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명주
일러스트레이터
곽명주는 자연을 닮은 색을 사용한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순간을 눈으로, 마음으로 담고 기록한다. 특별하진 않지만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고 곁에 머무는 편안함. 그녀의 그림은 따스한 볕 아래 고양이와 낮잠을 자는 단란한 집 안 풍경이 떠오른다.
며칠째 작업실도 나가지 않고 집에만 머문다. 만나는 사람도 없고 물 마시다 사레에 걸려 기침만 해도 코로나일까 이마에 손을 얹고 걱정한다. 평소에 잘 보지 않는 TV를 온종일 틀어놓고 집 안을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와 두려움으로 가득 채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진 나와 달리 창밖에는 벚꽃 망울이 터지기 시작했고 바람은 부드럽고 따뜻해졌다. 봄이 활발하게 찾아온 거다. 돌이켜보면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기 전에도 집에 있는 걸 좋아해 작업실이 가까워도 집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우리 집은 남서향 방면이라 오후 내내 햇살이 잘 들어 따스하다. 그 따스함을 따라다니며 낮잠을 즐기는 고양이도 있고. 그 모습을 바라만 봐도 마음이 고요해지고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식탁에 앉아 이런저런 그림을 그리다 보면 절로 행복해졌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나니 이렇게 안전한 집에 있어도 종일 걱정을 멈출 수가 없다.
친구와 통화를 하던 중 오랫동안 사두고 먹지 않은 사과가 보였다. ‘사과조림을 만들어야겠어!’ 품과 시간이 많이 들어 미뤄뒀던 일이 지금의 힘듦을 잠시나마 잊게 해줄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사과 상처를 도려냈다. 약 20개의 사과를 깎고 작은 크기로 깍둑썰기를 했다. 사과와 같은 양의 물을 냄비에 넣고 시나몬과 레몬즙, 설탕과 꿀을 첨가해 끓였다. 달콤한 사과와 향기로운 시나몬 향이 집 안을 가득 채워나갔다. 약 1시간을 저어가며 조리니 반짝이는 갈색 사과조림이 완성됐다. 구운 빵에 사과조림을 올려 먹으니 너무 즐거운 맛!
소독한 유리병에 담아 동네 친구들에게 한 병씩 나눠주었다. 그렇게 주말마다 나는 사과조림을 만든다. 그랬더니 친구들이 자꾸 사과를 사준다. 힘든 시기지만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의 작고 소소한 행복마저 가져가지 않게 기운을 내야 한다. 창문을 활짝 열고 봄바람으로 집 안을 환기했다. 그러자 사과 향이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127(일이칠)
일러스트레이터
127이란 이름에서 보이듯 자신의 생일 1월 27일을 예명으로 사용한다. 평범한 일상을 영감으로 그리는 그녀의 성격을 은유하는 대목. 도톰한 아우트라인과 선명한 색감, 인물의 눈을 블랙박스로 가리는 독특한 스타일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다.
혼자 일을 하면 자유로움과 외로움이 공존한다. 집에서 눈치 볼 필요 없이 하고 싶은 시간을 스스로 정하고 밖에서 활동할 때보다 편한 차림으로 일할 수 있다. 하지만 일의 모든 진행 과정을 혼자 고민하고 해결하며 주변 사람의 부재로 하루 종일 말을 하지 않을 때도 있다. 요즘처럼 밖에서 활동하기 힘들 땐 외로움이 부쩍 커지는데, 자연스레 집에서 위로가 될 만한 소소한 것들을 찾곤 한다. 세 살 된 동거견 머꾸가 있다. 먹구름을 닮았다. 가족 중 나를 제일 잘 따르는 머꾸는 내가 작업을 하고 있으면 어디선가 달려와 항상 무릎에 앉혀달라고 애교를 피운다. 오래 안고 있으면 다리가 저려오지만 머꾸가 주는 물리적, 심적 따뜻함 때문에 힘이 난다. 몇 년 전, 친한 친구가 사준 잠옷 세트가 있는데 내 취향에 딱 맞는 체크무늬에 촉감이 보들보들해 제법 손이 많이 간다. 보통 작업할 때 바지만 입는데 마음이 포근해진다. 이런 소소한 포근함이 나를 위로해준다는 것에 감사한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꿈속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 물건을 가지고 있다. ‘토템’이라고 불리는 이 물건은 주인만이 만지고 본다. 조금 다른 의미이지만 나에게도 토템이 있다. 리어나르도 디캐프리오가 자신의 토템인 팽이를 돌리는 것처럼, 나 또한 작업이 잘 풀리지 않을 때와 멘털 관리가 필요할 때 모빌의 움직임을 보며 마음을 다스린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빌을 보면 마음의 평화와 작은 위로가 찾아온다. 무언가 잘되지 않을 때 작은 것에서 위로를 받고 다시금 힘을 내는 것. 나에게는 아주 큰 의미인 ‘위로’를 주는 것들에 오늘도 감사함을 느낀다.
