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패션위크 온에어
올해 초만 해도 예년과 다름없었다. WHO에서 팬데믹을 선포한 건 2020 F/W 시즌이 마무리된 직후. 대체안은 디지털 패션위크였다. 기존의 패션위크 아젠다를 바탕으로 한 타임테이블에 맞춰, 각자 정해진 시간에 유튜브, 홈페이지, SNS 등 각 브랜드의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영상을 송출하는 방식. 가상의 공간에선 시간과 장소, 표현의 한계가 없었다. 기존의 패션쇼를 실시간 라이브로 방송하거나, 메종 마르지엘라의 존 갈리아노,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 등 좀처럼 얼굴 보기 힘들었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이 직접 나서 컬렉션을 설명하는 다큐멘터리, 또 감각적인 비주얼을 앞세운 패션 필름 등 표현 방식은 각 브랜드의 성격에 따라 극명하게 나뉘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셀린느 맨즈 컬렉션. 쿨하고 힙한 룩도 그렇고, 틱톡을 통해 주목받기 시작한 뮤지션 티아즈(Tiagz)와 작업한 사운드트랙 ‘They call me tiazo’, 무엇보다 비트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흐르는 카메라 무빙까지 압도적이었다. 그 와중에 책상 위 작은 모니터를 통해서도 섬세한 디테일 하나 놓치지 않고 잘 보이게 연출한 구성까지 모든 요소가 디지털 플랫폼에 최적화되었다. 그 어떤 웅장하고 화려한 영상이나 복잡다단한 내용들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셀린느의 12분 영상이 가장 집중도가 높았다. 물론 이렇게 만족도 높은 경우가 흔치 않다. 아무래도 직접 보고 경험하는 런웨이 쇼보다 관심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고,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패션위크 아젠다나 런웨이 쇼의 형식 등 뿌리 깊게 박혀 있던 규범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아마도 2021 S/S 시즌을 시작으로, 앞으로 많은 것들이 시시각각 변하지 않을까.
2 가격 인상
범사회적 경제 침체가 극심해지는 가운데, 오히려 가격을 대폭 인상하는 하이엔드 브랜드들이 줄지어 등장하고 있다. 까르띠에, 오메가, 브라이틀링, IWC, 티파니 등 하이엔드 워치&주얼리를 비롯해 샤넬, 루이 비통, 디올 등 하우스 브랜드들은 가격 인상을 단행했다. 대체로 본사 가격 정책의 변화, 환율과 원가의 상승, 인건비 상승 등이 그 이유. 또 코로나19로 인한 매출 감소의 대응책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시그너처 모델들은 일찌감치 매진 행렬이 이어졌고, 재입고 소식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가격 인상 시행 전날까지 매장 앞은 오픈 전부터 사람들이 줄지어 늘어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이쯤 되면 가격 인상 자체가 올해 최고의 마케팅이었을 수도.
3 패션 틱톡커
매거진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다소 슬픈 얘기지만, 더 이상 Z세대는 종이 매체를 통해 패션을 접하지 않는다. SNS, 특히 누구나 쉽게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15초가량의 즉흥적인 재미와 변화무쌍한 영상을 업로드할 수 있는 틱톡을 통해 정보를 접하고 공유한다. 어마어마한 팔로워 수를 거느린 틱톡커가 Z세대에겐 할리우드 유명 배우와 뮤지션 이상으로 파급력 있다. 패션 브랜드들도 그 점을 인지해 틱톡 스타 모시기에 한창이다. 에디 슬리먼은 틱톡 스타 노엔 유뱅크스를 직접 촬영하고 캠페인 모델로 낙점하는가 하면, 2021 S/S 컬렉션은 틱톡의 이보이(Eboy)들에 영감받아 전개했다고 한다. 프라다는 2020 F/W 컬렉션에 찰리 더밀리오를 모셔왔다. 그가 폰다치오네 프라다에서 라이브로 촬영한 영상은 엄청난 조회 수와 ‘좋아요’를 받았으니 틱톡 스타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 특히 올해는 코로나19 영향도 한몫했다.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져 틱톡의 다운로드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고 패션 브랜드들도 하나둘 틱톡 계정을 생성했다. 2020 F/W 쇼에 틱톡커 체이슨 허드슨을 초대했던 돌체앤가바나는 틱톡커와 함께한 댄스 영상을 업로드했고 구찌는 모델이 아닌 틱톡커들이 구찌의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하는 구찌 모델 챌린지를 진행했다. 앞으로 Z세대를 공략하기 위한 패션 브랜드들의 틱톡 활용법은 더욱 다양해질 전망이다.
