➊ 조수미 성악가
나는 절망하지 않는 편이다. 웬만한 건 두려워하지 않고, 작은 일로 주저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언제 절망했나 생각해보니 1985년이었을까. 스물세 살에 헬싱키 국제 성악 콩쿠르에 최연소로 예선에 참가했는데, 내 노래를 듣고 언론에서 최연소 동양인 우승자가 나왔다고 대서특필했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2차에서 나를 떨어뜨리고 1, 2, 3등을 중국인에게 주더라. 그중 누구도 노래를 잘하지 않았다. 나는 유일한 동양인이 아니었다. 유일한 한국인이었지. 그때가 마침 핀란드와 중국이 첫 국교를 맺으면서 문화 교류를 시작한 해였다. 노래엔 재능만 필요한 게 아님을 알고 굉장히 낙담했다.
인생 최초의 절망이었다. 한동안 피아노 뚜껑도 열지 않았다. 헤어나와야 하는데 왜 이럴까, 하고 스스로를 탓하기보단 몸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처절한 상태로 두었다. 그러고 나니 정신이 좀 들더라. 이탈리아가 오페라의 고장이니 그 나라 사람들보다 배로 잘하기 위해 연습을 거듭했다. 자신만만하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한몫했다. 그리고 3개월 후 이탈리아 국제 콩쿠르에서 1등을 했다. 그 후 크게 절망하는 일은 없었지만 작은 실망은 있었다. 큰 오페라 극장의 주연으로 캐스팅됐어도 연출자가 “수미 조는 동양인인데 19세기 비엔나 오페라의 역할을 할 수 있겠나? 노래를 잘해도 무대엔 못 세우겠다”고 대여섯 번은 거절당했다. 이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 왜냐, 나는 잘하니까. “오케이, 그럼 나는 딴 길로 가지. 오라는 데는 많아” 하고 바로 길을 바꿨다. 나 자신에 대해 확신이 있었으니까.
기분이 나쁘면 나쁜 대로 신경질도 내보고, 안 먹던 초콜릿도 왕창 먹어보고, 정신을 차리면 “오케이, 그다음은?” 하면서 자신과 대화한다. Everything will be okay. 이렇게 자기 확신을 지니려면? 하고자 하는 건 완벽하게 준비해야 한다. 5분 일찍 일어나 그날 입고 나갈 셔츠를 다린다. 기회를 잡고 이뤄내기 위해 만전을 기하는 일. 한 번 사는데 원하는 걸 해야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어떤 여성도 꿈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거다. 우리는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공짜로 가져오는 건 그냥 빠져나간다. 원하는 만큼 노력하라. You will get it!
지금 내가 있는 이탈리아는 팬데믹으로 인해 희생자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50대 이탈리아 여성 화가인 내 친구도 5월에 목숨을 잃었다. 마지막 순간에 가족과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 남은 사람들의 슬픔은 헤아릴 수 없다. 비극 속에서도 이탈리아인들은 발코니에 나와 노래하고 서로 힘을 북돋아주더라. 나도 위로와 희망을 전하기 위해 ‘Life is Miracle’이라는 음원을 냈다. 한편으로 한국의 대응을 보며 우리나라가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지 느꼈다. 문화와 음악은 우리에게 위안을 주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사람의 생명과 안전이니까. 엄청난 노력과 철저한 계획 없이 이 비극은 피할 수 없다. 여기 사람들도 한국을 모범 사례로 꼽으며 한국처럼 대응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2021년은 내가 국제 무대에 선 지 35주년이 되는 해다. 파리, 비엔나, 한국에서의 공연도 예정되어 있다. 오는 봄, 부디 코로나19가 진정되어 한국에서도 노래할 수 있기를.
➋ 김창완 가수
마음을 표현할 글도 없던 원시 시절,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과 닮은 돌을 주워 마음을 전달하고 싶은 사람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꼭 돌을 주워야 하는 것만도 아니다. 얼굴에는 마음의 모양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편안한 마음이면 편안한 얼굴이 되고 찡그린 마음이면 찡그린 얼굴이 된다.
