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브리그>는 보기 드문 스포츠 드라마다. 선수의 피, 땀, 눈물 섞인 드라마를 내세우지 않는다. 그보다는 뒤에서 일하는 구단 프런트 이야기가 중심이다. 효율을 중시하는 냉철한 단장, 모태 야구 팬인 운영팀장이 주인공으로 나선다. 둘의 연애 따위는 없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신선한데, <스토브리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야구 비즈니스를 파헤친다. 감동 어린 창업자의 성공 스토리를 녹이지도 않았다. 기존 공중파 드라마의 성공 공식, ‘평타’는 치는 공식을 무참히 부순다. <스토브리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드라마란 무엇일까.
EDITOR 조진혁
새 시대의 새 드라마, <스토브리그>
<스토브리그>는 이제껏 본 적 없는 드라마다. 야구를 하지 않는 야구 드라마인 것도 그렇고, 골수 야구 팬과 야구 룰도 모르는 드라마 팬 모두를 만족시킨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스토브리그’는 프로 야구의 한 시즌이 끝나고 다음 시즌이 시작하기 전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제목에서부터 당차게 밝히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 야구 경기를 제대로 보긴 힘들 것’이라고. 의욕 상실한 구단, 무책임한 운영진, 파벌 싸움을 일삼는 코칭 스태프, 무기력한 감독의 모습이 첫 회에 이미 짧은 몽타주로 지나간다. ‘야구 룰 정도만 아는’ 신임 단장 백승수가 4년 연속 꼴찌 팀인 드림즈를 살리기 위해 들어온다. 멀게는 <공포의 외인구단>부터 조금 덜 멀게는 <슬램덩크>까지, 익숙하게 보고 또 보아온 ‘꼴찌 탈출 감동 스포츠 드라마’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재료를 다 갖춘 <스토브리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스포츠 드라마가 아니라, 하이퍼리얼리즘을 표방하는 오피스 드라마임을 알 수 있다.
직장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별의별 인간 군상이 다 모여 있다. 그건 수천 명이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앞만 보고 일하는 대기업도, 사장님 포함 서너 명이 일하는 작은 기업도 마찬가지다. ‘가만히 하루를 채워도 월급은 나온다’고 믿는 의욕 상실형 인간, 변화를 끔찍이 싫어하고 현상 유지에만 급급한 인간, 반대로 의욕은 많은데 방향을 모르고 헤매느라 도리어 민폐를 끼치는 인간, 누가 꽂아준 건지 궁금한 낙하산, 놀랍게도 드림즈의 운영과 마케팅, 홍보를 맡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유형들이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이런 인물들을 공들여 보여주지 않을 텐데, 어찌된 영문인지 <스토브리그>에는 온통 이런 인물들뿐이다. 체질 개선이 필요한 조직이 갖고 있는 모든 문제점이 드림즈의 구성원 면면을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시청자는 자연스레 내일 출근하며 마주칠 몇몇 얼굴을 떠올린다.
현실에는 반드시 등장하지만 드라마에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는 또 있다. 주인공 백승수는 AI인지 인간인지 모를 정도로 입력 값에 따라 충실히 행동한다. 감정이라곤 1도 드러나지 않는 건조한 말투, 정의감보다는 객관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움직인다. 하나 마나 한 소리를 가장 싫어하고, 효율적으로 할 말만 한다. 어린 시절부터 사랑해온 야구팀 드림즈의 운영팀장으로, 애정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이세영과는 정반대다. 선수 트레이드 문제를 두고 “진행 상황도 공유하기 어렵냐”는 이세영의 말에 백승수는 “믿음으로 일하는 거 아닙니다. 각자 일을 잘하자는 겁니다”라고 대꾸한다. 바로 이거다. 사회생활을 하는 대다수 현대인은 그동안 기분과 감정으로 일하는 인간들을 숱하게 봐왔다. “우리가 남이냐”를 강조하는 대한민국 특유의 끈끈한 유대 속에서, 신뢰를 다른 의미로 남용하며 업무에 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백승수는 일의 목적과 정당한 과정만을 중시한다. 그 사이에 쓸데없는 친절이나 불필요한 믿음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2020년의 트렌드 키워드 중 하나인 ‘느슨한 연대’를 몸소 실천한다. 하나의 목적과 방향성은 공유하되 팀 구성원 모두가 ‘정’이나 ‘믿음’ 같은 감정으로 끈끈하게 얽힐 필요는 없다. 각자 맡은 일에나 충실하자는 주인공이라니. 대한민국 드라마 최초로 ‘정 없는 인간’이 주인공으로 탄생한 셈이다.
게다가 <스토브리그>엔 두근거리는 로맨스도 없다. 원래 드라마 속 남녀 주인공은 일로 만난 사이에서 연애만 하는 사이로 발전하지 않던가. 백승수와 이세영은 자칫 ‘싸가지 없는 상사와 열정 넘치는 직원’으로 연애를 시작하는 대신, 서로 인정하고 배려하는 좋은 동료로 성장한다. 젊은 남녀만 보이면 그저 “니들 연애하냐?” 묻는 이 땅의 모든 회사 상사들이라면 눈여겨봐야 할 설정이다.
전형적이지 않은 건 하나 더 있다. <스토브리그>는 업계에 만연한 잘못된 관행과 뿌리 깊게 썩은 관습을 전면에 드러낸다. 이미 2회 방영 이후 “저거 아무래도 내가 응원하는 팀 얘기 같다”는 간증이 쏟아졌다. 이 작품으로 데뷔한 이신화 작가는 빈틈없는 취재로 리얼리티를 한층 살렸다. 프로팀의 자문을 얻고 야구학회에도 참석해 대본 한 줄도 허투루 내보내지 않았다. 대본 자문에 이름을 올린 전문가만 18명에 달할 정도다. 꿈과 희망이 가득한 야구 판타지 대신, 현실의 민낯을 이토록 사실적으로 담아내기도 힘들다. 이 낯 뜨거운 실상은 비단 스포츠계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어느 조직이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문제가 존재한다. 다들 덮어두고 쉬쉬하기 바쁘기에, 우리의 직장 생활은 힘들 수밖에 없다. 뭐가 문제인지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드림즈에 입사한 백승수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최우선 해야 할 과제를 수립하고, 풀어나간다. 좁게는 야구계, 더 넓게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악습을 뿌리 뽑고, 혁신이 탄생하기까지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팀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건 모두의 진심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개선하는 과정 그 자체임을. 드라마의 전형성을 하나부터 열까지 탈피한 전개 방식과 야구 소재에 대한 진정성 있는 접근은 드라마 후반을 향해 가는 지금, 우리 모두의 마음을 움직인다. <스토브리그>는 가슴 절절한 로맨스도, 쫓고 쫓기는 스릴도 없이 촘촘한 이야기 전개만으로 흡입력 강한 드라마가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계약 갱신이나 트레이드가 이루어지는 동안 야구는 그저 거들 뿐, 세상에 없던 근사한 오피스 드라마가 탄생했다.
WORDS 서동현(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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