4 팬데믹 룩
이제 정말 마스크는 완벽한 일상이 되었음을 실감한다. 루이 비통은 이 냉혹한 현실을 돌파할 아주 힙한 마스크 룩을 제안한다. 2021 S/S 시즌의 주요 모티브인 모노그램 태피스트리 프린트로 이뤄진, 인증받은 마스크 위에 착용하는 100% 면 소재 마스크를 출시했는데, 가격은 놀랍게도 64 만원. 같은 패턴의 반다나, 보관용 드로스트링 파우치까지 세트로 구성된 가격이지만, 입이 떡 벌어지는 건 사실. 그럼에도 분명 불티나게 팔릴 것으로 예상된다. 아무튼 요지는 사이에 마스크가 머플러, 비니 같은 필수불가결한 패션 액세서리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점이다.
5 파산 위기에 처한 브랜드
디지털 매체를 통해 팬데믹 상황을 헤쳐 나가려는 브랜드가 있는 반면, 안타깝게도 몇몇 브랜드는 심각한 매출 감소로 인해 파산 보호를 신청했다. 특히 미국 브랜드가 두드러지는데 에이브러햄 링컨, 버락 오바마 등 미국 대통령들이 즐겨 입은, 2백 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브룩스 브라더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 최대 백화점 JC 페니와 니만 마커스 역시 파산 보호 신청을 했으며, 보다 앞서 제이크루 또한 코로나19를 피해 갈 수 없었다.
6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지각변동
지난 3월 프라다는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라프 시몬스가 합류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이전까지의 어떤 디자이너 이동 소식보다 파격적이고 이례적이었다. 단발적인 이벤트 같은 협업이 아닌 두 거물 디자이너의 파트너십은 침체해가던 패션계에 신선한 기대감을 불어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밀라노에서 선보인 라프 시몬스의 프라다 데뷔 쇼는 1990년대의 프라다로 회귀한 듯했다. 절제된 프라다의 유니폼에 라프 시몬스의 개성을 녹인 룩들이 금빛 런웨이를 가로질렀다. 요즘 가장 핫한 이름 중 하나인 1017 알릭스 9SM의 매튜 M. 윌리엄스도 하우스 브랜드에 입성했다. 클레어 웨이트 켈러가 떠난 뒤 공석이었던 지방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낙점된 것. 팬데믹 시기로 2개월간 바쁘게 준비한 그의 첫 번째 시즌은 온라인으로 접할 수 있었다. 하드웨어와 쿠튀르가 결합된 이번 컬렉션은 브랜드와 그가 공유하는 장인 정신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디올 맨의 킴 존스는 펜디의 오트 쿠튀르, 여성 레디투웨어, 퍼 컬렉션의 아티스틱 디렉터로 발탁돼 누구보다 바쁜 2021년을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디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와이 프로젝트의 글렌 마틴을 영입한 소식까지, 패션 브랜드들이 정통 또는 변화라는 방향성 외에 시대의 흐름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인물을 갈망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7 모델 없는 패션 매거진 커버
전례 없는 팬데믹 상황에서 몇몇 패션 매거진은 모델이나 셀럽 없이 커버를 장식했다. <보그 이탈리아>의 4월호 표지는 순백의 화이트였다. 이에 <보그 이탈리아> 편집장은 화이트는 의료진의 흰색 유니폼이나 새 시작을 의미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말했다. 미국 <베니티 페어>는 매그넘 포토스 사진가 알렉스 마졸리의 사진을 실었다. 코로나19로 문 닫은 가게와 텅 빈 이탈리아의 거리를 기록한 그의 흑백사진은 쓸쓸하고 담담한 현실을 대변했다. 이외에도 의료진을 커버 전면에 내세운 <그라치아>, 마스크 쓴 연인의 키스 사진을 실은 <보그 포루트갈> 등 현시대를 바라보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담은 커버로 따뜻한 위로를 전했다.
