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에 대한 첫인상은 <파수꾼>의 기태였다. 위악적으로 군림하지만 실은 누구보다 유약하고 위태로운 소년. 감정 변화에 따라 시시때때로 온도를 바꾸는 표정과 목소리, 이제훈은 그 자신이 곧 기태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후로도 그는 곧잘 옷을 바꿔 입었다. 그림자를 드리운 인물을 연기할 때 그는 줄이 팽팽한 현악기의 가장 높은 음과 낮은 음을 신경증적으로 오가는 활 같았고, 독기를 뺄 땐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보편의 얼굴이 되기도 했다. <파수꾼>의 감독과 다시 뭉친 <사냥의 시간> 개봉을 앞둔 밤, 맨 얼굴의 이제훈을 마주했다. 아직 쌀쌀한 밤거리를 걸었다. 그는 곧잘 웃었고, 문어체를 썼고, 자신은 재미없는 사람이라며 종일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배우 이제훈이 그냥 자신이라는 말, 캐릭터와 자신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말, 취미도 특기도 영화라는 말에 왜 그가 그토록 여러 얼굴을 보여줄 수 있었는지 알았다.
이제훈의 얼굴이 어딘가 묘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아래 속눈썹이 진하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말콤처럼.
그런가? 생각해보니 그런 말 가끔 들어봤다. 좋은 건가?
좋다고 생각한다. 장훈 감독과 조성희 감독은 배우 이제훈에 대해 “선과 악, 강함과 약함이 공존하는 얼굴”이라고 말했다. 자기 얼굴 좋아하나?
어쩔 땐 좋고 어쩔 땐 너무 못나 보인다. 하하하. 감독들이 내 어떤 면을 잘 포착해서 써준 덕이라 생각한다. 이제훈 안에는 착한 것도, 나쁜 것도 있고,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난 감독들에 의해 만들어지길 바라는 사람이다. 감독들이 날 흰 도화지라고 생각하고 마구 칠하고, 확 구겨보기도 하면서 거리낌 없이 시도해줬으면 한다.
이제훈을 충무로에 알린 <파수꾼>의 윤성현 감독이 찍은 <사냥의 시간>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옛날 생각 안 나나?
맞다. 둘 다 겨울에 찍었다. 엄청 추웠는데 안 추운 척하면서 열심히 찍었지. 하하. 윤성현 감독과는 친구처럼 지내는데, 그때를 추억하며 돌아보는 시간이 됐다.
많은 이가 <파수꾼> ‘기태’로 이제훈을 처음 인식했다. 위악으로 무장했지만 실은 유약한 소년. 그 연기가 너무 진짜 같아 당신이 ‘기태’ 같은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난 연기할 때 인물을 가상이 아닌 정말로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받아들이는데, 특히 기태는 더 그랬다. 관계 속에서 폐부에 깊숙이 들어가 지워지지 않는 감정이 있지 않나. 나도 남자 중학교를 나왔고, 관계 속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때를 상기하며 기태에 빠져들었다.
캐릭터를 실제 인물로 받아들인다는 건 어떤 일인가?
영화는 약 2시간 동안 인간의 한 시점을 그린다. 배우는 이 사람이 어떤 유년을 보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상상해 빈 곳을 채워나간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 서면, 가장 살아 있는 것 같지. 그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으로 카메라 앞에 설 순간만을 기다려왔으니. 누군가 내가 연기한 인물을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꼈다고 할 때 제일 희열을 느낀다. 내 연기의 출발은 리얼리즘이고, 그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고 선호하는 방식이다.
윤성현 감독은 처음부터 <사냥의 시간> ‘준석’에 대해 이제훈을 염두에 두고 썼다고 했다.
