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의 배우라고 했을 때 단연 주지훈이 떠올랐다. <킹덤> 시즌2, <하이에나>로 큰 사랑을 받았다.
상을 주신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킹덤>과 <하이에나>가 올해였구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즐거워할 틈이 없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재해로 모두에게 피로감이 쌓이고 있지. 하루빨리 정상화되기만 빌고 있다.
<킹덤>은 시즌2까지 화제의 연속이었다. 잘될 걸 예상했나?
조선의 좀비, 처음엔 굉장히 생소했다. 할리우드 히어로 무비에 처녀귀신이 나오는 느낌이니까. 당시엔 실험적 작품이라 생각했지, 이렇게 잘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오로지 걸출한 영화감독과 훌륭한 드라마 작가님의 조합이 궁금했을 뿐. 해외에서도 잘된 이유를 생각해보면, 조선이라는 낯선 시대를 좀비라는 만국 공통의 소재로 상쇄시키며 진입 장벽이 낮아진 것 아닐까? 누군가 그런 얘기를 해주더라. <킹덤> 광고가 타임스퀘어에 걸렸는데, 넷플릭스에서 뉴욕에 광고를 집행한다는 건 미국 사람들이 실제로 보기 때문이라고. 그제야 실감이 났다.
<하이에나>에선 배우 김혜수와의 텐션 높은 어른의 로맨스가 시청자들을 매혹시켰다.
혜수 선배 같은 베테랑과 일하면 나만 잘하면 되니까 상상과 표현의 폭이 넓어진다. 연기는 호흡이다. 내가 그냥 툭 쳤는데 상대가 진하게 받으면 밀도가 높아지는 거고, 내가 진하게 했는데 상대가 건조하게 받으면 쓸쓸함과 애틋함이 느껴지겠지. 그 호흡에 날 맡긴다. 나는 뭔가를 억지로 만들려는 타입은 아니거든. 오늘 화보 찍을 때도 되게 나른하더라. 그러면 난 그걸 가져간다. 딱 정해진 시안 대로 해달라고 하면 재미없다.
영화 <아수라> 이후 충무로의 러브콜을 받으며 빠르게 성장했다. <암수살인>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신과 함께>로 천만 배우 자리에 앉고, <공작>으로 칸 영화제 레드 카펫도 밟았다.
열심히 살았구나. 복도 많고. 하하하. 내가 걱정이 앞서는 타입이라, <공작> 출연을 결정하고 윤종빈 감독 만나서 처음 한 말이 생각나네.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봤다. 이 캐릭터는 그림이냐고. 당시엔 제안받은 캐릭터가 이름도 없었거든. 작은 역할까지 인지도 있는 배우들로 채우고 싶은 욕심이시냐, 아니면 정말 영화에 필요한 인물이냐. 후자라면 감독님 작품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감사히 하겠다. 비중에 대한 큰 욕심은 없지만 작품에 긴장을 줄 수 있는, 쓸모 있는 역할이었으면 한다. 감독님은 후자라고 답했고 재미있게 찍었다. 돌이켜보면 모든 작품이 어느 하나 쉬운 것 없었지만 즐거운 작업이었다.
주지훈은 연기를 어떻게 준비할지 궁금하다.