8 지속 가능한 패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이슈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던 올해, 17세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면서, 여러 브랜드들이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프라다는 2021년 말까지 브랜드가 사용하는 모든 나일론을 재생 소재로 사용하겠다는 포부를 내세웠고, 실제로 가장 최근 선보인 2021 S/S 컬렉션에서 리나일론 소재를 활용했다. 나이키는 폐기물을 이용해 지속 가능한 베이퍼맥스 스니커즈를 만들었으며, 파타고니아는 화학 비료를 쓰지 않는 재생 유기농업 개발에 힘을 보탰다. 그 외에도 공병 재활용 캠페인, 페이크 퍼 사용 등 여러 브랜드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지속 가능한 패션을 위해 앞장서고 있다.
9 성별의 경계를 지운 패션
더 이상 패션과 뷰티의 영역에서 남성과 여성을 나누는 잣대는 무의미해졌다. 남성적이라든가 여성스럽다거나 하는 고지식한 관념은 통용되지 않는다. 이제는 어떤 아이템을 누가 입느냐보다 어떻게 입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로 변화했다.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이런 시대정신을 패션에 녹인 지 오래다. 코로나 시대에 맞춰 전문 모델 대신 구찌의 디자이너들을 모델로 세운 에필로그 컬렉션만 봐도 성별을 구분 짓는 건 진부한 시절 이야기인지 알 수 있다. 모든 룩은 남성복과 여성복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고, 빨간색 네일을 바른 투박한 남자 손도 하나의 액세서리처럼 전체적인 룩에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루이 비통은 새로운 유니섹스 파인 주얼리 컬렉션 ‘LV 볼트’ 라인을 선보였다. 바이레도가 이사야마 프렌치와 협업해 새롭게 론칭한 색조 메이크업 라인 역시 젠더리스 메이크업을 콘셉트로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10 모여봐요 동물의 숲
팬데믹으로 고립의 시기를 겪으면서 자연스레 가상세계가 현실로 깊숙이 스미게 됐다. 때마침 3월 발매된 닌텐도 스위치의 ‘모여봐요 동물의 숲’ 에디션은 ‘록다운 히트 게임’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신드롬을 일으켰다. 소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사용자가 본인의 캐릭터를 개성대로 꾸밀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자 장점. 발 빠른 패션 브랜드들은 이 가상세계를 통해 현실 소비자들의 욕망에 접근했다. 그 선두에는 발렌티노와 마크 제이콥스가 있다. 마크 제이콥스는 봄/여름 시즌의 6개 의상을, 발렌티노는 프리폴 시즌의 25가지 디자인을 동물의 숲 전용 아이템으로 선보였다. 온라인 편집숍 네타포르테는 닌텐도와 제휴해 동물의 숲 캐릭터 전용 숍을 열었다. 프라이빗 비치와 노천탕, 전용 짐이 있어 느긋한 휴식을 즐기며 맘껏 쇼핑도 할 수 있는 네타포르테 섬에서 다양한 브랜드의 최신 컬렉션을 입고 구매할 수 있다. 물론 이 의상들은 네타포르테 홈페이지를 통해서 실제 상품 구매로도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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