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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살인의 추억> 조용구 형사
직장 동료이며 상사이자 친한 형인 박두만의 소개에 따르면, 그는 어릴 적에 어렵게 자란, 사실 착한 사람이고 알고 보면 정도 많은 남자다. 근데 워낙 성격이 급하다 보니까 가끔씩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곤 하는데 그게 뭐 크게 흠이 될 순 없고…, 소개가 채 끝나기 전에 우리의 조용구가 나타나 당신의 가슴팍을 발로 차 넘어뜨린다. 그는 당신의 얼굴만 봐도 화가 치솟는, 심문(이라고 적고 고문이라고 읽는다) 전문 폭력 형사지만, 피부는 까지지 말라며 군홧발에 예쁜 무늬의 토시랄까 버선을 덧신어준다. 그렇게 발로 밟다가도 식사 시간에는 기꺼이 자장면 한 그릇에 젓가락을 꽂아 당신과 함께 나누며, 당신이 범인만 아니라면 미안한 마음에 울었다고 소주 한 잔을 따라줄 남자다. 고등학교만 4년을 다닌 그는 4년제 대학 신입생들이 MT에 가면 다 같이 한 방에 자면서 이른바 ‘Orgy’를 한다고 믿는, 아마도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내내 때리고 맞으며 살아왔을 혐오스런 한국 남자인데. 그가 파상풍에 걸려 무릎 밑을 잘라야 했을 때 왜 덜컥 나의 마음이 짠했을까? 때리고 맞은 ‘맷정’이야말로 최대치에 도달한 ‘한국의 정(情)’이라서 그랬을까?
봉준호 감독의 영화 속에서 김뢰하 배우가 맡은 역할들은 우리가 이미 가정, 학교, 직장, 사회에서 만나 저마다의 모델과 사례를 알고 있는 전형적인 한국 사내의 얼굴이자 총체다. 그는 길에서 잘린 손가락을 주워 가지고 놀다 개에게 던져주는 평범한 회사원(<백색인>), 남의 강아지를 잡아먹으려던 더러운 부랑자(<플란다스의 개>), 완전 무장한 방역복을 입고 분향소에 나타나 유가족을 줄 세우는 피로한 공무원(<괴물>), 그리고 만취해 온갖 추태를 다 부리면서도 “마! 니 내가 누군지 아나?”를 외친 뻔뻔한 검사(<지리멸렬>)였다. 특히 이 ‘변’씨 성의 검사님을 조심하기 바란다. <지리멸렬>은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강렬한 민폐를 보여준다. 하얀 전기밥솥을 열 때 절대로 이 영화를 떠올리지 마시라. 그래서 결국, 봉준호 영화 속 정든 부조리의 세계를 확립한 캐릭터는 김뢰하라는 얼굴을 한 한국이었다. 나는 그의 영화 속 가장 강력한 이 캐릭터를 ‘극혐’하면서도 ‘최애’한다. WORDS 박수민(영화감독, 작가) -
2 <설국열차> 메이슨
봉준호의 <설국열차>는 앞과 뒤에 대한 영화다. 열차의 앞뒤이자 멸종의 앞뒤, 시스템의 앞뒤, 사람의 앞뒤를 다룬다. 이 영화 캐릭터들은 대부분 앞, 즉 과거가 가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틸다 스윈턴이 맡은 메이슨 총리는 과거를 설명할 수 있는 정황이나 설명이 전무하다. 메이슨은 이 기차의 최고관리자다. 기차의 최고관리자라면 호칭이 ‘차장’이나 환대 산업인 설국열차 특성상 ‘총지배인’ 정도면 될 텐데 왜 굳이 ‘총리’라는 직함을 붙였을까. 정치와 자본주의가 결합된 구조의 투영이다.
