낌을 찾고 있다. 요즘의 가요적인 요소도 넣고 싶고.

지금까지 당신이 들려준 음악과는 또 다른 작업이 될 것 같다.

글쎄, 지금으로서는 잘 모르겠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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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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