사전에 감독님과 작가님을 많이 만난다. 방해 안 되게 퇴근 한 시간 전쯤 사무실에 찾아가서 미술팀 쓱 보고 뭐가 들어가겠구나 가늠하고, 감독님과 이야기하다 술자리로 이어지면 논다. 낄낄대고 노는 자리에서 나온 조각을 모아보면 20~30분 정도는 우리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겠지? 사적인 이야기나 감정에 대해 말하다 보면 “그 신에서 그런 감정으로 하면 좋겠다”고 단서가 나오기도 한다. 그런 게 모여 작품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지. 현장에서 날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미 난 감독님, 작가님과 수십 번 만나며 준비를 마친 거다. <지리산> 촬영 전 김은희 작가와 지리산 답사를 갔다. 지리산을 보고 회의하고 농담을 따먹다 보면 “지훈아, 너 지금의 호흡과 표정이 현조에 묻으면 매력적이겠다” 같은 일상적 대화 속에서 살을 붙여간다. 그게 내 방식이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끼리의 합. 거기에 기름칠하는 거네.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에 현장에서 변수가 생겨도 ‘아’ 하면 ‘어’가 나온다. 얼굴만 봐도 저 사람이 뭘 원하는지 느껴지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촬영에만 집중하는 배우가 있듯 술자리를 좋아하면 나처럼 되는 거다. 그게 재미있으니까. 개인적으로 만나는 친구는 별로 없다. 감독님, 작가님들을 계속 만나고 작품을 마친 분들과도 인연을 이어간다. 연기 고민뿐 아니라 삶의 고민을 나누다 보면 풀리는 부분도 많고 평안을 찾기도 한다.
주지훈은 어떤 걸 재미있어 하나?
따지자면 ‘Fun’이 아니라 ‘Interest’다. 흥미로운 걸 좋아한다. 사람을 만날 때도 유머가 우선이다. 모든 인간관계엔 각자의 욕구가 있다. 모두 함께 사는 사회라고 공익 캠페인을 하는 건, 현실에선 그게 잘되지 않으니 그렇겠지? 그러니 나의 욕구와 타인의 욕구 사이 합의점을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누군가 내게 져줄 때도 있고 내가 져줄 때도 있는데, 그걸 기분 좋게 만드는 윤활유가 유머인 거지. 동료 관계든, 친구 관계든, 남녀 관계든. 그래서 유머 코드가 잘 맞으면 손해를 좀 끼쳐도 좋아하고, 잘해줘도 유머 코드가 안 맞으면 안 만나게 된다. 힘들어. 하하하.
영화, 넷플릭스, 공중파까지 다양한 플랫폼을 누비는 배우다. 어디에도 잘 맞아떨어지지.
난 모델 시절에도 그랬다. 과거 하이엔드 패션지 모델을 하면서 중철지라 불리던 잡지 화보도 찍었거든. 여기서는 칭찬받은 포즈가 저기서는 이상한 거다. 잡지마다 추구하는 톤앤매너가 다르기 때문이었지. 첫 드라마 <궁>이 잘되어 민규동이라는 좋은 감독님과 첫 영화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를 찍었고, ‘어, 이건 다르네? 왜 이렇게 하지?’라는 의문이 들면 바로 여쭤봤다. 난 물어보는 걸 창피해하거나 겁내지 않는다. 같은 영화도 장르에 따라 톤앤매너, 색온도, 카메라 움직임까지 다르다. 어떤 이들은 ‘리얼리티’ 내지는 ‘진실성’이라고 하는데 난 <암수살인>도 <신과함께>도 진실하게 연기했다. 장르와 플랫폼마다 색이 다를 뿐, 단지 내 일을 충실히 하면 된다.
다변화된 플랫폼의 시대에 배우로 산다는 건 어떤 일인가?
OTT가 부상하고 있지만 스크린만이 가진 감동이 있다. 대중의 인식도 아직 ‘무비 스타’란 말이지. 하지만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을 경험해보니, 청소년 관람불가를 방영할 수 없고 광고도 들어가는 TV에 비해 소재의 다양성이 존중되고 표현이 자유롭다고 느꼈다. 요즘 사운드믹싱 과정을 거치며 든 생각인데, 켜켜이 쌓인 음향을 TV나 모니터 스피커로 들으면 다 전달되지 않잖아. 누군가는 집에 서라운드 스피커가 있겠지만, 대개는 내부 스피커로 들을 테니 어떻게 최적화하는 게 좋을까. 두 가지 다 준비하면 좋겠지만 예산이 달라지니, 플랫폼에 따라 어떻게 관객에게 잘 다가갈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한다.