유재형
공간디자이너
유재형은 공간 디자이너다. 낮에는 공간 디자인을 공부하고 밤에는 그림을 그린다. 밴드 ‘프롬올투휴먼’ 과 함께 음악과 그림 작업하는 게 취미다. 주로 아름답고 밝은 모습보다 소외되고 불완전함을 찾는다. 겹겹이 쌓인 일상 속 피로를 그림에 쏟아낸다.
영국에서 직면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꽤 잔인했다. 모든 수업은 정지되었고 거리에서는 인종차별을 심심찮게 직면해야만 했다. 마트에서는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전쟁을 벌여야 했다. 다니던 학교는 결국 폐쇄되었고 작은 자취방 안에 갇혀버렸다. 무인도에 갇힌 듯 고립되었고 밖은 냉혹하고 위험천만한 바다가 되어버렸다. 모든 소통은 작은 사각형 화면 속에서 이루어졌고 그 속에는 또 다른 작은 섬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각자의 섬에서 조난을 기다리는 절박한 사람처럼 이 상황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고 분노했으며 위로했다. 하지만 계속된 고립에 점차 적응하기 시작했고 작은 화면 속 친구들의 방을 구경하는 여유도 생겼다. 오히려 비대면으로 이루어지는 수업에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문득 무서워졌다. 비대면의 편리함에 중독되어 섬에서 영영 못 나오는 건 아닐까. SF 영화에서만 보던 효율성이 극대화된 기계가 감정을 포함한 모든 인간적 교류를 대체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불편하고 평범한 일상이 그리워졌다. 역사 속에서 많은 가치가 편리함 앞에 무너져 내렸던 예시들이 스쳐갔다. 이런 우울한 망상을 하는 와중에 역설적이게도 중국의 대기오염은 급감했고, 멸종위기종인 바다거북이 인적이 끊긴 브라질의 한 해변에서 1백 마리 가까이 태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이러니를 느끼는 요즘이다.
김보선
일러스트레이터
글쓰기를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다. 그림을 구상하는 방식이 남다른데 자신이 만든 세계를 그림에 곁들인다. 그 세계는 SF 영화보다도 초현실적이고 미래적이다. 그녀의 작은 펜 하나엔 몽환적이고 기묘한 세계가 들어 있다. 차분한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희망을 발견한 채.
안녕을 안녕해요. 이 말이 절실하다. 안녕 하나에 반갑다는 마음, 안녕 둘에 무사하라는 마음을 담았다. 무심코 던지는 인사말이지만, 최근 벌어지고 있는 사회 현상으로 인해 단어 속에 마음을 담아 건네게 된다. 오랜만에 온라인으로 영화 모임을 열었다. 후줄근한 잠옷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정겨웠다. 서로 건강을 묻고 근황을 나눴다. 누구 할 것 없이 나긋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진회색 커튼이 걸린 방, 고양이가 침대 위에서 나뒹구는 풍경, 달고나 커피 만드느라 달그락거리는 부엌, 작업 도구가 가지런히 놓인 책상. 작은 화면 속 모습들에선 각자 개성이 뚜렷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 탓에 온라인으로 만나는 일이 잦아졌는데, 나름대로 낭만이 있는 듯하다. 방구석에 앉아 친구의 방을 탐방할 수 있었고 자주 볼 수 없으니 사이가 더 애틋해졌다고 할까. 마스크 쓰는 일도 어색했지만 이제 마스크는 필수품이 되었다. 달라진 삶에 익숙해지고 있지만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던 때가 그립다. 잔디밭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하늘을 감상하고, 객석이 꽉 찬 공연을 관람하고, 캐리어에 짐을 꾸려 저 멀리 떠나고 싶다. 온라인 영화 모임 회원들과 회포를 풀다 보니 금세 밤이 깊었다. 언제 다시 평범한 일상이 돌아올까.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날이 다시 오길 기원하며 인사를 나눴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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