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세계 곳곳에서 전시를 펼쳐왔어요. 하지만 이제는 해외로 나가기도 들어오기도 어려운 시기예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지난 2월 말에 귀국했고, 독일 대학교 방학이 끝나는 4월 중순경에 베를린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지금까지 서울에 있네요. 마치 선녀와 나무꾼 얘기에 등장하는 두레박 놓친 선녀가 된 기분이에요. 자의든 타의든 맞닥뜨린 상황을 스스로 소화하고 의미 부여해야 하는 작가의 입장이라 옷을 잃은 선녀가 된 상황, 즉 수동적으로 발이 묶인 게 흥미로워요. 매우 능동적인 직업을 가진 제가 수동적이 되니 나름대로 자유롭더군요. 주도권을 내려놓았을 때 느껴지는 해방감이 신선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제한된 생활 방식 내에서 과연 뭘 할 수 있을지 고민되기 시작했죠. 이미 제 전시는 많이 밀렸기 때문에 여유가 좀 생겼고요. 그 틈을 학교 수업을 통해 많이 메웠어요.
실기 수업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온라인 수업은 어떻게 진행했나요?
상당 부분 독서 토론으로 바꿨어요. 예를 들면 소설의 설정이 초현실적인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단식 광대>를 학생들과 같이 읽었어요. 그 소설이 묘사하는 세계에서는 케이지 안에서 단식하는 예술가를 보는 게 가장 큰 볼거리였어요. 힘없이 앉아 있는 그 예술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관찰하고, 단식일이 늘어날수록 그의 변화를 주목하면서 열광하죠. 마치 우리가 코로나19 감염 환자를 쫓으며 요동치듯이요. 예술가는 한 마을에서 몇 주씩 머물다 이동하는데, 저는 그게 전시 기간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 사조가 사그라지고 더 이상 사람들은 단식 예술가에게 관심 갖지 않아요. 다른 것을 주목하죠. 그렇지만 세상이 변했다 하여 작가로서 변할 수도 없고, 변해야 할 이유도 없죠. 결국 예술가는 자신의 재능을 전부 발휘해 단식하다가 죽어요. 우리는 위기 상황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 고민하며 예술가의 본모습을 돌아보게 돼요. 그것이 죽음이라는 극한을 향할지라도 카프카의 소설에서처럼 재능을 발휘해 끝까지 갈 수도 있고요. 학생들과 이러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울 체류가 이어지고 있어요. 다음 학기에는 학교에 갈 수 있을까 질문하면서, 결국은 과거의 ‘정상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으리라, 이제 이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변이가 있겠죠.
어제 기사에서는 더 전염력 강한 변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보도됐어요. 앞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돼요. 미술계와 또 미술을 접하는 젊은 세대의 태도도 달라질 수 있을까요? 전시장에 가서 작품을 관람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미술을 대하는 활동이라면, 요즘은 온라인 채널에서 미술을 접하고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경향이 보여요.
전시라는 경험을 100% 정보로 환원시킬 수 있느냐? 경험 안에는 물리적인 경험, 사회적인 경험, 정보적인 경험도 있어요. 저는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어느 부분이 가능하고 불가능한지는 꼼꼼히 따져봐야 해요. 또 미술 경험에는 항상 강도라는 것이 있는데, 사람들은 보통 미술 전시가 정보라고 생각해서 80% 이해했느냐, 20%를 보았느냐만 따져요. 하지만 시각적인 혹은 지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강렬함의 정도라는 게 있고, 그 강도의 중요성을 절대 잊어선 안 돼요. 어떤 경험이 내 것이 되어 나의 삶이나 태도를 변화시킬 때는 정보적인 측면보다는 강도가 중요하고, 우리는 그 중요성을 이미 알고 있어요. 제가 작업량이 많은 편이지만, 제 역사에 남는 전시와 작업은 아마도 제한적일 거예요. 어떻게 보면 대부분 저의 행위는 제한적이지만 결정적인 강렬한 그 경험으로 가는 과정뿐일 수 있어요. 마우스 클릭으로 화면을 통해 전시를 관람하는 행위로 인생 전시가 성립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물리적 전시 관람의 강렬함을 포기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겠죠.
