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김보라
동시대 가장 영민하게 반짝이는 감독. 한 소녀의 눈으로 본 거대한 세계를 그려낸 <벌새>로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59관왕을 달성한 무시무시한 신인. 가장 내밀한 서사에서 웅장한 서사시를 끌어내는 놀라운 재능을 지닌 김보라 감독의 스노우볼처럼 영롱한 아카이브.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여자 작가가 쓰는 여자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릴 적 내가 좋아했던 뒤라스의 자전적 소설 <연인>은 베트남을 배경으로 가난한 프랑스 십대 소녀의 욕망을 그려낸다. 당시의 복잡 다단한 인종적, 계급적 위치 속에서 이 영민한 소녀는 자신의 운명을 헤쳐나간다. 오정희의 <새>와도 비슷한 세계관인데, 아이가 세계를 영묘하게 보는 것에 매혹되는 것 같다.
오정희 <새>
아이의 시선에서 그려낸 <새>는 서늘하고 뜨겁고 입체적인 작품이다. 가난한 아이와 친절한 교사가 등장하는데, 아이는 교사가 자신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친절을 베푼다는 걸 감지한다. 어느 날 이 아이는 밖에서 교사를 만나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누구세요?”라고 묻고 교사는 “왜 그러니?”라고 당황한다. 사실 아이는 교사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 교사가 자신과 동떨어진 세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목격했을 때 거리를 두고 싶은 그 마음이 이해가 갔다. 일상을 들여다보면 여러 균열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잘 들여다보며 살아야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 없는 척 외면하는 게 아니라, 들여다보는 게 사랑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모든 것이 가능하다>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 캐릭터. 미국 시골 마을에 사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복잡다단하게 그려낸다. 모든 인물이 자신의 욕망을 지닌, 입체적인 사람이라 좋다.
강경옥 <별빛 속에>
쏟아지는 별들 속에서 영롱한 슬픔이 느껴지는 작품. 아름답고 슬픈 것을 좋아하는 취향은 여기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초등학생 때 너무나 매혹 당해서 이 세계가 현실인지 허구인지도 모르고 빠져들었다. 당시 우리 세대에서 강경옥 작가는 혁신적인 존재였고, 나는 르네상스, 하이센스, 미르, 나나, 오후, 아이큐 점프까지 몇 백권의 만화책을 모으는 애독자였다. 만화는 주류 매체와는 달리 LGBT 등 소수자와 아웃사이더를 다루는 경우가 많다. 정상성에 대한 강박과는 멀다는 점에서도 좋았다.
M.W.셸리 <프랑켄슈타인>
언제나 사회의 주류가 아닌, 아웃사이더들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아무리 ‘인싸’가 되려 해도, 사람의 마음 속에선 언제나 배제 당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살면서 자기가 괴물 같다고 단 한번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겠나? 그런 원형적인 상징으로서의 괴물을 다룬 이야기가 무척 매력적이었다.
손튼 와일더 <우리읍내>
어릴 때는 고립감과 타자화된 감각에 집중했다면, 나이가 들면서 연결성에 대해 집중하게 됐다. <우리읍내>는 굉장한 연결성에 대한 이야기다. 각 개인이 지닌 외로움이 극과 극으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 지닌 아름다움과 기적, 삶과 죽음이 담겨있다. 이성애중심적 서사가 좀 아쉽긴 하지만, ‘어떻게 한 인간이 두려움의 상태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가는가’를 보여주는 희곡이다. 나만 외로운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러하다면, 우리에겐 사랑이 필요하다. <리코더시험>이나 <벌새>에서도 다룬 이야기다.
에드워드 양 <하나 그리고 둘>
한 가족을 통해서 대만 현대사회를 본다. 미시 서사를 통해 결국엔 거대한 주제를 이야기하는 대단한 연출력의 영화다. 영화감독들은 영화를 통해 가치관을 보여주게 마련인데, 그의 영화 속엔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도 없다. 단지 삶을 따듯하게 바라본다. 비관적이고 염세적으로 보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이다. 그의 시선은 나이브한 따듯함이 아니라, 날카로우면서도 서늘한 따듯함이다.
휴먼스 오브 뉴욕 <Humans of New York>
페이스북 페이지로 시작했는데 유명해져서 책으로도 나왔다. 일종의 센세이션이었다. 그냥 뉴욕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사진으로 찍고 인터뷰를 하는 거다.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소개되는데, 그들 각각의 사연이 다 영화 같다. 스스로 발견을 못 했을 수도, 사람들이 못 알아준 것일 수도 있겠지만 들여다보면 모두에게 영화 같은 일이 조금씩은 일어나고 있는 거다. 나는 보통 사람들의 생애사에, 그러니까 결국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 명상을 통해 자신을 깊게 보면 자신이 어떤 무궁무진한 감정들, 기억들을 지닌 사람인지 알게 되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만의 서사가 있으리란 걸 알게 된다. 나는 수많은 이들과 관계 맺고 영향 받으며 만들어진, 내가 만나온 모든 사람의 총체다. 무엇보다 사람에게 관심이 없으면 영화를 찍을 수 없다. 그런 감독이 영화를 찍는다면 캐릭터가 납작해질 거다.
