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부터 얘기해보자. 음악을 선택한 것은 운명이었을까?
운명이다. 어린 시절 내게는 음악이 가장 가까운 매체였다. 형제가 없어서 혼자 노는 수단이 필요했고, 쉽게 접한 게 음악이었다. 당시는 국내에 힙합이 자리 잡기 시작하던 때라 TV를 틀면 비보이가 나오곤 했다. 힙합을 접한 뒤 집에서 혼자 노는 수단 중 하나가 가사 쓰기였고, 랩을 따라 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물론 그림도 그렸지만 당시에는 그림보다 음악에 더 손이 갔다. 아무래도 더 자극적이어서 그런지.
재즈 플로에 랩을 입힌 빈지노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활동 초기 재즈 힙합 앨범을 준비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재즈 힙합은 꾸준히 존재해왔고, 재즈 힙합을 좋아하는 입장이지만 당시 재즈 힙합의 랩은 재미없다고 느꼈기에 재즈 힙합이지만 요즘의 비트와 랩처럼 조금 더 세련된 것을 적용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이야기를 쌈디 형과 나눴던 기억이 난다. 이러한 취지로 재지팩트를 결성하게 됐고.
“계속해서 누군가를 따라 하려고 하는 것 같았고.
‘진짜 내 음악은 뭐지?’ 의구심도 들었다.”
10년 넘는 활동 기간 동안 지치거나 극복해야 하는 난관은 없었을까?
한때는 모든 게 새로웠고, 도전하면 전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내가 그동안 무엇을 했나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내 자신이 남을 따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점에 공감하는 창작자들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진짜 내 음악이라는 것을 했던가?’ 계속해서 누군가를 따라 하려고 하는 것 같았고. ‘진짜 내 음악은 뭐지?’ 의구심도 들었다. 해외 아티스트를 만나면 괜히 나 자신이 부족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고, 그 친구가 나를 아시안 브라더로 치부하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외국 음악의 흐름을 따라가기만 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이런 혼란을 겪는다고 생각했다. 진짜 나는 뭘까? 하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이 왔다.
그게 언제였나?
한 2년 전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군 복무 기간이었나?
그렇다. 당시 작업을 하면서 의구심이 들었다. 대중 음악계에서 정점에 있다고 알려진 사람들에게 내 음악이 자극이 될까. 나는 왜 습관처럼 최신 음악을 듣고, 그 흐름을 익히려고 하는 걸까. 왜 익혀야만 할 것 같은가?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힙합 신에서도 그 흐름이 포착됐다. 독특하고 유명한 아티스트를 잘 따라 하는 사람이 음악을 잘하는 사람처럼 포장됐던 것 같다.
오히려 대중은 빈지노가 힙합 신을 이끈다고 보았다.
음악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에서 당연히 내 나름대로 재해석을 하고 새로운 모습을 보였을 테지만, 그동안 내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의 옳고 그름에 대해선 고민이 됐다. 그 점을 바꿔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음악 활동의 목적이자, 본질에 대한 고민이다.
맞다. 힙합은 외국에서 온 문화이고, 너무 가볍게 접근하기도 했다. 또 그런 습관이 토착화되었고.
뚜렷한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이다. 힙합이라는 무형의 것에 내 삶을 투영한다고 해서 완전히 새로운 음악이나 장르가 탄생되진 않을 것이다. 본질에 접근하려는 행위가 잡을 수 없는 것을 추구하려는 것처럼 해석된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내가 새로운 음악을 대중에게 선보였을 때, 지금 힙합 신을 잘 아는 사람은 빈지노가 이런 음악을 제시하네? 하고 느끼기보다는 요즘 내가 무엇을 듣는지를 추측하고 평가하는 데 열중할 거다. ‘얘가 요새 이걸 하는 구나’라든지, ‘이거랑 저거랑 섞었네’라는 말이 쉽게 나오는 곳이다. 더 이상 그런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뮤지션은 나이가 들수록 이야기를 더 세련되고 편하게 들려주는 것 같다. 음악적인 성숙함이라고 할까?
그러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랩을 쓰다 보면 이렇게까지 말해야 되나? 싶을 때가 있다. 음악을 하려면 이런 주제까지 이야기해야 되나? 하지만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고. 그냥 넘어가자니 아무도 관심이 없을 것 같다. 이런 고민을 창작자들이 많이 겪는 것 같다.
추억 이야기 좀 들어보자. 지난 활동 중 스스로 성장했다고 여길 사건이 있었나?
자유로웠던 것 같다. 자유로울 수 있어서 ‘일리네어 레코즈’를 선택했고, ‘일리네어 레코즈’ 덕분에 자유로운 시각을 고수할 수 있었다. 그 시절 마음대로 활개 칠 수 있었던 점이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됐다.
자유로이 활동하며 여러 앨범을 발표했다. 그중 터닝 포인트로 꼽는 앨범은 무엇일까?
첫 번째 EP가 터닝 포인트였다. 그다음 앨범 중 굳이 터닝 포인트라면 <11:11>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르는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앨범이기 때문이다.