어쨌든 그녀가 처음 등장하는 형벌 집행과 장황한 연설 신은 영화 몰입도를 상당히 높여준다. 자아도취 상태에서 남자의 구두 한 짝을 머리 위에 올려놓을 때는 고흐의 신발과 낡은 구두에서 노동의 흔적을 찾은 하이데거의 파시즘적 해석이 겹친다. 하지만 메이슨은 그 연설에서 말한다. “이것은 280mm 자리 무질서다. 기차에 탈 때부터 각자의 자리는 탑승권에 명시되었다. 일등석, 일반석, 너희같이 무임승차한 쓰레기들!” 이거 진짜 상징적인 말이다. 그녀에게 그 구두는 광부나 농부의 신발이 아니라 비용을 지불하지 않은 자, 노동하지 않는 자의 구두였다. 그 대사를 보면서 메이슨이 기차에 올라타기 전 중·고등학교에서 철학이나 역사를 가르친 선생이라 확신했다. 아니면 그녀 또한 무임승차한, 대신 운 좋게 엔진룸에 올라탄 이 중 한 명이었을 거다. 그런 그녀에게 기차는 자신을 구원해준 존재이자, 가짜 권력을 쥐어준 절대적인 존재다. 기차의 시스템을 맹신하는 광기의 관리자이자, 광대 같은 앞잡이가 나온 배경이다. 자신의 연설 후 만족한 듯 할머니처럼 입가를 씰룩이는 모습이나 단백질 블록을 먹는 과장된 행동과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는 자신의 행동과 그에 대한 만족에서 비롯되었을 거고. 자신의 역할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선을 넘었지만 죽음 앞에서 벌벌 떠는 모습은 측은하다. 그리고 마지막 대사는 안타깝고 씁쓸하다.
“내가 시킨 게 아니라고! 이봐 친구, 우린 서로 잘 알잖아. 믿어줘. 정말 난 아니야!” 아, 그리고 이게 진짜 상징적이다. 2014년보다 2020년에 더 어울리는 결말이기 때문이다. WORDS 안상호(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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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생충> 문광
인터폰 벨이 울리는 순간 <기생충>은 다른 영화가 된다. 비에 홀딱 젖은 채, 화면 가득 부은 얼굴을 들이댄 문광이 긁히는 목소리로 열어달라 애원하는 순간 말이다. 모든 고용인을 밀어내고 차지한 자리에, 주인보다 오래 살았던 가정부가 귀환했다. “같이 내려가보시겠어요?” 지하에서 지하로 이어지는 문이 열리고, <기생충>은 다른 세계로 이행한다.
문광은 봉준호의 세계에서 가장 현란한 키 플레이어다. 도식화된 세계를 교란하고 확장하며, 기이한 활기로 단숨에 장르를 바꿔놓는다. 다양한 인물 군상이 난투극에 가까운 앙상블을 이루는 봉준호의 세계에서 그의 역할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봉준호는 늘 약자 사이의 ‘밀어내기’에 이중 트릭을 둔다. <플란다스의 개> 아파트 지하실에서는 경비원과 노숙자가 등장해 ‘누가 그 개를 먹었는가’ 오인하게 하고, <마더>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아정과 도준이 서로를 ‘창녀’와 ‘바보’로 호명해 비극을 맞는다. 주목해야 할 건 여기서 밀려난 문광이 노숙자나 아정처럼 소리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다. 역할을 마치고 퇴장한 듯 보였던 문광은 부활해 지하실을 열어젖히고, “언니”와 “개썅년”을 오가며 호형호제를 논한다. 이 순간만큼은 오로지 문광과 배우 이정은의 시간. 그 화려한 개인기에는 시선을 뺏길 수밖에 없다.