미도 아파트
<벌새>의 배경 때문에 다들 은마 아파트로 알고 계시는데 난 맞은 편 미도 아파트에 살았다. 해질 무렵 아파트 단지에 있으면 아이들이 뛰어 노는 소리, 배달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피아노 연주소리가 오케스트라처럼 들렸다. 무척 평온한데 세상이 곧 끝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드는 시간이었다. 어떤 권태와 슬픔, 허망함이 노을처럼 밀려드는. 아파트 단지라는 작고 밀집된 인간 사회에 살다 보면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강한지 느껴진다. 그 미시적인 삶들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개미의 행렬
어릴 때 초록이 많은 공간에 가는 걸 좋아했다. 아파트 단지에서도 공원에 가는 게 좋았다. 벤치에 앉아서 개미의 행렬을 몇 시간이고 관찰했던 기억이 난다. 수많은 개미들이 운집해 먹을 것을 나르는 질서를 보고 있노라면 그렇게 재미있었다.
아니쉬 카푸어 ‘Memory’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본 굉장히 거대한 설치작품이다. 처음 봤을 때는 흰 벽에 검은 캔버스가 걸려 있어서 ‘뭐야, 한심한 추상화 하나 걸려 있네’ 했는데 다들 그걸 너무 자세히 들여다보는 거다. 나도 같이 들여다봤더니, 거대한 작품의 극히 일부더라. 검은색 안은 텅 비어있는데, 쓰다 버린 중고 자재, 부품들로 만들어져 오래된 냄새가 난다. 거길 나가 다른 벽으로 가면 이제 전체가 보인다. 굉장히 거대한 땅콩 같은 원형이 놓여있다.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이 그렇잖아. 어떻게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이고 재구성되는 내밀하고도 거대한 것. 그런 것이 좋았다.
명상
고3때 명상 책을 읽었고 스무 살 때 처음 명상 센터에 갔다. 계속 명상 수련 캠프와 워크샵을 다니며 명상을 배웠다. 대학 시절 나는 나름 과 활동도 했고, 술자리도 열심히 나가 잘 지내려 노력했지만, 공허하고 부질없이 느껴졌다. 그런 자리에서 벌어지는 의미 없는 ‘아무 말 대잔치’가 재미가 없더라. 하지만 명상을 하면 즐거웠다. 명상에 들어가면 잡념이 파도처럼 들어왔다 나갔다 하다가 조금씩 잦아들면서, 뭔가에 감싸이는 듯한,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일상에서 지녔던 나의 분노, 화, 옹졸함을 비우고 나 자신과 세계를 응시하게 된다. <벌새> 중 “난 내가 싫어질 때, 그 마음을 들여다 봐. 아, 내가 지금 나를 사랑할 수 없구나”라는 영지의 대사는 명상으로 알게 된 것이다. 미국의 명상 웹사이트에서 유저들이 <벌새>가 굉장히 영적인 영화라는 평을 썼더라. ‘덕업일치’한 사람처럼 기뻤다.
향
마음이 요동칠 때 향을 맡으면 마음이 맑아진다. 집에서는 늘 여러 향을 구비해놓고 향을 피워놓고, 평소에는 ‘오라소마’라는 향을 가지고 다닌다.
사원
무교지만, 교회와 절과 사원에 가는 걸 좋아한다. 어느 도시에 가든 그곳의 신앙을 믿는 사원을 찾는다. 뉴욕에서 공부할 때 리버사이드 교회의 1인 기도실에서 혼자 기도하는 걸 좋아했다. 서울에서는 길상사를 종종 간다. 해외 영화제 때문에 이스탄불에 갔을 땐 성 소피아 성당에 갔고, 우크라이나 갔을 때는 어떤 수도원에 찾아가 종일 있었다. 영적인 공간에서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 연결되기를 열망한다는 것, 그런 순정한 마음이 좋아서다.
김민희
사랑하는 배우님. 대단히 지적이고 섬세하고 서늘한 연기를 하는 배우다.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장면 중 술자리에서 사람들에게 진실하게 살라고 호통치는 장면이 있는데, 화내는 연기를 이렇게 아름답게, 진실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이 배우를 보고 알았다. 그는 힘을 빼고 연기를 한다.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진짜의 모습으로. 언젠가 부디 함께 작업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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