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들어오자 두터운 코트에서 싸한 향이 훅 끼쳤다. 간밤에 코트 자락에 엎지른 코냑이 차갑게 얼어붙은 겨울 공기와 뒤섞인 듯 알싸한 냄새가 진동했다. “어제 진탕 마셨어?” “향수잖아.” “향수로 목욕이라도 한 모양이네.” 그가 목덜미를 쓸며 머쓱하게 웃었다. “무슨 그제 만난 사람처럼 말한다.” 3년간 그는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10년 전이었던가, 우리는 딱히 놀 사람이 없으면 매해 12월 24일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카페 ‘여름’. 대학생 시절, 입수하기 어려운 해외 독립 영화를 종종 틀어줘서 오곤 했던 곳이다. 이상한 영화도 보고 못 치는 기타도 치는 척하던 풋내기 시절이 전생처럼 아득했는데, 그 시차가 주는 감각이 좋아서 학교를 떠나서도 여기서 보자는 약속을 했던 것 같다. 상대가 나오지 않은 해도, 내가 나가지 않은 해도 있었다. 둘 다 나오지 않은 해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한겨울에 여름에서 만나자는 약속은 몇 해를 건너서도 지켰다.
하필 크리스마스이브를 만나는 날로 잡은 건 참으로 후진 짓이었으나, 약속을 했던 시절 우리는 어렸고, 명절처럼 정해진 무언가를 하자는 구실이 필요했다. 말하자면 의식 같은 것이었다. 몇 년에 한 번씩 여름에서 만날 때마다 우리는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업데이트했고, 매해 연말 맘 졸이며 신춘문예 시를 투고하던 경향신문사를 지나 정동길을 걸었고, 시청 앞 광장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소공동 호텔 베이커리에서 작고 예쁘고 비싼 마카롱을 샀다. 그러나 3년간 나이 든 나는 거대한 트리 앞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행위가 더 이상 낭만적이지 않고 미련하게 느껴졌다. “그냥 쇼핑이나 하자.” 멀지 않은 백화점 본관으로 가기로 했다. 우린 이제 돈도 버니까. 게다가 크리스마스이브는 이미 선물을 장착한 연인들이 방을 찾아 헤매는 날이니 백화점은 그나마 한산하지 않을까?
대단한 오해였다. 그곳은 정상 가정들이 서로 팔짱을 끼거나 아이를 안고 유대를 다지기 위해 쇼핑을 하는 전장이었다. 매장에 들어가기 위해 157번 대기표를 끊어야 했다. 그동안 우리는 반짝거리는 크리스마스 디스플레이를 봤다.
겨울은 이상하다. 크리스마스 시즌은 이상함의 정점이다. 가장 삭막하고 추운 날을 가장 빛나고 반짝이도록 꾸미는 인간의 계절. 백화점 불빛은 따듯하고 화려했고, 캐럴과 아기 천사와 별 모양 오너먼트가 가득했으며, 캐러멜과 초콜릿 냄새가 그윽했다. 양팔에 쇼핑백을 걸고 팔짱을 낀 채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 보였다. 나도 그에게 슬쩍 팔짱을 걸쳐보았으나 이내 빼고 말았다. 소외감을 느끼려고 여기 온 것일까? 마치 움푹 빠져버린 이빨 구멍을 혀로 쓸어보는 것 같은 아릿한 쾌감을 느끼려고?
긴 대기를 마치고 매장에 들어서자, 재고 상태에 따라 희비가 교차하는 얼굴들이 보였다. 기억해둔 제품명 몇 개를 말했다. 전부 품절이었지만, 점원 목소리를 낮춰 비슷한 디자인으로 신상이 하나 남아 있노라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비밀을 밝히는 사람처럼 은밀히 속삭였다. 바짝 다가온 점원에게서는 이 브랜드 향수인 ‘스윔’의 향기가 났다. 한겨울의 수영. 이 경쾌한 캐럴 사이에서 홀로 느긋하게, 잠영하고, 침잠하는⋯.