공연과 행사가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서비스되는 추세예요. 사람들의 반응은 호불호가 갈렸어요. 스트리밍 공연이 대안으로 이용되고 있지만 기존 역할을 대체하기 어렵다는 주장이죠.
기존 전시를 그대로 촬영해서 옮기는 건 한계가 있어요. 만약 제가 기획자라면 좀 더 실험적인 온라인 중계를 할 것 같아요. 아마 이 상황이 지속되면 작가들도 특화된 모종의 언어를 개발할 것 같아요.
이 환경에 특화된 언어라면 무엇일까요?
예를 들자면 제가 물리적인 전시와 동시에 처음부터 ‘언택팅’ 관람까지 고려해 전시를 만들어가는 것이죠. 그런 실험이 곧 다음 세대에서 발생하리라고 봐요.
요즘 10대 흔히 ‘젠지’라고 부르는 세대가 박물관과 전시장을 교육 장소로 느낀다는 칼럼을 봤어요. 기획자가 설계한 전시를 정해진 동선을 따라 체험하고 나오는 과정을 훈육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죠. 젠지는 작품을 자신이 선택해 자신의 미디어에서 전시하고, 직접 미술 활동을 펼치기도 하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작가를 선택해 구독하는 게 자연스러워요. 요점은 갤러리의 기존 활동을 10대는 훈육으로 느낀다는 것이죠.
앞서 말했듯 기존의 전시 관람 형태가 실험적이지 않기에 의도하지 않았으나 설명에 집착하다 보면 훈육적이라고 느낄 것 같아요. 그러나 제가 코로나19 때문에 피동적으로 바뀐 제 상황에서 해방감을 느꼈듯이, 활동적, 적극적 전시 감상보다는 자유로운 관조적인 활동일 수도 있어요. 저는 소위 말하는 ‘인터랙티브 아트’에 반감이 있는데, 뭔가 작동하고 고르는 그 순간, 사유나 감상이 멈추는 함정이 내재돼 있기 때문이에요. 대부분의 관람객은 뭔가가 바뀌는 ‘액티브’한 순간 관조적인 기능을 모두 꺼버리고, 작동되는 결과에 만족하죠. 어떤 방식이든 함정을 줄이는 게 중요해요. 전시장에서 정해진 동선에서 벗어난 경로로 걸으며 스스로 전시를 재구성할 수도 있겠지만, 기존의 동선을 따르면서도 충분히 내용을 흡입하고 나서 머리로 전시를 창의적으로 재구성할 수도 있어요. 중요한 건 관람자의 자의식이죠. 어느 순간 어떤 의도로 ‘액티브’한 경험이 발현되느냐, 마느냐는 기획자나 작가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거 같아요. 그래서 혹자는, 전시가 관람자에 의해서 완성된다고 하잖아요. 훌륭한 작품은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죠. 제가 많은 도전을 전시에 심어놓아도, 제가 그 도전을 발현시킬 순 없어요.
인터뷰 오는 길에 지난해 마이애미에서 개최한 전시 <불확실성의 원추>가 생각났어요. 비가 내릴 듯 말 듯한 날씨 때문이기도 하고, 코로나와 사회, 경제도 불확실하기 때문이겠죠.