장르를 넘나들며 좋은 이야기를 잘 찾는 배우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넌 참 작품을 잘 고른다”고 한다. 그럼 난 그런다. “아직 망한 게 더 많아요.” 열심히 했는데도 망한 거 많다. 어쩔 수 없을 때도 많았고. 직장 다니면서 모든 게 다 마음에 드나? 그런 사람이 어딨겠어. 그런데 돈이 필요해서 했는데 막상 ‘이런 작업이 이렇게 즐거웠나? 선입견이 있었구나’ 하는 일도 생긴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다.
네이버 시리즈 <하렘의 남자들>을 짧게 연기한 클립으로도 화제가 됐다. “제가 후궁이 되어 아양이라는 걸 한 번 떨어보지요.” 과할 수 있는 대사를 너무 근사하게 하더라.
난 항상 과함을 요구당하며 살아와서 훈련돼 있다. 내가 현장에서 누구랑 부딪쳤다는 소리,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지 않나? 근데 그렇게 안 생겼잖아. 예민한 인상으로 보이니 시크하거나 상처가 있는 캐릭터들을 많이 제안받는다.
나도 주지훈을 사석에서 보고 발랄해서 내심 의외였다.
‘똥꼬발랄’한 아이다. 실제 날 알고 나면 많이들 그러신다. “성격이 생긴 거랑 다르네요.”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아니까 피곤할 때도 힘내서 웃으면서 말하곤 하지.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 특유의 매력이 느껴지거든. 그런 건 여유에서 나온다.
여유, 무관심. ‘어쩔 수 없음’이란 말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초연한가?
그런 편이다. 난 내게 이득이 될 걸 염두에 두고 계산적인 행동을 하지 않거든. 에이어워즈 상도 올해 많은 작품 속 많은 배우들 중 선정해서 주신 것일 텐데, 내가 무언가를 했으니 나온 결과겠지. 모든 건 사업이고 이해관계가 다 맞아야 되는 거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되면 좋고 아님 말고.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템포가 느긋해졌다.
여유의 근원이 그거네.
그런 것도 있다. 어릴 때 경제적으로 어려웠거든. 포기에 익숙하다. 누가 “배고파 죽겠는데 삼겹살 먹고 싶다”고 하면 난 “다른 거 먹어, 없는 걸 어떡해”라고 한다. 장단이 있지. 돌아보면 ‘이때 싸우더라도 물고 늘어졌어야 해’ 싶은 부분도 있지만, 난 상대가 받아주지 않으면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받아주지 않으면 강요가 되니까. 그런데 요즘 이런 고민도 든다. 내가 이끌어가는 입장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물음표가 생겼다. 아직 느낌표는 아니고.
곧 40세가 된다. 배우로서 어떤 나이인가?
드라마에 로맨스적 요소가 더 있다면, 영화는 사회 구성원 중 열심히 일할 나이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만들어지니 배우로선 영역이 넓어지는 좋은 나이다. 인간으로서 마음은 18세 때랑 똑같다. 문득 어제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 들며 사회적 통념을 충족시키지 못할까봐 슬프다. 60세가 돼서 꽃을 보고 “아, 예쁘다” 이랬는데 “너 주책이야”라고 할 수도 있잖아. 떡볶이 좋아하면 “무슨 애냐” 그러고.
배우 주지훈에겐 늘 소년성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철이 없어서 그렇다. 체면치례도 없고.
어떻게 이렇게 솔직한가?
난 싫으면 싫다고 한다. 후배가 “선배님 밥 사주세요” 하면 “싫어. 네가 싫은 게 아니라 오늘은 나가기 싫어” 그런다. 나도 내가 누군가에게 익스큐즈를 요청했는데 거절당하면 받아들인다. 섭섭해도 길게 끌고 가지 않지. 부정적인 감정도 그렇다. 자격지심 없고 질투 안 하는 인간이 어디 있겠나? 단지 그게 날 파괴하지 않게 많이 신경 쓴다.