“원고 청탁이 왔는데요.” 드라마 촬영 갈 채비를 하고 나서려는데 매니저가 불쑥 A4 용지를 내밀었다. 눈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내 미간은 벌써 좁아져 있었다. 못마땅한 얼굴로 대충 읽어보니 희망과 용기를 주는 글을 써달라는 내용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산울림 음악을 들으며 자란…”으로 시작한 청탁서는 한 줄 한 줄이 거절하면 안 된다는 설득 작업이었다. 길지 않은 글이라 훑어 내려갔고, 비로소 기획 취지에 대한 설명이 시작됐다. ‘절망을 밀어내는 한 단어’를 찾아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한 단어가 ‘누군가에겐 갓 튀긴 통닭 한 마리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지켜야 할 태도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에겐 좋아하는 노래의 한 구절일 수도 있겠지요’라 써주었는데… 원고 하나 써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힘들구나, 하고 생각하니 거절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남에게 부탁하는 일 자체가 썩 내키는 일이 아니지만 부탁을 거절하는 것도 일 중의 일이다. 애써 부탁해오는데 모른 척하는 것도 여간 민망한 일이 아니다.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니 능히 들어줄 수 있는 청탁도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또는 나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해오지 않았나 싶다. 거절당하는 심정이 어떨까 하는 건 생각해본 적조차 없다. 이제부터라도 사소한 부탁은 들어주어야겠다.
‘화안열색시’는 불교에서 자비롭고 미소 띤 얼굴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간단한 청탁들은 뿌리치고 싶지 않다. “같이 얘기 좀 나눠요.” “잠깐 앉아도 될까요?” “손을 잡고 걸어요.” “원고지 5매만 써주시겠어요?” 누군가는 손을 잡아주길 바라서, 누군가는 마음의 위로가 필요해서 작은 부탁을 해올지 모른다. 상대방으로부터 거절당하지 않는 것만으로 큰 위로가 될지도 모르고 사소한 거절이 누군가에게는 큰 절망을 안길지도 모를 일이다. 짧은 원고나마 써놓고 보니 미간이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새해에는 환한 얼굴로 그들을 맞고 싶다.
➌ 이준익 영화감독
나는 영화를 많이 찍은 감독 중 하나다. 그중에는 큰 성공도 있었지만 많은 실패도 있었다. 심지어 2011년 영화 때는 은퇴 소동도 벌이지 않았던가. 실패의 순간을 겪을 때는 무척이나 괴롭고 힘들어 두 번 다신 그런 순간을 맞이하기 싫은 심정이었다.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집념이 성공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성공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바로 곤두박질쳐서 다시 실패의 늪에서 헤매는 등 성공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심기일전해서 <소원> <사도> <동주>로 연이어 성공했지만 <변산>에서 또 푹 주저앉아 깊은 골짜기에 있었다. <변산>에 같이 참여했던 배우들과 스태프들, 관객, 실망한 모든 이들에 대한 미안함에 밤잠을 설쳤고, 그 미안함을 만회하기 위해 더 세심하게 노력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야만 했다. <변산>을 같이 작업했던 스태프들과 함께 힘을 끌어내 곧 개봉할 <자산어보>를 제작 할 동력을 얻었으니, 어쩌면 <변산>이 내게는 참 고마운 영화인 거지.
환갑을 넘어 생각해보니, 세 가지 사자성어가 내게 남았다. 과유불급, 역지사지, 그리고 새옹지마. 나쁜 일이 생겨도 크게 슬퍼하지 마라. 좋은 일이 생겨도 크게 기뻐하지 마라. 골짜기가 깊으면 봉우리가 높다.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며 느낀 말이다. 코로나19로 우리는 깊은 골짜기에 오랫동안 빠져 있지만 이 골짜기를 벗어나면 그 깊이만큼 높은 봉우리로 향해 갈 것이다. 오랫동안 힘든 만큼, 오래도록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새옹지마다. 하지만 높은 봉우리에 올랐다고 해도 다음에 또 골짜기가 올 것이니, 과유불급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나 하나 감당하기 힘든 시절이지만, 역지사지로 보면 더 힘든 사람도 있다. 나보다 힘든 사람에게 더 큰 온정을 보내야지. 최근 현대 사회의, 소위 서구의 ‘쿨하다’는 단어로 대변되는 개인주의는 결국엔 냉소주의에 빠진다. 지금은 냉소보다는 온정이 다시 힘을 발휘할 문명의 시기가 아닐까. 그것이 코로나19 위기를 벗어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➍ 성석제 소설가
새벽이 가까울 때 밤은 가장 어둡다’라는 속담이 있다. 누가 한 말인지 알 수는 없지만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자주 인용된 잠언이다. 밤이 깊을수록 날은 춥고 전망은 어두우며 혼자인 사람은 외롭다. 그리고 지금 세상은 그런 시기를 보내고 있다. 2020년만 해도 우리는 지나가는 외국발 감기인 것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를 받아들였다. 메르스나 사스, 조류독감처럼 일시적으로 맹위를 떨치긴 해도 곧 사그라질 전염병으로 여겼다. 그 전염병이 우리 각자의, 인류 전체의 삶을 바꾸었다. 역사가 바뀌었고 문명과 문화, 제도와 습속, 인간관계가 바뀌고 있다. 적응해야 하고 적응하지 않으면 살기에 몹시 불편할 수밖에 없거나 혼자로서 외로움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워진다는 사실은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변함이 없다. 어둠이 짙을수록 별은 빛난다. 어둠이 깊어지면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희미한 별들도 눈에 띄기 시작한다. 우리가 사는 은하에는 1천억에서 7천억 사이, 약 4천억 개의 별이 있다는 게 통설인데, 우주에는 이런 은하가 1천억 개쯤 있다고 과학자들은 추산한다. 실제로 우리가 보는 별의 개수는 수천 개에 불과하고 평생 1초에 하나씩 별을 센다 하더라도 헤아릴 수 있는 별은 30억 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바라볼 수 있는 별은 영원에 가깝도록 무한대로 남아 있다. 절망적일수록 크고 작은 희망은 우리를 향해 손짓한다. 밤이 어두워질수록 전에는 알 수 없었던 별이 빛나기 시작한다. 사소한, 일상의, 가까운 우리 이웃에 존재하던 것들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머리 위의 별을 바라보고 걸을 때면, 그대 발밑의 구덩이도 조심해야 한다. 이는 영국에서 전해져 내려온 속담이자 별을 오래도록 바라봐온 사람들의 충고다.