현재에 대한 이야기도 해보자. 활동 초기와 지금, 세상을 보는 관점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과거에는 대중에게 사랑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다가 조금 지쳐서 이제는 ‘사랑 좀 못 받으면 어때’가 된 것 같다. 지금이 더 자연스럽다. 예전에는 단순한 결정을 내릴 때도 사람들이 불편해할까 봐 눈치를 보곤 했다. 내 시선이 외부로 향해 있음을 발견하게 됐다. 지금은 내가 더 좋은 것, 내가 편하고 필요한 것을 하려고 한다. 이러한 선택이 마음을 더 편하게 만들어준다.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하고. 요즘은 내 자신을 더 사랑하려고 한다. 또 예전에는 탈바꿈이 가능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캐릭터처럼 보이기 위한 연기가 가능했고, 그만큼 유연했다. 나이가 들다 보니 이제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것 같다. 대신 만인이 좋아하는 사람과 나다운 모습의 접점을 찾으려 한다. 균형을 맞추되 나 자신에게 조금 더 신경 써야 할 필요를 느낀다.
“무리에 섞이지 않아도 되고,
혼자 해도 가능하다는 본보기가 되고 싶다.
그게 나 자신에게 바라온 점이다.”
음악 작업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곡 작업에 큰 변화를 주고 싶은 시기다. 습관처럼 했던 작업이 너무 많았다. 같은 방식으로만 작업해왔다. 최근에는 다른 영역의 사람들의 작업을 보려고 한다. 밴드 음악 하는 친구와 함께 비트를 만들기도 하며,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이전에는 나의 시각으로만 보려고 했다. 모든 퍼즐을 나 혼자 맞추려고 했는데, 이제는 조력자의 필요성을 느낀다. 시작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과거의 작업 방식은 비트를 받고, 그중에서 괜찮은 비트를 쓰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조금 더 재밌게 작업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언택트 시대라 사람 만나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상황이 개선된다면, 최대한 다양한 스타일의 사람들을 만나 함께 작업하고 싶다. 조금 더 깊게 혹은 멀고 다르게 접근하고자 한다.
요즘 주목하는 새로운 스타일은 누구인가?
최근 모쿄와 함께 작업하면서 좋은 느낌을 받았다. 모쿄는 직접 곡을 쓰고 부르는 친구다. 어느 날 그가 내게 생각지도 못한 비트를 들려주더라. 또 함께 작업하고 싶은 친구는 듀발 티머시(Duval Timothy)라는 영국 피아니스트다. 그의 피아노 느낌이 좋아서 함께 작업하고 싶다.
지금 호기심 갖는 주제는 무엇일까?
주말에 도자기 수업을 받고 있다. 도자기 수업은 음악과 비슷하다. 흙을 쌓아서 모양을 만드는 과정, 색을 칠하고 구워내는 과정도 음악과 비슷해서 흥미로웠다. 도자기를 만들다 보면 여러 생각이 들고, 음악과의 공통점도 느껴지고, 도움이 많이 된다. 도자기를 만드는 행위가 재미있더라.
손을 쓰는 작업이 생각을 비우게 만드는 것 같다.
그렇다. 몰입이 된다. 걷고 산책하는 것처럼. 또 능력자들을 보면 대단한 것 같다. 도자기 만드는 분들도 그렇고, 뜨개질로 모자 만드는 분들도 대단하다. 요즘 그런 게 자꾸 눈에 띈다.
빈지노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공연하고 싶은 곳이 있나?
숲속 공연도 괜찮을 듯하다. 숲에서 공연해보고 싶고 멋있다는 생각도 든다. 바다도 좋고. 자연에서 공연하고 싶다. 공연하고 싶은 곳이 하나 더 있다. 서울시청 앞 광장이다. 광화문도 그렇고 의미 있는 곳을 조금 더 재밌게 활용해보고 싶다.
전역 후 사회에 복귀하면 낯선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한 것이다. 창작자로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
지난해 전역 후 늘 하던 대로 활개 치며 살았던 것 같다. 음악은 총 3곡을 발표했는데, 스코어가 좋진 않았다. 스스로도 만족스럽지 못했고. 공백 같은 시간이 티가 났다. 내가 늘 하던 대로 하니까 이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체된 것 같아 환경을 개선하기로 했다. 내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시스템을 재정비했다. 지금은 ‘오케이, 쫄지 말고 여기서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자’라는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다.
마지막 질문이다.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해 당장 해야 하는 게 있다면 뭘까?
나는 좀 예외였으면 좋겠다. 특혜는 아니다. ‘야 꼭 그렇게 안 해도 된대’라는 틀을 깨는 선례가 되고 싶다. 정해진 대로 안 해도 할 수 있더라. 그게 생각보다 괜찮다는 것을 알릴 수 있는 실험체가 됐으면 한다. 그룹 짓지 않아도, 무리에 섞이지 않아도 되고, 혼자 해도 가능하다는 본보기가 되고 싶다. 그게 나 자신에게 바라온 점이다. 어디서 비롯된 욕구인지는 모르겠다. 뭐가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항상 그래 왔다. 무리에 완벽하게 섞이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다. 그래서 구석에 홀로 있는 사람들에게 혼자인 게 나쁜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혼자여도 그냥 한번 시도해볼 수 있도록 좋은 선례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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