워낙 가깝게 지내고 자주 보니까, 준석에게 나를 대입해서 쓴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다 보니 준석에 대한 탐구를 깊게 하기보다, 나란 사람 자체를 더 많이 투영했다. 극한 상황에 있을 때 난 어떤 표현과 반응을 하게 될까 집중하며 찍은 영화다. 내가 놓인 상황을 체험하고, 그 감정을 감독에게 고스란히 전달해준다는 목표로 영화에 접근했다.
윤 감독과는 어떤 면에서 죽이 잘 맞나?
작품을 보는 시각이 비슷하다. 영화에 있어 좋고 싫은 기준이 분명하고, 그 외의 것엔 그다지 신경 안 쓰는 것도 닮았다.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다. 이번 영화의 캐릭터들이 스트리트 패션을 입는다. 원래 난 전혀 스트리트 패션을 입지 않았는데, 이 작품을 준비하며 3년간 스트리트 패션을 찾아 입었다. 감독에게 국내에 없는 브랜드도 추천받고, 그가 입은 걸 보면서 따라 사고. 그래서 이젠 익숙해진 게 재미있더라. 영화를 통해 취향을 공유하고 다른 세계를 알게 된다는 것이.
이제훈은 캐릭터와 자기 자신의 경계를 흐리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난 오히려 인물 자체로 사는 걸 즐긴다. 작품 속에서 내가 잘 살아온 것에 자긍심이 있다. 캐릭터로서 100%에 다가가기 위해 얼마큼 노력할 수 있느냐 물었을 때, 결국 답은 그처럼 살아보는 것이다. 난 연기할 때 온·오프되는 스위치처럼 캐릭터를 입고 벗는 게 오히려 더 어렵더라.
<사냥의 시간>은 한국 영화의 차세대라고 할 수 있는 감독, 배우들이 뭉쳐서 찍은 영화다. 순제작비 90억대 영화치고 드물게, 익숙한 중년 남성 배역이 나오지 않는 영화더라. 동세대끼리 영화를 찍어본 경험은 어땠나?
언제나 그런 영화를 만나길 꿈꿨다. <파수꾼>에서 동년배끼리 연기하는 게 자연스럽단 생각이 들었거든. <파수꾼>의 경험이 소중했기에, 윤 감독이 젊은 친구들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기대가 컸다.
23년 전 <넘버3>를 찍은 배우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 나이대의 배우들이 뭉친 셈이다. <사냥의 시간>에도 젊은 배우들의 야심이 있었겠지?
그렇다. 2030 배우들이 영화를 끌어가는 작품이 의외로 많지 않다. 젊은 혈기 넘치는 배우들이 뭉쳐서 끌고 가는 영화도 다양성 면에서 필요하지 않겠나? 최근 제작과 연출 스태프들이 굉장히 젊어진 걸 느낀다. 이제 내가 나이 많은 축에 속할 정도로. 하하. 앞으로도 이렇게 동세대의 젊은 영화인들이 뭉쳐서 만드는 작품이 계속 나왔으면 좋겠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자란 시네 키드지?
1980~9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 열광한 시네 키드 세대지. 하지만 마틴 스코세이지 같은 할리우드 감독부터 켄 로치, 다르덴 형제처럼 리얼리즘에 충실한 영화까지, 많은 영화를 보며 저 영화 속 인물이 되고 싶다는 선망에 빠지곤 했다.
요즘엔 뭘 보나?
극장에서 보는 게 제일 좋지만, 스트리밍 서비스도 다 구독한다. 넷플릭스, 왓챠, 아마존 프라임까지. 영화를 많이 봐서 극장에서 더 볼 게 없을 때도 있거든. 하하. 오늘은 집에 가면 뭐 볼까, 생각하는 게 낙이다.
영화를 너무 사랑해서 인터뷰하면 영화 이야기밖에 하지 않는다더니, 정말 그렇다.
