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장기화되고 있다. 재난은 평등하게 닥치지만 비극의 결과는 평등하지 않다. 국가마다 대처하는 방식이 다르고, 개인의 삶에 끼치는 영향도 다른 양상으로 펼쳐진다. 우리가 소위 선진국이라 생각했던 서방 국가에 대한 환상이 무너지고, 어느 때보다 각 국가의 체제와 지향점, 행정력이 선명하게 보이는 이 시기. 이제 이 질병은 해결책은 아직 없으나 통제할 방법은 있는, 한동안 같이 살아야만 하는 아주 까다로운 동거인 같은 것이 됐다. 백신이 개발되기까지 우리는 코로나와 산다. 무시하거나 회피하거나 싸우거나 혹은 춤추거나.
사실 난 프로야구를 즐기지 않지만 조쉬 린드블럼은 안다. 그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5년 동안 활약하고 다시 미국 MLB로 귀환했다. 흥미롭게도 린드블럼은 양국의 코로나19 대처 방식을 비교한다. 한국 정부의 방역 체계가 효과적이라는 의견과 함께 한국 시민의 대처 방법에 대해 평가한다.
“한국 시민의 대처가 뛰어나다. 마스크만 봐도 알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는 이유는 단순히 다른 사람으로부터 감염되기 싫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자신이 감염시키지 않기 위함이다. 그에 반해 미국 시민은 자신이 감염을 피하기 위해 마스크를 쓰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내가 사회나 철학을 분석하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선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건 안다.”
조쉬는 야구만 잘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미국 대통령보다 현 상황의 요점을 잘 파악하는 듯하다. 유럽도 미국만큼이나 사정이 안 좋다. 유럽과 미국은 우리보다 앞선 시간(先)을 사는(生), 그래서 선생(先生) 노릇을 하는 국가들이다. 어떤 문제에 봉착하면 그들의 경험과 대책을 먼저 살핀다. 그 문제를 이미 경험하고 치유(하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적어도 이번 사안에서 그들은 선생이 아니다.
당분간 코로나19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 곧 세상의 종말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래야만 한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요건이 있을 거다. 시민 개개인이 그것을 충족시킬 수는 없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만이 해낼 수 있다. ‘우리’의 수준은 다양하다. 가령 세계 시민의 수준에서 ‘우리’가 있다. 전염병 예방과 확산을 막기 위해 모두 협력하고 연대하는 ‘우리’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러한 이상적 ‘우리’와 별 상관없이 움직인다. 현실적 ‘우리’의 작동 단위는 아무래도 국가다.
코로나 팬데믹에 대처하는 방식에서 국가 차이가 크다. 토마스 푸에요(그는 전염병 학자가 아니라 실리콘 밸리에서 활동하는 저술가이자 사업가지만 블로그에 실린 코로나19 관련한 세 개의 기고문은 무려 8천만에 가까운 조회 수를 기록했으며, 한 기고문은 30개 언어로 번역되었다)의 영리한 정리에 따르면 국가 전략은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아무것도 안 하기.’ 3월 중순까지 미국이 취한 전략이다. 기껏 독감과 비슷한 코로나19 때문에 호들갑 떨 필요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다음 날(3월 15일) 백악관 대책회의에서 말했다. “코로나19가 그냥 미국을 지나가게 내버려두면 안 되는 거냐.”
둘째, ‘완화 전략.’ 위험성은 알지만 뚜렷한 해결 방안이 없는 상태이므로 고위험군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를 취하면서 전염병 유행을 조절하자. 집단 면역, 그러니까 전체 인구의 60%가 면역이 되는 시기까지 전염병 확산을 조절(사망자 조절?)하는 집단 면역 전략은 영국과 네덜란드와 스웨덴에서 실행했다.
셋째, ‘억제 전략’. 푸에요가 ‘망치’라 부른 이 전략은 우리에게 익숙하므로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지만, 간략히 3T로 요약하자. 대량 검사(Test)로 감염자를 빨리 확인하고, 그들을 격리하고 동선을 추적(Trace)해 전파 가능성을 낮추고, 감염자를 적절히 치료(Treatment)하는 전략이다.
앞의 두 전략을 취했던 국가들은 결국 뒤늦게 망치를 꺼내 들었다. 그들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수준의 고강도 조치(회합과 이동 금지)를 취했지만 이미 확산이 선을 넘었기에 엄청난 비용을 치르는 중이다. 치료제와 백신이 개발되기 전까지 우리 모두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춤을 춰야’만 한다.
조쉬 린드블럼의 말처럼 한국인은 적절한 방역 대책과 현명한 시민 참여로 위기를 잘 헤쳐나가고 있다. 하지만 당분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위협적인 바이러스와 함께 춤을 춰야만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고 두렵고 답답하다. 팬데믹 대처에서 국가마다 다르듯이 사람들의 대응 방식도 다르다. 독일의 재난 사회학자 오르트빈 렌에 따르면, 위험한 전염병을 마주한 사람들은 세 가지 반응을 보인다. 그것을 ‘무시’하고 그냥 예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트럼프 대통령처럼 사는 거다. ‘회피’ 유형도 있다. 감염될까 너무 무섭다. 웬만하면 집 밖으로 나가지 않으며, 나간다면 방재복 착용이 필수다. 국가 수준에서 말하면, 북한의 전략이랄까.
마지막으로 ‘투사’가 있다. 그들은 문제 사안을 정면에서 마주한다. 언뜻 가장 적절한 처방으로 보인다. 방역과 같은 사회 문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전쟁의 은유로 표현하는 데 익숙한(‘범죄와의 전쟁’ ‘바이러스와의 전쟁’ ‘이번 경기는 국가의 명예가 걸린 전쟁’)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사안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와 도대체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그래, 바이러스를 옮기는 ‘나쁜 놈’들이 있구나.
투사들은 주변의 경쟁자와도 다툰다. 남들이 화장지를 사기 전에 내가 먼저 사야지. 바이러스를 옮기는 나쁜 외부인(서양에선 중국인이나 아시아인)을 공격하고 배척한다. 다행히 한국에는 투사가 상대적으로 적지만, 유럽, 미국, 일본에는 많다. 특히 일본에서는 ‘코로나 이지매’가 증가한다고 한다. 유치원이 방역 종사자 자녀의 등교를 막거나, 감염자가 나온 학교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봉변을 당한다. ‘싸우는 대상은 사람이 아닌 코로나19’라는 전문가의 조언은 무시당한다. 하긴 동일본 대지진 이재민 역시 같은 대접 (‘방사능 이지매’)을 받았다고 하니 일본엔 정말 투사가 많다. 흥미로운 건 일본 정부의 태도다. 정부는 여전히 미적대지만(4월 15일 현재), 투사 시민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요컨대 코로나19와 관련해서 국가는 망치를 들어야 하고(무턱대고 그러면 절대 안 된다), 시민은 사려 깊은 조심성으로 그것과 춤출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를 추천한다. <쉘 위 댄스>(수오 마사유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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