문광을 더 흥미롭게 만드는 건 그들 부부가 변절한 386세대 운동권 지식인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문광은 북한 아나운서를 모사하는 ‘종북 개그’를 선보이고, 근세의 서재엔 김대중, 링컨, 만델라의 사진이 붙어 있다. 문광은 남궁현자의 집을 소개하며 “지금이야 뭐, 보다시피 애들이 사는 집이지”라며 은근한 경멸을 비치고, 기택 가족이 남궁 선생의 예술혼이 깃든 거실에서 술판을 벌인 걸 보고 까무러친다. 아무도 없는 날이면, 문광과 근세는 빛이 드는 거실에서 이탈리아 가곡을 틀어놓고 춤추기를 즐겼으므로. 문광은 그 집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 그 집을 가장 잘 알지만 결코 그의 것이 될 수 없다. 그 슬프고 차가운 역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GUEST EDITOR 이예지 -
4 <플란다스의 개> 변 경비
<플란다스의 개>에서 변희봉 선생이 맡은 역할은 ‘변 경비’다. 크레디트에 이름이 없으니 그냥 변 경비라 부르겠다. 20년 전 영화면, 영화를 보았다 하더라도 역할이나 배우가 가물가물한 게 정상이다. 그런데 봉준호 영화의 인물은 시간이 흘러도 곧잘 기억나곤 한다. 이야기랑 딱 어울려서 그런 건지 인물이 생생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변 경비는 조연이다. 봉준호가 잠실의 한 아파트에 살 적에 보았던 경비들의 모습에서 따왔다고 한다.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아파트 지하 창고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요기도 하는 그들을, 소년 봉준호는 눈여겨보았던 모양이다.
주인공 윤주(이성재 분)가 접하는 남자들 사이에는 위계가 존재한다. 교수 임용을 좌지우지하는 교수가 먹이사슬 최상위에 있고, 위계상 맨 아래에 놓인 인물이 변 경비다. 윤주가 유일하게 눈치 안 보고 만만하게 대하는 인물인 셈이다. 윤주의 주변 남자들처럼 그도 그리 건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선과 악의 경계로 쉽게 구분할 수 있는 인물 또한 아니다. 지하실에서 삼계탕을 끓여 먹으며 신났던 그는 어느 날 보신탕을 시도했다 도둑맞는다. 그는 살짝 놀라고 마는데, 나는 그게 뭐라도 되는 양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음식을 훔쳐 먹은 사람은 그보다 더 아래 위치한 노숙자(김뢰하 분)다. 그마저도 나중에 다른 누명을 쓰고 경찰에 끌려가는 억울한 일을 당한다. 변 경비는 봉준호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말 잘 듣는 하위 계급의 일원이다. 그의 가련한 리그는 〈살인의 추억〉의 광호(박노식 분)와 병순(류태호 분), <마더> 의 종팔(김홍집 분) 등을 멤버로 지닌다. 봉준호는 짓궂게도 그들에게 별로 동정심을 발휘하지 않아 내 마음을 간혹 쓰라리게 한다. 그러나 그들을 딱히 희화화하려고 그러는 거 같지는 않다. 봉준호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아는 감독이다. 가련한 리그 사람들의 풍경에는 사회의 시선이 반영되어 있다. 그것을 그는 그렇게 가감 없이 보여줄 따름이다. WORDS 이용철(영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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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플란다스의 개> 현남
아파트 경비실 직원 현남은 오늘도 지하철을 타고 출근한다. 강아지를 잃어버린 초등학교 1학년생이 강아지 찾는 전단지를 만들어 경비실에 찾아오자, 현남은 전단지를 맡기고 학교에 가라고 아이를 설득한다. <플란다스의 개>는 봉준호표 코미디의 첫 단추다. 시간강사 윤주(이성재 분)는 개와 애틋한 사연은커녕 아파트 단지를 울리는 개 짖는 소리를 듣고는 개를 잡아 죽이려는 인물이다. 현남은 본 적도 없는 개를 오로지 정의감으로 찾기 시작하는데, 어딘가 허술하다. 현남은 새벽에 걸려온 장난전화에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속는가 하면, 친구와 함께 TV 에서 여성 은행원이 은행강도에 맞서 위험을 무릅쓰고 싸운 사건을 보며 멋지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어느 날 현남은 빨간 옷을 입은 남자가 옥상에서 개를 집어던지는 광경을 목격하고 쫓기 시작한다. 현남에게 주어진 일은 정의 구현과 아무 관계가 없다. 현남은 경비실 내 권력 서열의 가장 낮은 위치에 있다. 아무도 현남의 액션을 기대하지 않는다.