인간 주지훈에 대해 궁금했는데, 답을 들은 것 같다.
인간 주지훈, 어떻게 알겠어. 누가 알겠어. 예전에 에쿠니 가오리의 단편들을 참 좋아했다. 문체가 담백하잖아. 인용할 건데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시댁에서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와 전철을 탔다. 창밖을 바라보는데 잇세이가 물었다. ‘당신, 남자 생겼어?’ 나는 답했다. ‘생기지 않았고, 만날 마음도 없어. 그런데 우리 헤어지자.’” 따져보면 모든 감정엔 인과관계가 있겠지만 그전에 무의식이란 게 있잖아. 순간적 감정. 호흡 하나, 단어 하나로 호감이 생길 수도 있고, 어떤 크랙을 감지하고 깨질 수도 있다. 우연하고 사소한 것들로 우리는 이루어져 있다.
지금은 배우 주지훈의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지점에 있나?
안정된 것 같다. 대중에게 안정적으로 다가섰다는 뜻이 아니라, 나 스스로 자신을 믿고, 나를 믿어주는 감독, 작가님들이 많이 생겼다. 이렇게 말한다고 오해하진 말라. 절대 친하다고 캐스팅하지 않는다. 본인들 차기작에 대해 서로 조언을 얻다 아이디어가 나와서 만들어볼까? 할 때도 있는 거지. 영화를 보다 어떤 신의 조명이 궁금해지면 아는 조명감독님께 물어본다. 감독님이라면 어떤 의도로 그런 것 같아요? 이 모든 것이 나의 놀이다. 아주 재미있는 과정을 지나고 있다. 내가 가려는 방향과 라이프스타일을 잘 맞춰나가면서.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다.
차기작인 드라마 <지리산>과 영화 <사일런스> 촬영 중이다.
<지리산>은 멜로에 강한 이응복 감독과 스릴러에 강한 김은희 작가가 만나 흥미로운 작품이 나올 것 같다. 전지현 선배와의 호흡을 기대하는 분들도 많고. 선배들이라 부담 없다. 하하. <사일런스>도 선균이 형, 희원 선배가 있으니.
2020년에 기대 이상과 기대 이하였던 순간은?
삶의 변주를 즐긴다. 마스크 쓰고 산을 오르면 숨차고 답답하지. 막상 정상에 오르면 차량 통행량이 줄어 너무 맑은 하늘이 반겨준다. 언덕 오를 때의 답답함이 기대 이하라면 맑은 하늘은 기대 이상이겠지. 예측 불가한 변수들은 어쩔 수 없는 거다. 다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엔 동참하지만, 나 개인의 분노나 즐거움으로는 바꿀 수 있는 게 별로 없다고 느낀다. 그래서 흐름에 충실하려 한다. 기대한 음식이 맛없으면 그걸 소재로 웃기고, 기대하지 않은 음식이 맛있으면 의외의 행복을 얻는다.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서 상처받을 수도 있지만, 그가 다시 손을 내밀 수도 있잖아. 삶은 참 알 수가 없다.
주지훈은 삶이란 큰 파도에 몸을 맡기는 사람이네.
그렇지. 골프는 사람의 성격이 드러나는 스포츠라고 한다. 가만히 있는 공이 안 맞으니까. 난 캐디님이 스코어보드를 드시면 “제 거는 세지 마세요”라고 말씀드린다.
2021년에 가장 기대하는 건?
코로나19 백신. 하와이 가서 자전거로 100km씩 달리며 허벅지 터질 듯한 쾌감을 느끼고 자연을 만끽하고 싶다. 사람들의 시선? 신경 쓰지 않는다. 배우라는 일을 하며 어떻게 시선을 마다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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