마침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샀다. “이러려고 돈 버는 거지 뭐.” 그는 가격표를 보고 혀를 쯧쯧 차면서도 그것이 예쁘고 내 안목이 쓸 만하다는 점에는 충분히 동의해주었다. 더스트백에 곱게 담아 브랜드 로고의 종이 백을 어깨에 걸치자 나도 크리스마스의 일원이 된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 아주 반갑게 나를 불렀다. “선배! 이게 얼마 만이야. 이런 데서 다 만나네!” 같이 영화를 찍던 후배였다. 나나 그와는 달리, 후배의 얼굴엔 아직 생기와 생에 대한 욕망이 선연했다. 통통한 볼에 윤이 나는 모피 코트를 두르고 있었고, 멀찍이 선후배의 정다운 해후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뒷짐을 지고 서 있는 한 남자도 보였다. 그나저나 얘, 비건 아니었나. 그리고 무엇보다⋯.
후배는 덥석 내 팔짱을 꼈다. “잘 지냈어? 기자로 일한다는 얘긴 들었어. 왜 이렇게 연락이 없었어? 다들 선배 소식을 몰라. SNS로 기사나 가끔 보지. 나? 난 곧 결혼해. 저기 우리 신랑. 오는 봄에 할 건데 결혼식 와줄 거지? 혜민이랑 소현이도 올 거야.” 낯설게 들리는 그리운 이름들. 모피 코트 안에 어처구니 없게도 새틴 원피스를 입은 후배의 살에선 달큰한 향이 났다. 식욕을 당기는 구어망드의 향조. 나는 잠시 혼이 빠져 있다가 결혼을 축하한다고 했다. 후배 부부가 입장할 순서가 되어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가 없었다. 그도 후배를 분명 알 텐데. 우린 여름에서 같이 영화를 보고 기타도 쳤는데. 마치 도망친 사람처럼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브랜드 로고가 박힌 커다란 종이 백을 멘 채 사람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천천히 백화점을 나섰다. 그냥 정동길을 걸을걸. 스케이트를 탈걸. 작고 예쁜 마카롱이나 살 걸. 담배 한 대를 천천히 태웠다. 기다렸다는 듯 그가 멋쩍은 얼굴로 다가왔다.
“후배 보기 난처해서 먼저 나와 있었어. 우리 사이 오해할 수도 있고.” “뭘 오해를 해.” “크리스마스이브에 같이 있으면 아무래도⋯. 너랑 나 어릴 때 잠깐 만나기도 했었잖아.” “아니, 걔가 우릴 어떻게 오해해. 그리고 오해하면 또 어때?” 격하게 따지자, 그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나 결혼해, 1월에. 이제 크리스마스이브에 못 나올 거야.”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나는 입을 다물었다. 크리스마스는 짝짓기의 날이라지만 이런 짝짓기 얘긴 듣고 싶지 않았다. 담배를 마저 피우고 쏘듯 말했다. “비겁하네.” 그는 잠시 침묵한 뒤 말했다. “미안하다. 약속 못 지켜서.” 그리고 덧붙였다. “너는 너대로 살아.”
나는 한평생 오직 나만은 아니기만을 바라며 살아왔는데, 사람들은 사회의 주류에 편입하며 다른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흉내일까? 변화일 수도 있었다.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는 떠났고 소매에 짙은 코냑 냄새가 배어 있었다. 나는 이 향기의 이름을 알고 있다. ‘엔젤스 셰어’, 위스키와 코냑 숙성 과정에서 증발하는, 천사들을 위한 술. 하나둘 곁에서 사라지는 이들과 내 몫으로 남은⋯. 이제 여름엔 다신 가지 않을 것이다. 그해 성탄절,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향기만이 남았다.
EDITOR 이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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