깡총하게 머리를 묶은 현남을 연기하는 배우는 배두나인데, 현남은 상상 속에서만 가장 흥미진진한 영웅의 삶을 살 수 있고, 그런 현남에게는 지독하게 현실적인 친구가 있다. 현남은 목적한 일(개 연속 살해 사건)을 해결하지만, 자꾸 돌아다닌다는 이유로 관리사무소에서 해고당한다. <플란다스의 개> 는 봉준호의 필모그래피 중 유난히 여성 캐릭터의 존재감이 강한 영화다. 현남, 윤주의 배우자, 현남의 친구, 짖는 개의 보호자 모두 존재감이 선명하다. 그럼에도 이들 모두는 윤주의 성취(대학교수) 에 드라마를 불어넣는 역할에 그친다.
그렇다면 마지막 장면이 현남의 얼굴 클로즈업에서 시작하는 뒷모습으로 끝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플란다스의 개>에서, 어쩌면 현남은 무의미의 의미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고, 그래서 현남을 20년이 지난 지금도 좋아한다. 사랑과 성취가 아닌 우정과 호기심을 채워 넣은 표정을 가진 현남은 윤주와 대척점에 있다. 멋지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현남은 자기가 일하던 아파트의 입주민이 되지는 못했을 것 같다. WORDS 이다혜(<씨네21> 기자, 작가) -
6 <마더> 도준 엄마
봉 감독의 영화를 하나의 동사로 묘사한다면, ‘달리다’로 압축될 것이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현남은 아파트를 종횡무진 누비고,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들은 범인을 쫓고, <괴물>에서 불쑥 튀어나온 괴물은 한강 둔치를 달리다가 미끄러졌다. <마더>의 도준 엄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버선발로 달리다’ 는 표현은 순전히 그녀를 위한 것이다. 도준(원빈 분)의 일이라면 뛰고 또 뛰었다. 급기야 그녀는 살인자로 몰린 아들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많은 이들이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는 <마더>의 오프닝에서 도준 엄마는 무심하게, 아니 도저히 속내를 알 수 없는 춤을 춘다. 이 장면이 놀라운 것은 그냥 막춤이라서가 아니다. 바로 이 춤을 추는 주체가 김혜자라는 사실에 있다.
김혜자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연기자다. 오랜 세월 <전원일기>에서 김 회장의 아내이자 만인의 엄마였다. 그녀는 곧 모성애를 의미하며, 이 모성애는 헌신과 희생을 상징한다. 이런 김혜자가 정신줄을 놓고 몸을 흔드는 것은 뜻밖의 충격이었다.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 도준을 면회 온 엄마가 변호사에게 아들의 지압을 ‘저주 받은 관자놀이’로 설명하거나 생각하라고 얘기하는 장면들은 전부 웃음을 일으킬 만하다. 하지만 관객은 그녀의 엉뚱한 사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마구 비웃을 수가 없다. 너무 진지한(진심으로 가득 찬) 엄마의 행동이 곧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 갑자기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아들을 죽이려고 했던 과거다. 즉 도준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침을 맞자고 제안하는 광기 어린 엄마는 더 이상 모성애로 설명될 수 없는 존재다. 관객은 아들을 구하고자 하는 엄마의 본능과 함께 사건을 따라가지만, 그 원동력이 단순한 모성애가 아님을 점점 깨닫게 되면서 혼란에 빠진다. 아들에 대한 엄마의 집착에는 욕망과 죄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모성애의 이면을 그려내는 배우가 바로 김혜자라서 더욱 양가적인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봉 감독은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어머니상을 창조해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흔들리는 주체. 마음의 감옥(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허벅지에 침을 놓는 엄마는 1백 년의 한국 영화에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WORDS 전종혁(영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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