➎ 정성일 영화평론가
언젠가, 정확한 날은 기억나지 않는데, 누군가 갑자기 내게 질문했다. 당신은 힘들 때 어떤 영화를 보나요?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럴 때는 영화 안 보는데요. 나는 영화를 볼 때 위로를 구하지 않는다. 영화를 볼 때마다 긴장을 느낀다. 그러자 그는 재차 물었다. 당신도 힘들 때가 있잖아요. 당연하지. 자주 힘든 상황과 만나고, 몸은 거의 물에 젖은 소금처럼 가라앉기 시작한다. 아마 사람마다 다를 텐데, 나는 경험적으로 누군가에게 그 방법을 일러주는 건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누군가에게 힘들 때는 글을 쓴다는 방법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그에게만 도움이 된다는 걸 그 방법을 써본 후에야 알았다. 그래도 나와 같은 영혼을 가진 분이 어딘가에는 계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혹시 아직 그분이 방법을 찾지 못했다면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백한다.
누군가는 희망의 말을 원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헛된 희망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것을 역사가 가르쳐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지젝은 우리에게 좋은 답을 들려주었다. 우리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어떤 용기? 절망할 수 있는 용기. 나는 그것이 우리 시대에 시급하게 필요한 용기라고 생각한다. 그때 당신은 어떻게 하나요? 오로지 마음이 거의 부서질 지경이 되어버렸을 때, 그래서 가까스로 몸이 견디고 있을 때, 나는 베토벤 교향곡 음반이 꽂혀 있는 목록 앞에서 손이 가는 대로 꺼내 들어 듣기 시작한다.
먼저 말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베토벤의 교향곡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진정한 베토벤의 음악은 16개의 현악사중주와 32개의 피아노 소나타라고 믿는다. 베토벤의 교향곡을 꺼내는 건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한 인간의 투쟁에 관한 위대한 기록이어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베토벤의 유명한 문구. “나는 피로 쓰인 것이 아니면 믿지 않는다.” 그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인간. 약간의 설명을 더해야 할 것 같다. 1번이나 2번은 두세 번 들은 다음 더 이상 듣지 않는다. 힘들 때마다 손이 먼저 가는 건 4번과 7번이다. 4번은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1982년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와 한 연주를 듣고, 7번은 토스카니니가 1936년 뉴욕 필하모닉 교향악단과 연주한 녹음을 듣는다. 5번은 정말, 정말 힘들 때 듣는다. 이건 잘못 들으면 오히려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5번의 공식적인 명반은 물론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의 빈 필하모닉 교향악단의 연주이다. 하지만 나는 이 곡을 프란츠 리스트가 편곡한 피아노 버전을 글렌 굴드 연주로 듣는다. 이 위대한 천재는 인간사 세상살이의 고통과 슬픔을 문득 우주로 데려가서 내려다보게 해준다.
한마디만 더하겠다. 나는 9번을 단 한 번 듣고 질려서 더 이상 듣지 않는다. 당신에게 한가하게 환희의 송가를 들을 여유는 없다. 한 번 더 말하겠다. 지금은 우리에게 용기가 필요한 시간이다. 절망할 수 있는 용기.
➏ 서동욱 철학가
우리는 무엇에 위로받는가? 어떤 이들은 ‘희망’이나 ‘미래’나 ‘발전’ 같은 말이 우리를 지탱해 준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개념들은 물론 의미 있으나, 위안을 준다기보다는 우리에게 과제를 부여하는 것 같다. 희망이나 미래나 발전을 어떤 내용으로 꼭꼭 채워 넣으라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같다. 겨울바람이 지나다니는 문 없는 복도처럼 삶이 고달프게 내던져져 있을 때,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위로받는가?