기상 예보의 허리케인 이동 경로를 보면 오늘, 내일, 모레로 이어질수록 원추 형태로 계속 넓어지죠. 이러한 기상관측 예보에서 혼돈 이론과 연관 있는 ‘불확실성의 원추’란 용어가 등장해요. 과학자들은 예견의 폭이 너무 넓어졌을 때, 혼돈 혹은 불확정성을 호명하죠. 확정성, 불확정성이 단칼로 나뉘지 않고, 중간 톤들이 사이사이 있죠. 혼돈 이론은 본래 기상 예측을 위한 연구였는데 지금은 사회, 경제 모델에까지 적용되는데, 그런 파급력이 흥미로워요. 그다음에 재밌었던 것은, 수학적 계산이 불가능한 저 같은 비전공자가 과학을 은유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이죠. 과학이 은유나 비유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고, 나아가 계속 소통이 이루어지려면 시각화된 모델, 문학적인 비유가 필요하다는 얘기이기도 해요. 비록 피상적일 수밖에 없을지라도 이방인으로서 타 지역에 대해 알아가고자 모르는 곳에서 전시하는 경우가 많아요. 몇 년 연구를 해도 외국 작가가 한국인만큼 한국 사회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외국 작가의 관점이 흥미롭고 의미 있는 것은, 새로운 시각의 자유로운 독해가 사회에 유용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불확실성의 원추’ 같은 기상 모델들도 과학과 사회-문화 사이의 접점일 수 있어요. 또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점은 인류세적인 것이죠. 모든 인류의 역사, 성취가 이제까지 전부 인간의 관점에서 쓰였잖아요. 인간의 관점을 벗어나면, 허리케인은 무죄입니다. 허리케인은 곧 재해라는 인식은 인간의 관점이에요. 과학적으로 보면 심지어 경이로운 허리케인 이동은 열역학에 의해 이루어질 뿐이죠. 막대한 양의 물을 담고 있는 대양에서 온도 차에 의한 증기 생성, 어마어마한 힘이 생기면 움직이기 시작해요. 대지를 향한 경로라는 게 생기고, 사실 태풍은 대지에 닿자마자 세력을 잃고 소멸하죠. 시적이고 비극적이에요. 인류세적으로 보면 태풍은 무죄고, 에너지의 흐름만 남죠.
태풍은 죄가 없지만 잦은 태풍과 긴 장마, 호주 산불 등 급격한 기후변화는 오존층 파괴가 주요 원인으로 꼽혀요. 이상 기상 현상의 발생에는 인위적인 작용이 있지 않나 싶어요.
그럼요. 인류세는 반성적인 철학이에요. 인간 위주의 역사와 문명을 윤리적으로 또한 철학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죠. 인간이 사실 인간의 관점을 버릴 순 없으니까요. 제가 어떻게 곤충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겠습니까. 다만 그 관점을 투사하는 거죠. 비유와 은유, 투사 이런 것이 중요해지는 거예요.
또 재미있는 것은 스타트업이에요. 지금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 중 그들이 인식하지 못한 불편함을 발견하고, 해당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로 제공하는 사업이죠. 그들은 저 자신도 몰랐던 제 문제를 찾아 해결하고자 해요.
저는 스타트업의 어드바이저가 되고 싶습니다.(웃음)
작가님의 활동이 스타트업과 유사하다고 느꼈어요.
다만 저희는 기능성이 상당히 떨어지죠. 아까 <단식 광대> 얘기처럼 각광을 받든 관심을 못 받든, 언제나 완전히 무심해요. 그럼에도 사회 안에서 존재감이 있고, 일의 완성도도 절대 타협이 안 돼요. 스타트업은 저희보다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줄 수도 있어요. 저희는 사람들에게 그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특이한 존재들이죠. 다만, 명확한 답은 없지만, 어떤 사회나 문명에서도 예술가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믿음 같은 것이죠. 상위 문화는 특유의 온화한 면이 있어요. 그것에 호소하고 싶더군요. 팬데믹 시대에 고급 미술의 영향력은 아이돌보다 떨어지고, IT 기업 대표보다 낮을 수 있어요. 그 점을 정확히 이해하면 세상에 더 많이 기여하지 않을까요. 괜히 어중간하게 따라 하다간 오히려 저희 몫이 사라질 수 있어요. 항상 이상한 그 역할의 담지자여야 할 것 같아요.
인류가 예술가와 동반해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미스터리죠. 그 점을 제 존재로서 누리고 있지만 제가 답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마 사람들이 그 점을 복기하면서 ‘도대체 내가 쟤를 왜 데리고 가는 거야?’ 질문할 수도 있겠죠. 그 의문 때문에 예술과 동반하는 거 아니겠어요?
열역학을 비롯해 사회학, 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이야기를 발견하시는 능력이 신비로워요.
제가 좀 잡다해요. 왜 그런 관심이 있는지 저도 몰라요. 근데 그냥 관심이 가요.
위키피디아 같아요.