하하하. 그게 그냥 이제훈 자체라 그렇다. 왜냐하면 나란 사람이 특별한 게 없거든. 취미가 뭐냐, 특기가 있냐, 아무것도 없다. 주변에서 낚시, 웨이크보드, 골프 같은 걸 많이 하는데 난 골프채 한번 잡아본 적 없다. 영화 보고 영화 이야기하는 시간이 좋아서 다른 걸 할 생각이 안 든다.
취미는 영화, 특기도 영화. 왜 그렇게 영화가 좋나?
연기를 하면서 힘에 부칠 때가 있다. 그 순간을 극복하는 건 역시 좋은 작품을 봤을 때거든. 매년, 매 순간 좋은 작품이 나온다. 오랜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아직도 새로운 이야기들이 나온다는 게 놀랍지 않나? 그게 날 매혹시킨다.
가끔씩 로또 산다면서? 의외다.
으하하하. 같은 번호를 계속 사면 언젠가 되지 않을까?
당첨금으로 집에 영화관 만들려고?
정답이다. 하하하. 궁극적으로 지역 시네마테크를 만들고 싶다. 지역 독립 영화관들이 없어지니 속상하다. 나처럼 작은 영화관에서 보길 좋아하는 사람에겐 아쉬운 일이다.
이제훈은 언제 화가 나나?
연기가 성에 안 찰 때. 분명 집중해서 연기했는데, ‘컷’한 순간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다시 찍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울 때 열이 받는다. 엄청 자책한다. 군대 가기 전후 그 예민함이 극에 달했다면, 이젠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누군가 도와줘야 할 수 있음을 알았다.
사람들과 같이 하는 일에 의미를 많이 두나?
연기하고 싶다고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찍어줄 사람, 목소리를 담아줄 사람, 디렉션을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함께 잘하는 게 좋은 작품을 만드는 길이다. 내가 가진 것도 혼자 이룬 게 아니라 날 애정하는 분들이 내게 준 것이다.
그런 시각이 작품 선택에도 영향을 주나? <아이 캔 스피크>에선 나옥분을 서포트한다. 자신의 캐릭터를 멋지기보단 정형화된 역할로 만들어야 한다고 의견을 내기도 했다.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자기 캐릭터에만 있는 배우가 아니구나 싶었다.
좋은 작품이라면 내가 어떻게 나와도 상관없다. 앙상블 연기는 내가 제일 중시하는 덕목이다. 영화가 빛날 수 있다면, 난 그늘에 가려도 상관없다. 작품이 빛나는 순간이 다른 배우에게 있다면, 스포트라이트를 주는 게 맞는 거다.
이제훈은 좋은 작품이 없는지, 좋은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없는지 먼저 찾는 배우라고 하던데.
‘나는 이 정도 사람이니까 누군가가 날 찾아줄 거야’라는 건 구시대적 사고방식이다. 내 삶은 스스로 개척해야지.
지금은 이제훈의 영화 인생에서 어떤 시점인가?
지금 내 나이가 몇이지? 멀었다. 하하. 평생 하고 싶거든. 40년은 더 하고 싶은 입장에서 지금은 영화 인생 초반이다.
시작은 늦었지만 그 끝은 창대하리라. 그런 생각이 드네.
스물두 살 때 모놀로그를 셀프 촬영해보고 너무 못해서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 다 군대 다녀와서 학교 다니고 취직할 때, 난 연기하겠다고 빌빌대는 것처럼 보였겠지. 허튼 꿈을 꾸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나아갈 수밖에 없던 건 영화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여행 방송 <트래블러>에서 “숫자 2는 1로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숫자라 좋아한다”고 했다. 이제훈에게 과정이란 뭔가?
한 작품이 큰 성공을 거둬도 배우는 거기서 끝이 아니다. 아티스트에 대한 평가는 갱신되는 것이니까. 끊임없이 자신을 입증하고, 지금 작품으로 자신을 말해야 한다. 잘돼도, 잘되지 못했더라도 나아가야 하는 일이다. 지치지 않고 2에서 1로 가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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