모든 이에겐 그들을 감싸는 것들이 있다. 겨울날 추운 거리를 지나가다 보게 되는 불이 환하게 켜진 창문, 또는 사람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음식점의 환한 불빛은 마음도 램프처럼 켜지게 한다. 김이 나는 국수 한 그릇 또는 자욱한 수증기 속에서 열리는 거리의 만두 찌는 솥도 지친 삶에 온기를 불어넣어준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잔에 따른 붉은 포도주에서 천천히 동심원을 그리듯 퍼지는 향기, 여름밤 주점 앞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마시는 맥주 한 모금. 그런 것들은 관념처럼 머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체에 직접 퍼지며 우리에게 기운을 나누어준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신체 속에 깃들어 있고, 먹거리는 신체를 직접적으로 위로하는 마술이다.
신체가 하는 가장 감동적인 위로는 신체의 일부인 ‘손’이 담당한다. 손은 우리를 위해 봉사하는 가장 발달한 도구이지만, 물건을 조립하거나 운반하는 실용적인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악수하고 끌어안으며 타인을 만난다. 이 손은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이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하고 칭찬한다. 지친 애인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그를 외롭지 않게 만든다. 사람만이 아니다.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을 쓰다듬으며 그들이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쓰다듬는 손은 단지 다른 이에게 위로만 주는 손일까? 오히려 손으로 다른 이를 쓰다듬고 보호하는 자가 더 큰 위로와 힘을 얻는다. 그는 위로하면서 위로받고 보호하면서 보호받는다. 세상에는 나를 믿고 내 손길에 머리와 어깨를 맡기고 있는 아이와 사랑하는 이와 동물들이 있다. 쓰다듬을 대상이 없으면 당연히 쓰다듬는 손이 사라지는 것처럼, 사랑을 베풀 이가 곁에 없다면 사랑을 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힘도 없어진다. 그러니 내 품 안에 들어와 있는 다른 이들, 어린 생명들,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나를 살려놓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쓰다듬는 손길은 다른 이에게 베푸는 손길이지만,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을 어루만지는 손길이다. 그 손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꼭 끌어안고 있는 손, 축복받은 손이다.
➐ 김소연 시인
“예쁜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여기 오지 마. 대신 그림을 봐, 아니면 수선화를 기다리든지.” 시인 메리 올리버의 시 중 ‘썩은 그루터기에서, 무언가’의 일부다. 메리 올리버는 50여 년을 프로빈스타운에서 살았다. 숲과 들판, 바닷가가 그녀 곁에서 벗이 되어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마주친 자연에게 찬사를 보내는 시를 쓰며 평생을 살았다. 그 찬사는 우리가 아는 찬사와는 조금 다르다. 그녀는 자연의 진짜 모습을 항상 보여주려 했다. 한여름의 숲이 얼마만큼 징그럽고 무성한지. 그 힘은 얼마나 질긴지. 때론 무섭고 때론 적나라한지. 그 마주침에서 그녀는 태연하다. ‘썩은 그루터기에서, 무언가’라는 시도 첫 연에서는 ‘썩은 그루터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검정 뱀’이 미끄러져 나온다. 그들은 그저 숲의 일부일 뿐이다. 뱀을 만났다면 흠칫 놀라거나 뒷걸음쳤을 법도 한데, 그런 내용은 없다. 그녀에겐 검정 뱀의 돌연한 등장은 당연할 뿐이다.
우리는 코로나에 대한 경각심과 불안 속에서 2020년을 다 보냈다. 나는 마스크를 쓰고, 호주머니 속에 휴대용 손세정제를 넣고서 인적 드문 곳을 찾아가 자주 걸었다. 이 지구 위에서 편리를 영위하고 있는 인류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자주 생각했다. 특히, 내 잘못에 대하여 많이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와 손을 오래 씻으며 나는 내게 질문을 던졌다. 이것은 도대체 어떤 시작인가. 이것이 어떤 결론인지 이해했기에 더더욱 시작에 대하여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메리 올리버의 또 다른 시구를 되뇌어본다. 작은 곤충이 자신의 연약한 더듬이를 브이 자로 펼쳐서 무언가를 정확하게 감지하듯이. “질문들만 갖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음악을 만들지.” 메리 올리버의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며, 해답을 구하려는 조바심을 경계해본다. 그리고 나의 질문으로 어떤 음악을 만들지를 궁리한다. 이것은 도대체 어떤 시작일까. 음악을 만들고 음악이 퍼져나가는 동안에, 나도 모르는 사이로 또다른 질문이 도착할 것을 안다. 보다 정교해진 질문이. 하나의 질문이 다른 질문을 태어나게 할 때에 이미 해답은 우리 곁을 다녀갈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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