완전 아마추어인 거죠. 좋게 말하면 뒤죽박죽 방식이 환상적일 수도 있고, 어마어마하게 말도 안 되는 뻘짓일 수도 있고. 왔다 갔다 하죠. 작가들의 연구 방식이 공부하는 분들처럼 체계적이지 않아요. 그렇게 될 수도 없고.
인터뷰에 앞서 스트리밍 행사 및 공연 스케줄 앱 개발에 대한 아이디어를 말씀하셨어요. 그런 기발함은 어디서 비롯된 건가요?
그냥 무척 절실했어요. 스트리밍 행사가 정리된 앱이나 디렉토리가 있으면, 오늘 어디서 어떤 행사를 하고, 오프닝이 있고, 작가와의 대화를 하는지 쉽게 알 거예요. 시간대별로만 정리돼 있어도 사용자 입장에선 참 편리하겠죠. 링크만 누르면 어느 미술관 웹으로 가고, 대안 공간, 유튜브 채널에 접속할 수 있어요. 근데 그 링크를 인스타그램에서, 트위터에서 매번 찾아다니는 건 불가능해요. 캘린더에 적어놔야 하니까. 그 앱을 떠올리면서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한 건 모든 미술관들이 절망적이란 점이에요. 문 닫았는데도 콘텐츠를 만들어서 올리기만 하잖아요. 자기중심적인 각개전투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문화를 향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갈증을 생각하면 바로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어요.
외부에서 보아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미술 작가는 이 전시장 저 전시장 돌아다니는 장돌뱅이예요. 저는 완전 서울 사람이 아니에요. 오랜만에 서울에 와보니 기존 전시 공간이 많이 사라졌고 또 새로 많이 생겼는데 어디에도 그 현황을 정리해놓거나, 적절한 가이드 혹은 지도가 없어요. 그래서 어려움을 겪다 보니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 등 지금 소셜 미디어를 강하게 지배하는 기류는 편향성이에요. 한쪽으로 쏠려 있어요. 반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서가 있어요.
유명 연예인을 팬들이 배제하는 현상에서 유래한 ‘캔슬컬처’는 할리우드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인데, 이제는 사회 전반적으로 퍼지고 있어요.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을 받아들이는 관용인데, 바로 아웃시키는 데 대한 우려는 심각한 것 같아요. 다만 이 질주의 에너지를 전환하려면 사회적인 계기가 필요하고, 다들 그 계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관용에 대한 욕구는 있는데 그 욕구를 체화하는 사회적인 사건이 아직 일어나질 않았어요. 팬데믹 상황이 만들어내는 어떤 시너지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답답하잖아요. 사회적 이슈에 어떻게든 참여하고 싶다 보니까 이런 쏠림 현상이 가속화된 듯해요. 실재계에서 해소되지 않으니 더 드라마틱하게 받아들이는 것인지…. 지금은 저의 가정일 뿐이지만요. 어쨌든 정의와 관용에 대한 욕구가 공존하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에 대해 꼭 하실 말씀이 있나요?
이 글을 통해 전시를 설명하기보다는 일단 많이 와달라 홍보하고 싶습니다. 평가는 달게 받겠습니다. 그리고 전시를 특정 작가의 브랜드 프레젠테이션으로 보는 분들이 있는 것 같고, 전시의 성패도 일개 작가의 안녕과 행복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아요. 근데 작가에게는 표현이 정말 중요하고 그 표현이 세상과 만났을 때 발생하는 화학 작용이 저희의 희열이고, 그 희열을 위해 불나방같이 사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화학 작용은 전시장에서 봐야 돼요. 제가 제일 큰 힐링으로 여기는 활동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얘기들이 펼쳐지는 전시 관람이에요. 그리고 어떤 시대상도 담고, 그렇다고 개인이 없어지는 건 또 아니고. 미술은 그런 이상한 형태의 발언이라고도 할 수 있잖아요. 그런 희열을 꼭 느껴보시기를 바라요. 제가 드린다는 보장은 없지만 전시나 형태가 지닌 바꿀 수 없는 능력에 대해서는 제 스스로 매일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알고자 하는 게 목적은 아니기에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느끼신다면, 어쩌면 정확한 감상일 수 있어요. 느끼셨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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